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 한중 영화가 대화하는 방식, 혹은 ‘경계’에 선 조선족 여인의 삶

한국과 중국 영화의 ‘합작’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의 결혼 발표는 시진핑 주석의 방한과 더불어 찾아온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지난 달 채림과 가오쯔치가 서막을 연 한중영화의 이런 ‘합작’은 황찬성-류옌, 크리스-쉬징레이 커플로까지 번져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현상’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일러 보이지만 한중 영화계 사이 대화의 수준이 더욱 성숙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중 영화의 ‘합작’ 역사는 자못 길다. 중국과의 수교 이전 홍콩과의 합작은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아나키스트>(유영식 감독)을 시작으로 대륙 중국과 활발한 합작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장르도 <묵공>, <무극>처럼 액션무협부터 <호우시절>, <이별계약>처럼 로맨스까지로 변화하고 있다. 10여 년간의 시도 가운데는 처절한 실패도 있었고 빛나는 성공도 있었다. 배우와 감독의 ‘합작’ 커플의 연이은 탄생은 어쩌면 최근 두 나라 영화 합작이 그만큼 순항하고 있다는 분위기의 반증으로까지 읽힌다. 또한 그런만큼 단단했던 두 나라 영화의 ‘경계’가 여러 군데서 허물어지면서 상호 소통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신호로도 보인다.

한중 영화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이 있다. 조선족 출신의 장률. 최근 경쾌한 로맨스 <경주>를 통해 영화적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하긴 했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화두는 ‘경계’ 위에서 서성이거나 또는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삶을 포착해내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는 역시 <망종>이다.

순희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아들 창호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조선족이다. 언제고 고향에 돌아가는 게 그녀의 꿈이다. 그녀가 어떻게 지금 같은 삶의 모습을 하게 됐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있었을 법한 상처의 그림자만이 그녀의 삶에 어른거린다. 딱히 생업이 없는 그녀는 삼륜차를 끌며 김치를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 우연히 알게 된 조선족 김씨의 유혹에 순희는 일말의 ‘희망’을 꿈꾼다. 그러나 김씨의 부인에게 둘 사이가 발각되면서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된다. 평소 자신의 김치를 좋아했던 경찰 왕씨를 만나지만, 그 역시 석방의 댓가로 순희의 몸을 요구한다.

망종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한다. 해마다 음력 5월에 찾아오는 이 절기에는 까끄라기(芒)가 생긴 보리는 곧 거둬들이고, 또 같은 이유로 벼는 곧 심어야 한다. 계절로 보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야 하는 ‘경계’ 위에 서 있는 절기다. 감독의 의도는 아마도 순희의 망종과도 같은 삶을 이야기하려는 데 있는 것같다.

중국 내 조선족은 약 8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는 그래도 꽤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공식 소수민족 55개 중에서도 작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당시 ‘간도’라 불리던 만주 지역으로 건너가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후 해방과 남북분단을 거치면서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와의 관계는 더욱 미묘한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는 물론이고, 그 사이에 중국의 경계가 하나 더 추가되면서 이중, 삼중의 경계들 속에 얽히게 되고 말았다.

사실 중국의 법률과 제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소수민족을 경시하거나 차별하지 말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중국 내부에서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는 적지 않은 ‘구별’과 ‘차별’의 기제 속에서 작동되고 있다. 영화 <망종>은 그런 관계 속에서 다시 이중으로 차별당하는 여성과 어린이 조선족의 삶을 다루고 있다. 민족적 차별과 성별적 차별, 그리고 세대적 차별이 뒤얽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경찰에게 풀려나오지만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던 순희는 아들 창호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이튿날 창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삶의 깊은 나락까지 떨어진 순희는 자신이 담그는 김치에 쥐약을 풀어넣는다. 그리고 그 김치는 마을의 한 잔치집으로 배달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독약을 푼 김치를 넘겨준 뒤 홀로 들판을 가로질러 휘휘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충격을 넘어서는 새로운 설렘이 다가온다. 이전의 삶은 지나가고 새로운 희망이 그녀 앞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녀의 등 뒤에 노기처럼 서려 있다.

숨겨진 현실을 드러내서 강력한 충격으로 폭로하는 일은 영화가 가진 크나큰 위력 가운데 하나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서로를 향한 오해와 편견들을 냉철하게 돌아보면서, 역사가 만들어낸 ‘경계’들이 어떻게 우리의 의식과 정서를 옥죄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불어오고 있는 영화 ‘합작’의 훈풍이 두 나라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혹은 그 경계를 가로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구석구석까지 불어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같은 의미에서 역시 한중 영화의 ‘대화’도 다시 한 걸음 더 진화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장률은…

장률张律, 출처 Baiyin

조선족으로 연변대에서 수학한 장률은 <11세>(2001)라는 단편영화로 자신의 첫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연변대 교수이자 소설가로 활동해오던 중 갑작스런 계기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 영화를 하던 친구와 술자리에서 말다툼 끝에 “영화는 아무나 찍을 수 있다”고 ‘선언’하게 됐고, 그 말을 지키려고 카메라를 잡았다는 것.

<11세>가 베니스영화제 단편 부문에서 호평을 받은 뒤, 장편 <당시>(2004)가 로카르노영화제 등에 참가한 뒤 본격적으로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망종>(2005)에 이어 도시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중경>(2007), <이리>(2008), <경주>(2014) 등을 찍었다. <경계>(2007), <두만강>(2009), <풍경>(2013) 등이 보여주는대로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