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디산许地山(1894∼1941년)
본명이 짠쿤赞堃이며 디산地山은 자이다. 필명은 뤄화성落华生인데, 관적은 광둥廣東 졔양揭阳으로 타이완의 애국지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산문가로 ‘5·4’시기 문예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산스크리트어와 종교 방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내었다.
어느 계절을 불문하고 징산景山을 오르기 가장 알맞은 시간은 이른 아침이나 오후 3시 이후다. 맑은 날에는 안계가 아련한 곳까지 조망할 수 있고, 비가 오는 날엔 빗발의 길이와 번갯불의 번쩍거림을 감상할 수 있고, 눈 오는 날엔 무색계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완춘팅萬春亭에 앉아 정신을 모으고 북쪽 문 뒤의 대로(예전에는 길이 문 앞에 있었고, 지금은 길이 문 뒤에 있다)를 보매, 온통 행인과 거마車馬이고, 길 가의 가래나무는 잎이 모두 졌다. 맞다, 이미 입동이다. 올해 날씨는 약간 괴이해서 아직까지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감사한 것은 마름과 연꽃의 주인이 남은 줄기 부분을 걷어내 쯔진청紫禁城 밖 후청허護城河의 물빛이 여전히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선우먼神武門은 굳게 닫혀 있다.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문루 앞의 퍽이나 긴 깃대가 전체 건축의 장엄함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루 양쪽에 한 쌍을 세워두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쯔진청 위로 가끔씩 사람이 오가고 있는데, 외국 관광객들인 듯하다.
황궁 건물 하나 하나가 아주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어떻게 기율을 중시하지 않는 민족이 이렇듯 엄정한 궁정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일까? 누런 기와를 대하고 이렇게 생각해 본다. 아니다. 기율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지나친 듯하다. 이 민족은 예전의 기율을 망각하고 새로운 것을 찾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면 결국 되돌아와야 한다. 베이징의 집들은, 황궁도 포함해서 주요 건축물들은 모두 남향인데, 누구도 그렇게 지으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결국 기율이라는 것은 이익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에 무언 중에 준수되었다. 곧 여름에는 노기를 푸는 훈풍을 받고, 겨울에는 사랑스러운 따뜻한 나날이 이어지기에 집을 짓는 법칙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익은 쟁취할 필요 없이 스스로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 사회에도 이런 훈풍과 따뜻한 나날들이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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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의 하늘 위로 선회하며 날아가는 비둘기 떼가 보인다. 마작을 하거나 유곽에 드나들고 술집에 다니는 것 말고도 이것 역시 고전적인 오락이다. 이런 오락은 약간은 대중적인 것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공중에서 화기애애한 소리를 내며 훨훨 날아올라 회백색의 차가운 하늘을 느끼게 한다. 하늘 가득 어지럽게 날아올라 시끄럽게 울어대는 까마귀는 혐오스럽다.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부는 날 징산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용기가 있다면, 톈안먼 꼭대기 위의 까마귀 떼를 볼 수 있는데,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것들이 바람을 따라 날아오르매 무슨 커다란 나무 아래로 낙엽이 지는 것처럼 어지러운 것이 흥미롭다.
완춘팅萬春亭의 주위는 여기저기 파헤쳐졌다. 들리는 말로는 황궁을 관리하는 당국자가 메이산煤山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처럼 정말 커다란 석탄 덩어리인지 알아보려고 판 것이라고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설을 믿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북송이 망할 때 도성에 살던 사람들이 성이 포위되자 건웨艮嶽(건웨艮嶽는 북송의 유명한 궁정 원림이다. 송 휘종徽宗 정화政和 7년(1117년)에 착공해서 선화宣和 4년(1122년) 완공되었다. 처름에는 완쑤이산萬歲山이라 불렀으나, 나중에 건웨艮嶽, 서우웨壽嶽라 개명했다. 휘종이 직접 쓴 『어제간악기御制艮嶽记』에 의하면 ‘간艮’은 궁성의 동북쪽이라는 의미이다. 1127년 금나라가 볜징汴京을 함락시켰을 때 파괴되었다.)의 건축 목재를 해체해 땔감으로 썼다기에 베이징의 건축을 기획한 사람이 우선 커다란 석탄 더미를 쌓아두어 만약 도성이 포위되었을 때 백성들이 궁전을 훼손하지 않게 했던 것일까? 이건 바보같은 생각이다. 내가 기획한다면 미산米山이 제일 좋을 거 같다. 쌀은 위급할 때 생으로 먹을 수 있지만 석탄은 어찌 되었건 간에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징산이 타이항太行의 끄트머리 봉우리라고 한다. 이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설이다. 시산西山에서 동쪽으로 몇 십 리나 되는 평원에 어찌하여 불편부당하게 베이징 성 한 가운데 징산이 나왔겠는가? 만약 베이징의 건설이 징산의 자오子午 여기서는 남복의 종축선을 가리킨다. 에 맞춘 거라면 왜 베이하이의 츙다오瓊島에 맞추지 않았는가? 내 생각에 징산은 쯔진청 밖 후청허護城河를 개착한 흙으로 쌓은 것이고, 츙다오 역시 베이하이를 팔 때 나온 흙으로 쌓은 것이다.
정자의 나무들 사이로 멀리 구러우鼓樓가 보인다. 디안먼地安門 앞뒤의 대로는 인마人馬가 묵묵히 오가고, 저잣거리의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구러우는 정양먼正陽門처럼 웅장하게 버티고 서있지 않다. 그 이름은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 한 번은 밍츠러우明恥樓였다가 또 한 번은 치정러우齊政樓였는데, 현재는 다시 밍츠러우인 듯하다.(구러우의 명칭 변경은 그 역사와 같이 한다. 구러우는 역사적으로 세 차례 훼손되고 네 차례 중수되었다. 원대 지원至元 9년(1272년)에 처음 지어졌을 때는 치정러우齐政楼라 했는데, 불에 타버린 뒤 대덕大德 원년(1297년)에 중건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소실되었다. 명 영락永乐 18년(1420년)에 다시 중건되었다가 벼락을 맞고 소실되었다. 가정嘉靖 18년(1539년)에 다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청 가경嘉庆 5년(1800년)과 광서光绪 20년(1894년)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 의화단의 난 때 8국연합군대에 의해 구러우 안에 있는 북들이 훼손되었는데, 이로 인해 1924년에 구러우는 밍츠러우明耻楼로 개명되었다.) ‘수치를 밝히는 것明恥’은 어렵지 않지만, ‘치욕을 씻으려면雪恥’ 노력해야 한다. 다만 두렵기로는 시민들이 그 치욕이 여전히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가련한가. 지난 몇 년 간 ‘삼민주의’이 ‘제국주의’니 하는 명사들이 북벌군이 베이징에 도착함에 따라 시민들은 전서체의 표어들을 보고 모두들 각자가 더없는 치욕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듯하다. 그 치욕은 제국주의의 압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남들 하는 대로 부화뇌동하여 타도와 전복顚覆을 외쳤다.
산에서 내려오다 보면 숭정 황제가 순국한 곳에 여전히 반쯤 죽은 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나무 위에는 원래 명주실이 매어져 있었는데, 경자년에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들어온 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현재 말라비틀어진 부분에는 여전히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당시 명주실 흔적이 아직까지도 아련하게 보인다. 의화단운동의 결과로 이 나무가 해방되었고, 이 민족이 해방되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상이던가? 산 뒤의 측백나무는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이곳에 대해 영원한 공물供物을 제공하는 듯하다.
서우황뎬壽皇殿은 굳게 닫혀 있는데, 누구라도 누르하치와 같은 이가 다시 백치의 꿈을 꾸기를 원치 않기 때문일까? 매년 제사는 거행되지 않고, 장엄한 제례악도 들을 수 없는데, 때때로 시골 마을에서 도성에 들어와서 앙가秧歌를 부르는 아이들이 담장 밖에서 치는 징과 북소리만이 전각 앞까지 도달한다.
징산 문에 도착해 고개를 돌려 정상의 방금 앉았던 곳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모두 내려왔다. 나무 위에서 익숙하지만 오히려 알 수 없는 새 몇 마리가 지저귀고 있다. 정자 안의 낡은 고불古佛은 아는 이 없는 수인手印을 하고 여전히 앉아 있다.
1925年 6月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출판 『공산령우空山靈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