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스커우菜市口  

쉬친원許欽文(1897∼1984)
쉬친원은 원래 이름이 쉬성야오许绳尧로 저쟝 성浙江省 산인山阴 사람이다. 1917년 항저우 성립 제5사범학교杭州省立第五师范学校를 졸업하고 모교의 부속 소학교에 부임했다. 1922년 첫 번째 작품으로 단편소설 『훈晕』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신보晨报』 부간副刊에 소설과 잡문을 기고하면서 루쉰鲁迅의 지도를 받았다. 1926년 루쉰鲁迅의 도움으로 단편소설집 『고향』을 출판했다. 주로 고향인 저쟝의 인정세태를 묘사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루쉰으로부터 ‘향토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1927년에 베이징을 떠나 항저우杭州로 갔으며, 중일전쟁 이후에는 푸졘福建 등지를 떠돌다 전쟁이 끝난 뒤 항저우로 돌아왔다. 항저우고급중학杭州高级中学, 청두미술학교成都美术学校, 푸졘사범福建师范, 푸저우셰허대학福州协和大学, 항저우제1중학杭州第一中学, 저쟝사범학원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창작에 힘썼다.

고도에서, 나의 지식과 관련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탄沙灘의 건물로, 넷째 누이와의 인연 때문에 스푸마다졔石駙馬大街의 홍루紅樓의 인상 역시 작지 않다. 하지만 생활과 연관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쉬안우먼宣武門 밖의 차이스커우이다.

현재는 ‘베이징신문화운동기념관’으로 바뀐 옛 베이징대학 ‘홍루’

내가 열여덟 살에 처음 ‘베이징’에 왔을 때 난반졔후통南半截胡同의 사오싱회관紹興會館에 묵었다. 처음 도착해서는 말도 통하지 않고, 마부가 고의로 장난을 칠까봐 두려웠는데, 차이스커우에 도착해서 ‘베이반졔후통北半截胡同’이라고 쓴 팻말을 보고는 마음이 몹시 조급해져 원망도 되고 두렵기도 했다. 원래 난반졔후통이 베이반졔후통 안에 있다는 걸 몰라 한바탕 난리를 죽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황망 중에 이곳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사오싱회관

유명한 [루쉰의 소설집] 『외침吶喊』이 사오싱회관에서 태어났다. 생각해 보면 작자 역시 당시 차이스커우를 늘상 지나다녔을 것이다. 나의 [소설집] 『고향』과 『자오趙 선생의 번뇌』, 『코찔찔이 아얼阿二』, 『털버선』의 대부분과 『귀가』의 후반부 역시 이곳에서 썼기에, 지금 되돌아보니 어떤 감정이 일어난다. 『고향』의 원고는 대부분이 모두 『신보晨報』 부간에 발표된 것으로 당시의 신보관晨報館 역시 차이스커우 인근의 청샹후통丞相胡同에 있었다.

고도라고는 하지만, 노면이 제대로 포장이 안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향로와 같고, 비가 내린 뒤에는 먹물 통墨盒 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향로라는 것은 바람이 불어 일어난 먼지를 말한다. 하지만 차이스커우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뤄마스다졔騾馬市大街로 가거나 주스커우珠市口에서 쳰먼前門까지, 북으로 쉬안우먼宣武門을 들어가 시단西單 패루로 가는 길 등등은 진즉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아울러 일단 밤이 되면 바람은 잦아든다. 나는 몇 차례 쑨푸위안孫伏園과 함께 달빛 아래서 공용고公用庫로부터 내처 숙소로 천천히 걸어 돌아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며 운치가 있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 차이스커우에 도착하면 ‘내일 봐요’라고 말하고는 그는 청샹후통으로 돌아가고 나는 사오싱회관에 가서 원고를 썼다.

한밤중이 되면 난반졔후통에서는 과일이나 빙탕氷糖, 잉몐보보硬麵餑餑 파는 소리를 불시에 들을 수 있었다. 20푼짜리 동전 두세 개로 간식을 즐기는 것도 아주 재미있었다.

차이스커우에서 원화졔文化街로 가는 길의 류리창琉璃廠은 아주 가깝고, 셴눙탄先農壇과 톈탄天壇도 멀지 않다. 타오위안칭의 걸작 『대홍포大紅袍』는 저녁 무렵 톈챠오天橋를 거닐다 그날 밤 사오싱회관에서 단숨에 완성한 것이다.

고향의 목욕탕 안은 항상 후끈하게 불을 땠는데, 차이스커우 부근의 목욕탕은 가격도 싸고 깨끗했다. 거기서 먼저 이발을 하고 샤워한 뒤에 누워 있으면, 혼곤한 가운데 아주 쉽게 ‘의경意境을 잡아낼’ 수 있어 내 초기의 소설은 대개 이런 식으로 틀을 잡았다.

광안시장廣安市場은 ‘차이스菜市’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팔리는 채소는 아주 많고 종류도 세분되어 있다. 돼지족발, 돼지 혀 전문 매대가 있는가 하면, 닭발이나 오리발바닥 역시 따로 팔고 있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낙네’들이 봉두난발을 하고 바구니를 든 채 연이어 그 사이를 오가는 모습에는 ‘삶의 정취’가 풍부하게 있다.

차이스커우가 가장 시끌벅적할 때는 추석 며칠 전부터이다. 일렬로 꿰어진 포도, 붉은 색 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투얼예兎兒爺이다. 쫑긋 솟은 두 귀에 삐쭉 내민 입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데, 보자마자 ‘웃어서는 안 되는’ 느낌을 받는다. 과일과 투얼예를 파는 노점은 청샹후통에서 베이반졔후통에 이르기까지 빈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져 있다.

투얼예

세밑이 되면 양을 잡는 것도 볼 만 하다. 도살 작업은 밤새워 이루어지는 듯한데, 아침이 되면 상점 안에 일렬로 길게 빽빽하게 내걸려 있고, 땅 위에는 붉은 얼음이 응결되어 있다.

차이스커우의 점포는 당연하게도 고향과 똑같은 상가로, 들어가면 동전 한두 닢 짜리 찻잎을 사더라도 항상 친절하게 맞아주며 갈 때는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한다. 그들은 손님을 공손하게 대할 뿐 아니라 견습생을 대하는 것도 남방의 상인들보다 훨씬 더 온화하다.

허지和濟에 가서 책의 표지를 인쇄하고 교정지를 맞춰보느라 일찍이 나 역시 늘상 차이스커우에서 서쪽으로 가서 광안먼에서 오갔다. 타오위안칭도 거기서 노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비교적 조용하지만, 고향의 정취가 넘치고 아주 소박했다.

‘광안먼’은 타오위안칭의 화제畫題이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를 보면 물 흐르듯 경쾌한 필치가 뛰어난데 여기서 소재를 취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두 번이나 곤경에 처해 깊은 비관에 빠져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하릴없이 북으로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쳰먼前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 부지불각 중에 흥분이 되어 인생의 길이란 게 본래 아주 넓은 것이라 여겨져, 이전의 고집은 그저 가소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고도의 도로가 넓고 곧게 뻗어 있으며, 건축물은 웅장하고 공기 또한 맑아 멀리 있는 경물도 한 눈에 들어와 위대한 기백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차로의 차이스커우에 서 있어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

(1936년 12월 우주풍사宇宙風社 출판『북평일고北平一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