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껑宋耕-바링허우80後의 창작

2013년, ‘바링허우80後’(1980년대 생을 뜻함)는 여전히 중국 문화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거론되는 명사이다. 7월부터 8월까지 중국의 ‘바링허우’ 중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궈징밍郭景明이 연출한 영화 《소시대小時代1》과 《소시대2》가 각기 상영되었고 상상을 뛰어넘는 박스오피스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첨예하게 대립된 찬반 양 진영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들 사이에서도 극렬한 문화 논쟁을 빚어냈다.

그런데 한 가지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것은, ‘바링허우’라는 이 전형적인 세대 개념을 기초로 하는 ‘바링허우 창작’이라는 개념이 비록 중국의 문화 매체와 문학비평에서 자주 사용되기는 해도 그 겉과 속의 의미에 대한 규정이 아직까지도 상대적으로 모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바링허우 창작’의 미적 경향과 가능성을 논의하기 전에 반드시 이 개념을 조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중국의 역사적 콘텍스트 속의 ‘바링허우 창작’은 사실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구분된다. 좁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이 가리키는 것은 2000년 전후 대중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청소년 작가 집단을 가리킨다. 이 집단은 처음에 두 개의 집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상하이의 《멍야萌芽》 잡지가 주관한 ‘신개념작문대상’ 출신으로 궈징밍, 장웨란 등이 포함되며 이 작가들은 소설과 수필 창작 위주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 창작 집단으로서 주로 시 잡지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목소리를 냈다.

2004년 전후, 대중매체들이 마구 ‘바링허우’ 개념을 선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중에서도 특히 춘수春樹와 한한韓寒이 잡지 《타임》의 아시아판에 작품을 게재하여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소수의 취향에만 호소하는 탓에 ‘바링허우 창작’의 명명과 전파 과정에서 시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소외되었고 특별히 소설 창작이 더 두드러졌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본 좁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은 ‘신개념 작가군’을 중심으로 하는, 대단히 전형적인 시장화의 특색을 갖춘 소설 창작집단을 가리킨다. 이 창작집단의 출현은 당시 중국의 문학창작에 대한 자본의 상상에 최대한 호응하였다. 더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직접적으로 시장을 상대하는 창작을 통해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기존의 문학체제와 관계를 끊었고, 아울러 그런 ‘효과적인’ 생산방식으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권위에 대한 반항과 자유로운 표현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은밀한 방식으로 창작의 방향을 청춘과 상상력의 이중적 소비로 새롭게 규정지었다. 이른바 ‘청춘문학’은 그 작가들과 그들의 독자들의 생리적 연령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청춘’을 자본화하고 생리적 사실을 소비의 사실로 개조하였다. 창작은 처음부터 일종의 등가적 시장교환을 지향했는데, 이른바 상상력에 대한 강조는 전통적 리얼리즘과 대립하였고 허구에 대한 숭배는 창작의 기초를 원자론적 개인 위에 수립하는 동시에 최대한 상상력을 이윤화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링허우 창작’은 처음부터 강렬한 정치성을 띤 특수한 시대적 산물로서 90년대 중국 사회의 변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어서 넓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은 좁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희석화하고 일종의 ‘객관적인’ 생리적 사실을 더 지향함으로써 상술한 시장 지향의 청춘문학을 포괄하는 동시에 비시장적이고 상대적으로 전통적인(예컨대 문학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거나 비평계에서 인정을 받거나 주류 문학상을 받은) 문학 창작자들을 그 안에 편입시킨다. 최근 몇 년 사이,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쫓는 시장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창작자들이 부단히 증가하고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으로 인해 넓은 의미의 ‘바링허우’가 좁은 의미의 ‘바링허우’를 덮어버리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가 일단 끝나면 그 기원이 망각을 고한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증명하는 듯하다. 하지만 ‘바링허우 창작’의 역사는 아직 진행태이며 좁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과 넓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이 어떻게 구체적인 창작의 성과를 통해 문학사적 경쟁을 전개할지는 앞으로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좁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이든 넓은 의미의 ‘바링허우 창작’이든 비교적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비슷한 미학적 징후들을 드러냈다. 그 징후들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 면으로 나타났다. 우선은 도시 제재의 글쓰기다. 선배 작가들(예를 들어 1950년대 생과 1960년대 생)이 농촌에서의 경험에 공을 들인 것과는 달리, ‘바링허우’ 작가들은 도시 생활에 더 열중했다. 중국의 대규모 도시화 과정은 대체로 199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그때는 마침 ‘바링허우’ 세대의 청춘이자 성장기에 해당했다. 도시에서 살았든 농촌에서 살았든 ‘바링허우’는 모두 그 과정이 가져온 자극과 도전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비록 ‘바링허우’의 작품 중에도 농촌을 주요 배경으로 삼은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배경도 흔히 도시라는 그 거대한 거울 속 이미지로서 ‘도농’ 관계가 그것들의 지리학적 구도이다. 그것들의 내적인 결들 속에서 도시는 이미 한 풍경으로 내재화되었고 모든 작품들이 대부분 많든 적든 도시와 관계를 맺어야 했다. 중국의 현대문학사를 종으로 훑어보면 도시문학은 흔히 결여된 부분이었다.

1930년대에 현대파가 출현했고 1980년대 상하이에서 ‘도시문학’이 주창되기는 했지만 방대하고 풍부한 농촌 서사와 비교하면 역시 빈약해보였다. 그 원인은 단지 사회의 구조가 줄곧 농촌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데에 있었다. 그러나 ‘바링허우’의 도시 서사는 중국의 현대 도시화 과정과 상호일체를 이뤄, 그들의 작품 속에서 도시는 기이하지 않고 일상적이며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삶의 흐름으로 존재했다. 아마도 그들의 향후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도시 서사가 나올 것이다. 또한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우리의 이 단편소설선은 기본적으로 도시 제재 소설을 가려 뽑았다. 이어서 그 다음은 ‘자아 경험’의 진술이다. ‘바링허우’의 작품을 보면 가장 흔히 눈에 띄는 형식이 일인칭 서술이다. 그것은 ‘바링허우’가 ‘자아 경험’을 글쓰기의 자원으로 삼는다는 사실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바링허우’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글쓰기의 정신분석학은 사실 ‘나’, 즉 고독한 현재적 개체의 세계에 대한 부적응의 느낌이며 이런 부적응은 흔히 청춘기의 정서적 곤혹과 맞붙어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청춘기의 애욕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처럼 위대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바링허우 창작’은 자주 개인적 감정의 분출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명철한 이성에 의해 승화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 그 작품들 속에서는 감정적 갈등의 반복이 더 빈번했고 경험 미숙으로 인한 억지 감정이 노출되곤 했으며 철학적 정신 차원의 비약도 드물었다. 이런 자아 경험의 진술은 우리가 ‘일기식’이라고 부르는 문학을 구성했는데, 만약 어떤 외적인 사회구조가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박약하고 부실해보였을 것이다.

자아 경험의 진술은 당연히 성장의 주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자아 내에서만 순환되고 사회와 세상으로 열리지 않은 탓에 그 ‘성장’들은 일종의 ‘거짓 성장’이 돼버렸고 바흐친이 정의한, 모범적 성장소설이 갖춘 자기 갱신과 사회 개조의 기능도 갖지 못했다. 일부 ‘바링허우’ 작품들 중에는 심지어 성장을 거부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현재적이고 즉각적인 자신에게만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바링허우 창작’에는 짙은 역사허무주의의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바링허우 창작’의 가장 의미심장한 포인트이다. ‘바링허우 창작’의 허무주의는 거의 무의식적이다. 이것은 과거 문학사 속의 허무주의와는 매우 다르다. 1980년대의 허무주의는 명확한 반동의 대상이 있었고 허무주의는 수단에 불과했다. 허무주의로 ‘혁명’과 ‘숭고’를 해체했으며 허무의 배후에는 사실 명철한 이성과 역사 실용주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바링허우’의 허무는 전혀 명확히 가리키는 바가 없고 그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만 같다. ‘바링허우’의 수많은 작품에서 인물은 흔히 아무 ‘역사’도 없이 어떤 순간에 나타났다가 어떤 순간에 사라진다. ‘바링허우’에게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다 압착되어 있고 또 현재는 혼돈스러운 물질세계일 뿐이다. 이에 그들은 역사 속에서 훌쩍 도망쳐 나와 몇 세대에 걸친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바꿔놓았다. 이런 역사 허무주의는 1990년대 이후 중국 문학에 나타난 반反역사의 경향을 계승하면서도 공시적 차원에서 냉전 종결 후 자본주의가 거의 천하를 통일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There is no alternative) 역사적 맥락에 조응하였다.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은 비평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본래 의도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양식의 문학 창작이든 예외 없이 풍부한 역사 정보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풍부한 역사 정보를 품은 작품만이 후대에 길이 남을 고전이 될 수 있다. ‘바링허우’에게는 그런 고전이 있을까? 아직까지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바링허우’도 벌써 서른 살이 훌쩍 넘었고 이것은 대단히 무시무시한 사실이다! 만약 ‘바링허우 창작’이 기존의 궤적 위에 머문 채 계속 진행되고 자아 경험과 역사 허무주의를 자동적 의식으로 삼은 채 별 사유 없이 받아들인다면 ‘바링허우 창작’은 어떤 변화나 진보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 다행히 역사는 쉴 새 없이 핵분열을 하며 그 핵분열들 속에서 모든 개체는 영혼과 정신에 충격을 받는다. 21세기의 첫 번째 10년 동안, 중국사는 세계사와 거의 동시에 모종의 핵분열과 국면의 전환을 겪었지만 우리는 같은 시대의, 심지어 같은 연령의 그 작가와 예술가들이 그 ‘가장 좋은 시대이자 가장 나쁜 시대’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예컨대 우리의 이 단편소설선에 뽑힌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분명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자아의 경험에서 해방되어 용감하게 생활세계의 복잡성에 맞서고 자신의 감정에만 연연해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상호작용의 방식으로 문학의 경험을 확장함으로써 결국 새로운 미학 원칙과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분량의 제한 때문에 많은 우수 작가들의 작품을 뽑지 못했음을 밝혀야만 하겠다. 나중에 또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선정된 여러 작가들이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것에 감사한다. 멍판화孟繁華 교수는 이 프로젝트의 협업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었고 외연사外硏社의 차이젠펑蔡劍峯 사장과 인문사회과학 분사의 우하오吳浩 선생, 덩샤오칭鄧曉菁 여사는 출판 분야의 편의와 도움을 제공해주었다. 이에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听盐生长的声音 80后短篇小说集> 前言에서

엮은이 소개:
쑹겅宋耕
1973년 생. 1995년 베이징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2000년 홍콩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싱가포르 남양이공대학과 호주국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는 홍콩대학 중문학원 부교수로 중영번역과 중국연구 커리큘럼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영역은 중국 현대 대중문화, 젠더 연구, 번역과 트랜스문화 연구 등을 포괄한다. 현재까지 The Fragile Scholar(홍콩대학출판사, 2004), 《 다시 전통을 읽다重讀傳統》 (外語敎學與硏究出版社, 2005), 《Men and Masculinities in Contemporary China》 (Brill, 2014) 등 7권의 중국어, 영어 저서와 편저를 출판했으며 국제 학술잡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양칭샹楊慶祥
1980년 생. 문학박사, 중국 런민대학 문학원 부교수, 중국 현대문학관 객좌연구원. 주로 중국 현대문학 비평과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출판된 저작으로 《‘다시 쓰기’의 한도: ‘문학사 다시 쓰기’의 상상과 실천‘重寫’的限度: ‘重寫文學史’的想像與實踐 》 (北京大學出版社, 2011), 《 분열의 상상分裂的想像》 (베이징대학출판사, 2013),
《현장의 각축現場的角力》 (雲南人民出版社, 2013)이 있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 중국 올해의 청년비평가상(2011), 제10회 상하이문학상 이론상(2013), 제3회 탕타오唐弢청년문학연구상(2014), 제10회 ‘중국어문학미디어대상華語文學傳媒大獎’ 올해의 신인상 노미네이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