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남녀>: 밥과 사랑, 가족을 잇는 두 줄의 끈

가족이란 무엇일까. 천륜인 혈육이니 하는 말들이 다 담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가슴 찡한 관계로 맺어지는 사람들. 혹은 좋든 싫든 정말 어쩔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지는 사람들. 가족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단위이다.

가족은 그렇게 관계의 모든 출발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세계 영화사의 수많은 걸작들이 가족의 문제를 다루어왔다.

리안(李安)은 중국어권 영화 중에서 ‘가족’을 가장 잘 찍었다고 평가받는 감독이다. 특히 데뷔작부터 내리 만든 초기 삼부작이 그렇다.

<쿵푸선생>(推手:1992), <결혼피로연>(喜宴: 1993), <음식남녀>(飮食男女: 1994)는 ‘아버지 삼부작’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쿵푸선생>은,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여성과 결혼해 뉴욕에 살고 있는 아들네 집으로 ‘이사’를 한 은퇴 노인이 겪는 문화 갈등을 그렸다. <결혼피로연>은 역시 뉴욕에서 동성 애인과 살고 있는 아들을 보러 온 부모님이 맞닥뜨리는 ‘현실’을 코믹하게 그렸다. <음식남녀>는 대만의 유명 호텔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가 물러난 아버지와 독신으로 살고 있는 세 딸들 사이의 관계를 그렸다.

<쿵푸선생>과 <결혼피로연>은 가족의 문제를 빌미로 하여 중국과 미국 사이, 혹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일어나는 문화적 충돌 문제가 뒤얽혀 있는 화면을 보여준다. <음식남녀>는 대만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족 문제의 흥미로운 해결법을 보여준다.

‘음식남녀’라는 말은 원래 유가의 경전인 󰡔예기󰡕(禮記)에 처음 나온다. 경전은 “먹고 마시고 남녀가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큰 욕구”(飲食男女, 人之大欲存焉)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족을 다룬 영화에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먹고 마시는 일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물질적 요소라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정신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렇게 밥과 사랑, 두 개의 끈으로 이루어진다.

유명 호텔 주방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아버지는 장성하도록 혼자 살고 있는 세 딸을 위해 날마다 값진 요리를 만들어 식탁 위에 올린다. 온갖 재료와 장식으로 뽐낸 중국 요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하지만 세 딸들은 그런 아버지의 ‘헌신’에 시큰둥할 뿐이다. 이미 충분히 충족된 욕망 앞에서 욕구불만 따위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는다. 딸들은 오히려 ‘음식’보다는 ‘남녀’의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남자 고등학교 교사인 첫딸은 학생들이 장난으로 보낸 연애편지에 속아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항공사 기획실에서 일하는 둘째는 같은 회사에 부임한 매력적이고 스마트한 동료와 사랑을 나눈다. 셋째는 짐짓 관심 없는 듯 행동하는 패스트 푸드점 아르바이트 친구의 남자친구를 빼앗는다.

아버지와 세 딸은 거의 매일 저녁 함께 식탁에 모이지만, 과익 충족된 ‘음식’ 앞에서 식사 공동체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딸들에게 아버지의 음식은 그다지 경이롭지 않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인 ‘음식’만으로 딸들과 소통하려고 했던 아버지의 노력은 실패한다. 그저 혈연적 관계로 태어났으니 ‘가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관계에 지나지 않는 건조한 모습, 그대로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빠진 음식은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관계를 묶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세 딸들은 차례대로 식탁 앞에서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사랑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한 떠남이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사뭇 전복적이다. 전복은 딸들을 떠나 보내고 외로운 노인으로 늙어갈 줄만 알았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다. 어려서부터 보아오던 딸의 친구, 그녀도 혼자 어린 딸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딸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 주지 못하고 늘 패스트푸드로 때우라며 돈을 건네주곤 한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만들어주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값지고 맛난 도시락을 먹으며 아이는 요리사 아저씨의 ‘사랑’을 맛본다.

영화는 결국 그렇게 아이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랑을 쏟은 아버지와 그 아이 엄마, 그러니까 딸의 친구와의 수십 년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사랑’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는 새로 얻은 사랑을 위해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왔던, 딸들과의 추억이 아로새겨져 있는 집까지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음식남녀>는 우리가 그렇게 믿어왔던 가족이라는 가치에 대해 반문을 던진다. 반복하건대, 밥과 사랑은 가족을 이어주는 두 줄의 끈이다. 사랑만 충족되고 밥이 결핍된 가족은 행복하지만 고된 삶을 산다. 하지만 밥만 충족되고 사랑이 결핍된 가족은 결국 해체에 이르고 만다. 아무리 혈연으로 묶여 태어났더라도, 사랑이 고갈된 상태에 이른 사람은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낸다. 그건 ‘관계’와 ‘사랑’, 그러니까 ‘음식남녀’에서 ‘남녀’를 갈망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건 대만이든 중국이든 한국이든… 우리 모두에게 결핍되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밥’이다.

리안은…

리안李安, 출처 Baidu

대만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건너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대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뉴욕대(NYU) 대학원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했다. 이 때 만든 단편영화가 대만정부로부터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치고 대만으로 돌아와 초기 삼부작을 찍었다. 그러나 이내 할리우드로 돌아가 본격적인 영화 인생을 시작한다. 뉴욕 생활의 경험을 살려 초기작부터 동양과 서양, 중국과 미국의 문화가 상호 교차하는 화면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할리우드에서는 <센스앤센서빌리티>, <아이스스톰>, <라이드위드데블> 등과 같이 미국적 영화를 만들다가 <와호장룡>(臥虎藏龍)이나 <색/계>(色/戒) 같은 중국 문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찍기도 했다.

전작들도 꽤 수준있는 그림을 담아냈지만, 그를 ‘논쟁’의 중심에 서게 한 건 바로 이 영화들이었다. <헐크>, <브로크백마운틴>, <라이프오브파이>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소외’ 또는 ‘소수자’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