디안笛安 세느강은 얼지 않는다塞納河不結冰 2

세느강은 얼지 않는다 2

그날 나는 여행단을 호텔에 바래다주고 이튿날 아침에 모이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대형 버스가 와서 그들을 화물처럼 싣고 벨기에에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면 내 이번 일도 기본적으로 마무리된다. 그 다음 여행단은 다음 주 수요일에 샤를드골공항에 도착하기로 돼 있었다. 따라서 나는 무려 닷새나 주말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술을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집에 돌아가도 란잉藍纓이 없을 것이다.

란잉은 내 여자친구였다. 우리는 벌써 칠 년간 동거했으며 지금은 냉전 중이었다.

칠월의 파리는 아직 여름이 아니었다. 줄곧 내 기억 속의 파리는 일 년 중 여섯 달이 겨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달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어느 주는 초봄이고 어느 주는 늦가을이어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막 파리에 왔을 때 바로 그런 날씨가 가장 골치가 아팠다. 우리는 사계절 옷을 다 꺼내놓고 시시때때로 바꿔 입어야 했다. 맨 처음 나와 란잉은 함께 겨우 십오 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집을 빌렸는데, 생각나는 공간을 총동원해 옷을 걸어야 했다. 우리 둘은 파리에 온 첫해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사귀고 동거에 들어갔다. 그것은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열아홉 살이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듯하다. 란잉은 열여덟 살이었고 중국 내 어느 학교에서 연애 문제로 사고를 치는 바람에 부모님에 의해 보내진 신세였다. 만약 우리가 국내의 어느 도시에 있었다면 나와 란잉의 만남과 사랑은 아마도 어설픈 아이돌드라마의 장면을 흉내 내다가 내친 김에 마찬가지로 어설픈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함께 운명에 의해 배경이 잘못 설치된 무대 위에 던져졌다. 그래서 혼돈 속에서 본능에 의지해 극본 없는 즉흥극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마지막 결과는 기이하고 혼란하여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것은 어쨌든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였다.

그때 란잉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중개회사의 소개로 고색창연한 18세기 석조 주택에 짐을 풀었다. 춥고, 눅눅하고, 벽난로에서 계속 쥐인지 아닌지 미심쩍은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하필이면 몇 명의 룸메이트가 전부 똑같이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방글라데시 혹은 파키스탄의 유학생들이었다. 또한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나중에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란잉이 공동주방의 전기렌지를 쓰는 것도, 일층 우편함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 것도 못하게 했다. 결국 란잉은 혼자서 아무도 몰래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꾸려 여러 번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밤중에 사촌언니를 찾아갔다. 당시 우리 세 사람, 그러니까 나와 란잉의 사촌언니와 그리고 별명이 중금속인 사촌언니의 남자친구는 함께 아파트 하나를 세 내어 살고 있었다. 나와 란잉은 바로 그 낭패스러운 밤에 서로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사촌언니와 중금속이 밖에서 밤을 새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란잉은 내 방에서 잤다. 자정께에 우리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서로의 첫날밤을 치렀고, 새벽 두 시에는 벌써 오래 함께 지낸 부부처럼 만약 그 집에서 나간다면 둘이 어느 곳의 어느 가격대의 집을 구해야 할지 의논했다. 나는 우리가 마치 옛날 사람처럼 먼저 신혼 초야를 보낸 뒤, 차츰 서로를 손님처럼 존경하는 부부가 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 둘은 세느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 도시는 평소와 같았다. 아무도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혹은 그들이 보기에 노란 피부와 까만 눈동자의 젊은 동양인 커플이 손을 잡고 그 도시를 활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내 열아홉 살의 몸속에서 어떤 것이 이미 꺼져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순조롭게, 아무 기미도 없이 늙어가기 시작했다.

지난 칠 년간 나와 란잉은 그닥 헤어질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세상의 보통 남녀들이 겪는 모든 시련을 다 겪었다. 예컨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끝에 느끼는 권태와, 생계문제로 인한 언쟁과 다툼 그리고 잠시 딴마음을 먹었다가 어느 새벽 머리를 감싸 안고 터뜨리는 통곡까지 안 겪은 일이 없었다. 불처럼 뜨겁고 얼음처럼 차가운, 뼈아픈 미련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이제 란잉은 이미 맨 처음 방글라데시인에게 설움을 받던 그 가엾은 소녀가 아니다. 화사한 파마를 하고 랑콤 루즈를 바르고 있으며 일거수일투족에서 경험 많은 여성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지금 그녀가 일하는, 원저우 溫州 사람이 문을 연 화장품 면세점에서 파리에 막 온 어린 여자들은 그녀를 ‘란잉 언니’라고 부른다. 그녀는 온화하고 친절하며 대단히 절도 있는 말투로 그녀들의 전화를 받고 그녀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한다. 예컨대 이민국의 거류 수속은 어떻게 밟는지, 어느 은행의 수수료가 상대적으로 싼지, 그리고 어떻게 의사를 찾아 애를 떼야 하는지 척척 알려준다. 아마도 누군가의 눈에 그녀는 이미 파리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다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온화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나는 내심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점점 더 나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파리에 와서 칠 년 동안 연이어 학교를 옮겨 다녔고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 본래 나는 무슨 공부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가까스로 어느 사립학교의 학사 졸업장을 땄지만 그 학교의 이름은 밝히고 싶지 않다. 말하고 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중국 내에서 여행사를 운영한다. 그래서 졸업 후 나는 그의 일을 도왔고 특히 파리 여행단의 관광을 책임졌다. 그래서 최근 이 년 사이 나는 유럽의 크고 작은 이십여 개 나라를 뛰어다녔다. 아마 앞으로도 몇 년간 그렇게 아무 희망 없이 관광지와 관광지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할 것이다. 한 마디로, 평생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의지해 먹고 살 것이다. 란잉은 나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사람의 환심을 산다. 그녀를 처음 만난 프랑스인은 거의 예외 없이 그녀의 프랑스어 실력을 칭찬하곤 한다. 그녀는 곧 명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딸 것이다. 그녀의 백인 지도교수는 그녀가 졸업 후 실험실에서 반년 동안 자기 일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녀가 나중에 일자리를 구하면 반드시 근사한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그저 용돈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장품가게 여주인조차 그녀가 마음에 들어, 늘 그녀를 가리키며 성가신 손님들에게 말하곤 한다.

“저 사람이 우리 가게 지배인이니까 용건이 있으면 다 저 사람한테 얘기해요.”

그래서 나 자신조차 란잉에게는 나를 떠날 만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아직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그래도 아주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서일 뿐이라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사실 나도 그녀에게 아주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문득 생각나곤 한다. 겨우 열여덟 살이었던 그해,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침한 골방에 앉아 나와 방세와 전기요금을 일일이 계산했다. 그녀는 열여덟 살에 가난한 부부의 갖가지 비애를 경험했고 열아홉 살에는 서로 어려움을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스무 살에는 이미 모든 꿈을 상실했다. 지금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 되었으며 노련하고 강인하며 섹시했다.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모두 독립적이었고 이 세상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나만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제껏 청춘을 누려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그녀를 동정하는 이유였다.

나는 지하철에 앉아 천천히 옛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내 란잉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생각 끝에 그만두기로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2호선 북쪽 방향 열차를 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18구에서 내려 술집을 찾아야 했다. 우선 몽마르뜨 근처에 있는, 그 아일랜드인의 술집에 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 술집은 막 이 세상을 떠난 쑤메이양이 한때 일하던 곳이었다.

塞納河不結冰 2

那一天,我把整个团的人送回了酒店。告诉他们次日清晨的集合时间。等明天早晨自会有一辆大巴来把他们像送货那样有条不紊地送到比利时。我这次的工作基本告一段落。下一个团要在下周三的时候到达戴高乐机场。所以说,我眼下拥有一个长达五天的周末。我决定去喝一杯,反正现在这个时候,如果回家的话,蓝缨是不会在家的。

蓝缨是我女朋友,我们已经同居了七年,目前正在冷战中。

七月的巴黎依然不是夏天。一直以来,我的印象中,巴黎一年大概有六个月都是冬季。然后剩下的六个月就很难说了,一周是初春,一周是晚秋,怪诞得很。刚刚到巴黎的时候,最头疼的就是这种天气。因为这让我们不得不把一年四季的衣服全都拿出来时刻准备着。当初我和蓝缨一起租一间只有十五平方米大的房子,我们不得不把整个屋子里可以想到的空间全部用来挂衣服。我们俩是在来巴黎的第一年闪电般地认识并且同居的。这在留学生里,一点都不稀奇。那时候我十九岁,我似乎说过了;蓝缨十八岁,在国内的学校里因为恋爱的关系闯了祸因此被家里送出来。如果是在国内的某个城市里,我跟蓝缨的相遇以及相恋或者还能模仿一下那些拙劣的偶像剧的场景,顺便搞一些同样拙劣的悲欢离合出来。但是,在当时,我们是一起被命运抛到了一个搭错布景的舞台上。于是,就只能在懵懂中凭着本能演出一场没有剧本的,即兴发挥的戏码。最后的结果或者尴尬到光怪陆离,但是那毕竟是我们自己的故事。

那个时候,刚刚抵达巴黎的蓝缨被她的中介公司安插到了一阃18世纪的老旧的石头房子里面。阴冷,潮湿,壁炉里面还总是传出来不知道是不是老鼠的可疑声响。偏偏同屋是几个同样不怎么通法语的孟加拉还是巴基斯坦的留学生。也不知道最初是因为什么,总之后来他们几个联合起来,不准蓝缨用公共厨房里的微波炉,不准蓝缨把自己的名字贴在楼下的信箱上,等等等等。然后蓝缨一个人,不声不响地收拾好了她的两个大箱子,倒了好几趟地铁,在深夜的时候来投奔她的表姐。当时我们三个人合租一套公寓,我,蓝缨的表姐,还有表姐的男朋友,外号叫重金属。我和蓝缨就是在这样一个狼狈不堪的夜晚认识的。

有一天,表姐和重金属彻夜未归。那一天,蓝缨睡在了我的房间里。午夜,我们脸红心跳地经历了彼此的初夜,凌晨两点的时候,已经像是生活了很久的夫妻一样讨论着如果从表姐这里搬出去的话,我们俩应该找一间什么价位什么地段的房子。我觉得我们变成了古时候的人,先经历了洞房花烛夜,然后再慢慢地开始相敬如宾。次日清晨,我们俩走到了塞纳河边上。这个城市一切如常,没有人对我们投来好奇的目光。或者在他们眼中,一对黄皮肤黑眼睛的东方人,一对都是花样年华的东方人,手牵着手出现在这个城市本来就没有什么可奇怪的。可是我清晰地感觉到,我十九岁的身体里有种什么东西,已经熄灭了。于是,我就顺利地、无声无息地开始变老。

七年下来,我和蓝缨似乎已经没有什么充足的理由分开。我们经历过了世间的饮食男女经历过的所有考验。比方说天长日久之后的厌倦,比方说因为柴米油盐而拌嘴乃至纷争,比方说短暂的见异思迁之后再于某个凌晨抱头痛哭,总之,什么都经历过了,除了热烈似火凛冽如冰的,疼痛的眷恋。现在的蓝缨已经不是当初那个可怜兮兮的被孟加拉人欺负的小女孩,她烫着很妖娆的卷发,涂兰蔻唇膏,一举一动都透出一种走过江湖的女人才有的干练。在她打工的那家温州人开的化妆品免税店里,那些初来乍到的小女孩都叫她“蓝缨姐”。她以一种温暖、热情、非常有分寸的口吻接她们的电话,解答她们的所有问题,比方说移民局办居留的手续,比方说哪一家银行的手续费比较低,比方说怎么找医生打胎。或者在某些人的眼中,她已经变成了一个巴黎人。

只不过,她现在已经不会再用那种温暖的语气跟我讲话。我心里清楚得很,她已经逐渐地,逐渐地瞧不起我。我来巴黎七年,先后换过很多所学校,都没能读下来。我本来也就不是什么会念书的人。最终,我好不容易拿到一所私立学校的学士文凭。学校的名字我就不想再提了,说出来会让人笑话。我的老爸在国内是经营旅行社的。所以,毕业以后我的工作就变成了替他的旅行社接待来欧洲,尤其是来法国旅游的团。这两年因为这个关系,我也算是跑过了欧洲大大小小的二十多个国家。可能在未来的数年内,还将这样毫无指望地在景点与景点之间穿梭下去。一句话,终其一生,我恐怕都会是个仰仗老爸吃饭的人。蓝缨和我不一样,她可以凭自己的力量取悦所有的人。几乎每一个初次见面的法国人都会夸奖她的一口法语。她马上就要在一所名校拿到她的硕士学位了。她的洋人导师要她毕业后暂时留在实验室里帮上半年的忙,并且慷慨地告诉她找工作的时候一定会帮她写措辞美好的推荐信。就连她只是打工赚零花钱的化妆品店的老板娘都喜欢她,总是指着她告诉那些难缠的顾客说:“她是我们店的经理,有事情跟她说是一样的。”

所以说,就连我自己都觉得,蓝缨有的是理由离开我。我知道,她之所以还没有开口说分手是因为心里还有那么一点点的不舍。或许她不知道,我对她,其实也只是剩下了那么一点点的不舍而已。我总是会想起,那年她才十八岁。她裹着被子坐在昏暗的斗室里跟我一点点地算房租还有电费。她在十八岁的时候经历了贫贱夫妻百事哀,在十九岁的时候懂得了什么叫做相濡以沫,在二十岁的时候就已经没有了任何梦想。现在她二十五岁了,世故,坚强,性感,无论是经济还是精神都很独立,对这个世界已然胸有成竹。可是只有我一个人知道,她从来没有享受过青春。这就是我心里总是怜惜她的原因。

我坐在地铁上慢慢地回想。有好几次,我都想把手机拿出来给蓝缨打个电话,可是后来想想还是算了。回过神来的时候,发现自己坐在二号线往北走的方向上。既然如此,我只好选择在十八区下车,然后在那里找个酒吧了。姑且就去蒙玛特附近的那间爱尔兰人的酒吧好了,那是刚刚离开这个世界不久的苏美扬曾经工作的地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