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설구침 제1집

  古者胎教之道: 二字依『新書』[2]引補.. 王后腹之七月而就宴室[3], 『新書』引作王后有身之七月而就蔞室, 太史[4]持銅[5]而御戶左, 太宰[6]持斗[7]而御戶右, 太卜[8]持蓍龜而御堂下, 諸官皆以其職御於門內. 太卜已下依『新書』引補. 比及三月者, 比及二字『新書』引作此, 王后所求聲音非禮樂, 則太史蘊瑟『新書』引作撫樂而稱不習; 所求滋味者『新書』引無者字非正味, 則太宰倚斗而不敢煎調,『新書』引有已上五字, 又倚作荷. 而言曰:『新書』引無言字. “不敢以待『新書』引作侍王太子.” 太子生而泣, 太史吹銅曰: “聲中某律.” 太宰曰: “滋味上某.” 太卜曰: “命云某.” 然後為王太子懸弧[9]之禮義: 東方之弧以梧, 梧者, 東方之草, 春木也; 其牲以鷄, 鷄者, 東方之牲也. 南方之弧以柳, 柳者, 南方之草, 夏木也; 其牲以狗, 狗者, 南方之牲也. 中央之弧以桑, 桑者, 中央之木也; 其牲以牛, 牛者, 中央之牲也, 西方之弧以棘, 棘者, 西方之草也, 秋木也. 其牲以羊, 羊者, 西方之牲也. 北方之弧以棗, 棗者, 北方之草, 冬木也. 其牲以彘, 彘者, 北方之牲也. 五弧五分矢, 東方射東方, 南方射南方, 中央射中央, 西方射西方, 北方射北方, 皆三射. 其四弧具, 其餘各二分矢, 懸諸國四通門之左, 中央之弧亦具, 餘二分懸諸社稷門之左.太卜曰至此已上依『新書』引補[10]. 然後卜王太子名:『大戴禮記』[11]引作然後卜名. 上無『新書』引作母, 下放此.取於天, 下無取於墜『新書』引作地, 中無取於名山通谷, 無拂『新書』引作悖於鄉俗. 是故君子名難知而易諱也, 此所以養恩『新書』引作息之道也. 新書』引有也字,『大戴禮記・三保傅篇』, 賈誼『新書』十胎教雜事.

  옛날의 태교의 도는 다음과 같았다.’古者’ 두 글자는 『신서』에 의거하여 보충함. 왕후가 임신한지 7개월이 되면 연실宴室로 옮긴다『신서』에서 인용한 바로는 왕후가 임신한지 7개월이 되면 ‘루실蔞室’로 나아간다고 하였음. 태사太史는 동銅을 들고 문 왼쪽에서 시어侍御하고, 태재太宰는 두斗를 들고 문 오른쪽에서 시어하며, 태복太卜은 시구蓍龜를 들고 당堂 아래에서 시어하고, 나머지 관리들도 각자의 직책에 따라 문 안에서 시어했다‘태복’ 이하의 구절은 『신서』에 의거하여 보충하였음.

  3개월이 되어‘비급比及’ 두 글자는 『신서』를 인용해 보충하였음 왕후가 청하는 음악이 예악에 벗어나는 것이면, 태사는 거문고 줄을 헝클어뜨리며『신서』에는 ‘악기를 어루만지며’라고 하였음, 배우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먹고자 하는 것이『신서』에는 ‘자者’ 자가 없음 올바른 맛이 아니면 태재는 두에 기대어 감히 요리를 못하고『신서』에서는 이상의 다섯 글자가 있고 또 ‘의倚’자를 ‘하荷’자로 표기하였음, “그 음식으로 감히 왕태자 전하를 대접할 수 없습니다『신서』에는 [대待가 아니라] 시侍로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신서』에는 ‘언言’ 자가 없음. 태자가 태어나 울면 태사는 동銅을 불며 “울음소리가 어떤 곡률에 맞습니다.”라고 하였고, 태재는 “요리는 어떠어떠한 것을 올립니다.”라 하였으며, 태복은 “운명은 어떠어떠합니다.”라 하였다.

  그런 뒤 왕태자를 위하여 활을 거는 의례가 행해졌다. 동쪽[에 걸어놓는] 활은 오동나무로 만들었는데, 오동은 동쪽[을 상징하는] 풀로 ‘봄 나무春木’이다. 그 희생은 닭으로, 닭은 동쪽[을 상징하는] 희생이다. 남쪽[에 걸어놓는] 활은 버드나무로 만들었는데, 버들은 남쪽[을 상징하는] 풀로 ‘여름 나무夏木’이다. 그 희생은 개로, 개는 남쪽[을 상징하는] 희생이다. 중앙[에 걸어 놓는] 활은 뽕나무로 만들었는데, 뽕은 중앙[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 희생은 소로, 소는 중앙[을 상징하는] 희생이다. 서쪽[에 걸어놓는] 활은 멧대추나무로 만들었는데, 멧대추는 서쪽[을 상징하는] 풀로 ‘가을 나무秋木’이다. 그 희생은 양으로, 양은 서쪽[을 상징 하는] 희생이다. 북쪽[에 걸어놓는] 활은 대추나무로 만들었는데, 대추는 북쪽[을 상징하는] 풀로 ‘겨울 나무冬木’이다. 그 희생은 돼지로, 돼지는 북쪽[을 상징하는] 희생이다.

  다섯 개의 활에 다섯 개의 화살을 나누어, 동쪽의 활은 동쪽으로 쏘고, 남쪽의 활은 남쪽으로 쏘며, 중앙의 활은 중앙으로 쏘고, 서쪽의 활은 서쪽으로 쏘며, 북쪽의 활은 북쪽으로 활을 쏘는데, 각각 세 번을 쏜다. 네 개의 활을 갖추어 그 나머지 각각 두 개씩의 화살[과 함께] 제국의 사방으로 통하는 성문의 왼쪽에 걸어둔다. 중앙의 활 역시 갖추어 나머지 두 개의 화살[과 함께] 사직문의 왼쪽에 걸어둔다.‘태복왈太卜曰’에서 여기까지 이상의 [내용은] 『신서』에 의거해 인용해 보충하였다.

  그런 뒤 점을 쳐 왕태자의 이름을 짓는데『대대례기』에는 ‘그런 뒤 점을 쳐 이름 짓는다’로 되어 있다.. 위로는 하늘에서 취하지 않고『신서』에는 [‘무無’가] ‘무毋’로 되어 있고 이하 그 설을 버린다, 아래로는 땅에서 취하지 않았으며『신서』에는 [‘추墜’가] ‘지地’로 되어 있다., 가운데로는 명산과 계곡에서 취하지 않았고, 향리의 풍속에서도 취하지 않았다『신서』에는 [‘불拂’이] ‘패悖’로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군자의 이름은 [그 유래를] 알기는 어려우나 피휘避諱는 쉬운데, 이것이 은덕을 기를 수 있는『신서』에는 [‘양養’이] ‘식息’으로 되어 있다. 도리이기 때문이다『신서』에 ‘야也’ 자가 있는 것을 인용했다. 『대대례기. 삼보부편大戴禮記・三保傅篇』, 쟈이賈誼 『신서·십태교잡사新書.十胎敎雜事』

  古者年八歲而出就外舍, 學小藝[12]焉, 履小節焉; 束髮而就大學, 學大藝焉, 履大節焉. 居則習禮文, 行則鳴珮玉, 升車則聞和鸞之聲, 是以非僻之心無自入也. 在衡為鸞, 在軾為和; 馬動而鸞鳴, 鸞鳴而和應; 聲曰和, 和則敬, 此御之節也. 上車以和鸞為節, 下車以珮玉為度, 上有雙衡, 下有雙璜, 衝牙玭珠以納其間, 琚瑀以雜之, 行以采茨, 趨以肆夏, 步環中規, 折還中矩, 進則揖之, 退則揚之, 然后玉鏘鳴也. 古之為路車也, 蓋圓以象天, 二十八橑[13]以象列星, 軫方[14]以象地, 三十輻以象月. 故仰則觀天文, 俯則察地理, 前視則睹鸞和之聲, 側聽則觀四時之運, 此巾車[15]教之道也.『大戴禮記 ·三保傅篇』

 옛날에는 [태자가] 여덟 살이 되면 [왕궁으로부터 나와] 바깥의 숙사에서 머물면서, 초급 단계의 기예小藝를 배우고 초급 단계의 예절小節을 이수했다. [열다섯이 되면] 머리를 묶고 태학에 가서 고급 단계의 기예大藝를 배우고 고급 단계의 예절大節을 이수했다. 집에 있을 때에는 예절과 의식을 익히고, 바깥에 나갈 때에는 몸에 달고 있는 패옥珮玉 소리가 울리고, 수레를 탈 때에는 ‘화란和鸞’[이라는 방울] 소리를 듣기에 사악한 마음이 들어 올 수 없었다. [수레 채 끝에 댄 횡목] ‘형衡’에 있는 것이 ‘란鸞’이고, [수레의 앞부분에 기댈 수 있게 만든 횡목인] ‘식軾’에 있는 것이 ‘화和’이다. 말이 움직이면 ‘란’이 울리고, ‘란’의 울림소리에 ‘화’가 상응한다. 그 소리를 ‘화和’라 이르며, ‘화’한 즉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이것이 바로 수레를 부리는 예절이다.

  수레에 오르면 ‘화란’이 예절이 되고, 수레에서 내리면 [허리에 찬] 패옥이 법도가 된다. 위로는 한 쌍의 ‘형衡’이 있고, 아래에는 한 쌍의 ‘황璜‘이 있으며, [패옥의 부속인] ‘충아衝牙’와 ‘빈주玭珠’로 그 사이를 거두고, ‘거우琚瑀’를 섞어 놓는다. 걸을 때는 [고대의 악장인] ‘채자采茨’에 맞추고, 달릴 때는 [역시 고대의 악장인] ‘사하肆夏’에 맞춘다. [돌아가는 걸음인] ‘보환步環’은 [원을 그리는 제구인] 규規에 맞추고, [행진하는 보법인] ‘절환折還’은 [네모를 그리는 제구인] 거矩에 맞춘다. 나아갈 때는 읍揖을 하고 물러갈 때는 고개를 쳐든다. 그런 연후에 패옥이 울리도록 한다.

  옛날 [군주가 타는] 수레는 둥근 덮개로 하늘을 상징하였고, 천정의 28개의 골격橑으로 늘어선 별들을 상징했으며, 수레의 네 귀퉁이軫方로 대지를 상징하였고, 30개의 마차 살로 한 달을 상징하였다. 때문에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천문天文을 보게 되고, 밑을 내려다보면 땅의 이치를 살피게 되며, 앞 쪽에는 조화로운 소리가 있고, 양옆으로는 사계절의 운행이 있었다. 이것이 ‘건거巾車’의 가르침의 도리이다.(『대대례기 · 삼보부편』)

  鷄者, 東方之牲也, 歲終更始, 辨秩東作, 萬物觸戶而出, 故以鷄祀祭也. 『風俗通義』八

  닭은 동쪽 방향[을 상징하는] 희생이다. 한 해가 끝나고 다시 새해가 시작되면, 순서의 선후가 동쪽으로부터 시작되며, 만물은 문을 통해 나온다. 그런 까닭에 닭으로 제사 지내는 것이다.(『풍속통의』8)


[1]『청사자(靑史子)』는 주周나라의 청사자가 지었으나 이미 없어졌다.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의 「연단자燕丹子」라는 제목 밑에, “양나라에 『청사자』 한 권이 있었다.……없어짐.梁有󰡔靑史子󰡕一卷,……亡”이라는 주가 달려 있다. 청사자는 청사가 복성複姓으로, 고대의 사관이다. 이하의 내용은 『중국소설사략』의 일부이다. “청사자는 옛날의 사관史官이지만,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책은 수隋 나라 때에 이미 없어졌다. 류즈지劉知幾는 『사통史通』에서, ‘『청사靑史』는 길거리에 떠도는 이야기街談를 엮은 것이다.『靑史』由綴於街談’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한지』에 근거해 말한 것으로 당唐대에 [이 책이]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문逸文은 단지 세 가지 일만이 남아 있는데, 모두가 예禮에 관한 것으로 당시에 어떻게 해서 소설에 편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신서新書』는 한漢 문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중국 전한 초기의 사상가 쟈이賈誼의 정치사상을 담은 저술이다. 한대 초기의 학술과 사상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한서예문지』에는 『가의』 58편이라고 저록되어 있어 작자의 이름이 서명으로 되어 있는데, 『수서․경적지』에서는 『가의신서』라고 하여 서명과 저자가 다 전해지게 되었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후대의 학자 들이 가의의 전기에서 내용을 뽑고 여타의 자료들을 보충하는 등의 방법으로 편찬한 것으로 원본과는 다르나 역시 가의의 저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진나라 패망의 원인이 인의仁義에 기초한 왕도정치를 버리고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법치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과진론過秦論’은 후대 유학국가이론의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정치ㆍ사회ㆍ문화가 유가적으로 자리 잡은 이유와 그 바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 주는 저작이다.

[3] 연실宴室은 청의 왕핑전王聘珍의 『대대례기해고大戴禮記解詁』에 의하면, 북주北周의 루볜盧辯의 주에, “연실宴室은 협실夾室이다. 연침宴寢(燕寢ͺ臥室)의 다음 칸이다. 또 측실側室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4] 본래 태사太史는 사관史官으로, 여기에서의 태사太史는 “태사太師”로 고쳐야 한다. 본래 태사太師는 고대 삼공三公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군주를 보필하는 관리였다. 『상서』「주관」에 “태사ͺ 태부ͺ 태보를 세웠다立太師太傅太保”고 하였다. 그러나 고대의 악관樂官이라는 설도 있으니, 『국어國語』「노어魯語」하下에서는, “옛날에 정고보가 은나라의 이름난 송을 주나라 태사와 견주었다昔正考父校商之名頌十二篇於周太師”고 하였다. 또 앞서의 루볜盧辯의 주에 의하면, “태사太師는 고자瞽者로 종백宗伯에 속한 하대부下大夫이다. 태재太宰는 선부膳夫로, 총재冢宰에 속한 상사이인上士二人이다”라고 하였다.

[5] 『대대례기해고大戴禮記解詁』에서 왕핑전王聘珍은 『주례周禮』「춘관春官」「태사大師」의, “태사는 육률과 육동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조화롭게 했다大師掌六律六同, 以合陰陽之聲”고 하는 대목을 인용하여, 육률과 육동은 모두 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6] 태재太宰는 관직 명으로 천관총재天官冢宰라고도 한다. 원래는 왕가의 재무와 궁내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리였다. 주 무왕 사후에 성왕이 아직 나이가 어려 숙부인 주공周公이 총재冢宰의 직함으로 섭정을 한 바 있다.

[7] 낮에는 밥을 짓는 데 쓰고, 밤에는 야경을 도는 데 쓰는 기구.

[8] 태복太卜은 주나라 때에는 대복大卜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관계官阶는 하대부로 궁내의 대소사에 대해 길흉을 점치고 그 결과를 보고했다.

[9] “활을 거는 것懸弧”은 고대의 습속으로, 사내아이가 태어난 집에서는 문의 왼쪽에 활을 걸어두었는데, 이에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을 “현호懸弧”라 하였다. 『가자신서賈子新書』에 인용된 『청사자靑史子』에서는 그 뒤에 상세하게 “현호懸弧”의 예를 설명하였다.

[10] “太卜曰, ‘命云某.’ 然後爲王太子懸弧之禮義” 이하의 내용은 『대대례기大戴禮記』에는 없고, 쟈이賈誼의 『가자신서賈子新書』 인용문에 있는 것을 말한다다.

[11] 『대대례기大戴禮記』는 서한 중기 다이더戴德가 엮어 만든 고대 의례에 관한 저작으로 원래 85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39편만 남아 있다. 예에 대한 저작은 그 이전에도 있었으나 너무 번잡해 다이더가 85편으로 정리했던 것인데, 이것 역시 내용이 많아 다이성戴聖이 49편으로 된 『소대례기小禮記』를 편찬하였으니 이것이 곧 『예기禮記』이다.

[12] 소예小藝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數수 등의 육예六藝를 가리킨다.

[13] 료橑는 수레의 활모양을 한 앞 천정이다.

[14] 엄밀하게 말하자면 수레 밑 삼면의 나무와 뒤의 횡목이 합쳐져 이루어진 정방형.

[15] 천으로 막을 쳐서 꾸민 수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