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18구이양 석판방

구이양 석판방 – 돌집, 돌의 마을, 돌의 나라

전통건축을 석조와 목조로 대별해보면 서양은 석조, 동양은 목조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적인 역사 건축물들을 둘러보면 서양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석조건축이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수십 채가 모여 하나의 종합 건축물이 되는 목조건축이 대종을 이룬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콜로세움 같은 원형 경기장, 소피아 성당 그리고 자금성과 경복궁이나 불교 사찰을 떠올리면 확연한 대조가 이루어진다. 서양은 많은 인력과 긴 시간을 투여해 석조 단체單體건축으로 신전과 같은 ‘신의 건축물’을 지었다. 동아시아는 짧은 기간에 완공할 수 있도록 여러 채가 합쳐서 하나가 되는 목조 집체集體건축으로 신이 아닌 ‘사람의 건축물’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재미있는 대조법이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목조건축이었고 석재보다는 불에 구워 만든 벽돌을 많이 사용했지만, 석재 역시 중요한 건축 재료였다. 기둥이나 벽체를 받쳐주는 기반은 거의 대부분 돌을 많이 사용했고, 돌기둥과 돌담, 돌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서는 집과 길, 마을 전체가 돌로만 만든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돌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앞에서 구이저우 먀오족의 간란주택과 한족의 둔보를 둘러보았지만, 구이저우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살림집으로 석판방石板房을 빼놓을 수 없다. 구이저우성의 수도 구이양贵阳과 그 인근에서는 돌의 집, 돌의 마을, 돌의 나라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에는 퇴적암이 많다. 강물이 상류에서 실어온 고운 흙이 하류에 층층이 쌓였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굳어진 다음 지반이 융기해 지표에 노출된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퇴적암은 결대로 잘 쪼개지고 사람들은 손쉽게 석판을 얻는다. 석판은 슬레이트slate라고도 하는데, 석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이 바로 석판방이다. 주어진 땅의 조건과 재료를 적절히 활용하는 인지제의因地制宜, 인지취재因地取材가 잘 드러나는 건축이다. 어느 건축에서든 석재가 사용되고 석판방 역시 석판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석판으로 지붕까지 이은 특색을 부각해 석판방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너와집에서 석판방과 같은 형태의 집을 볼 수 있다. 너와집 가운데 석판을 쓰는 집을 청석너와라고 하는데, 이것이 중국의 석판방과 상당히 유사하다.

석판방은 구이양과 그 근처의 안순安顺 그리고 구이저우 서남부 부이족 거주지역에 많은데, 이 지역의 지명에 석石이나 암岩자가 많다. 아시아 최대의 폭포인 안순의 황궈수이黃果水 폭포 인근이 대부분 부이족 마을(위 사진)인데, 민가 살림집은 거의 석판방이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어디에서 보든 잉어의 비늘처럼 촘촘하게 겹쳐진 석판 지붕이 외지인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오르내리는 마을의 길은 전부 돌계단이고, 배수구 역시 돌이다.

집 한 채를 뜯어봐도 대문, 창문, 방문 등의 문짝과 지붕을 받쳐주는 가구 정도만 나무일 뿐 기둥과 벽체는 물론 문틀에서 계단과 노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돌이다. 이곳의 돌은 붉은빛이 돌아 더 독특하다. 우리나라에도 청석 너와가 있지만, 돌집의 수량과 마을의 크기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말 독특하고 놀라운 풍광이다.

구이양에서는 돌의 마을 세 곳을 연이어 찾아갈 수 있다. 구이양시 남부 지역인 화시구花溪区가 바로 그곳인데, 이 코스는 한국 여행객에게도 적극 권할만하다. 첫째는 화시구 중심에서 멀지 않은 부이족 마을 전산촌石板镇 镇山村이고, 둘째는 중국에서도 아름다운 돌담길로 유명한 칭옌고진青岩古镇, 셋째 칭옌고진에서 멀지 않은 산골 마을 가오포高坡다.

전산촌(위 사진)은 화시구 서북쪽에 있는 커다란 저수지 건너편,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조그만 반도에 있는 마을이다. 차를 타면 11km, 배를 타면 4km 정도 거리다. 부이족과 먀오족이 함께 사는 마을로서 성문과 성벽은 물론 길도 돌이다. 벽과 담도 돌이고, 지붕도 석판으로 이은 석판방이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석판으로 이은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거대한 파충류의 피부같이 보이기도 한다.

전산촌은 명나라 후기에 장시에서 구이저우로 파견된 이인우李仁宇라는 장군이 현지인 부이족 여자와 결혼하여 생겨난 마을이니 4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인우는 당초 식솔을 이끌고 부임했으나 부인이 병사하자 현지인 반班씨와 재혼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이씨로, 작은아들은 반씨로 했다. 한족이 아니라 부이족이 되어 살았던 것이다. 지금도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이씨와 반씨이고, 전산촌 우측 언덕 위에는 시조인 이인우의 묘가 있다.

칭옌고진(아래 사진)은 화시구 중심에서 8km 남쪽이다. 명대 말기에 이 지역 토착 세력가인 토사土司가 세웠던 토성을 청나라 초기에 석두성石頭城으로 개조했다. 18세기에 한 번의 중수를 거쳐 군사용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온 고성이다.

이곳의 집들은 지붕에 석판이 아닌 기와를 사용했지만 성문에서 성벽, 크고 작은 길과 담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돌처럼 보이는 돌의 성이다. 황자포黃家坡라고 하는 작은 야산 위에 자리 잡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위치라 군사용으로는 적격이었다. 구이양 인근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여행지다. 고성의 길들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좌우로 교차하거나 뱀처럼 휘어지기도 한다. 길마다 집마다 서려 있는 순박하면서도 진하게 느껴지는 고풍이 여행객들을 끌어당긴다. 돌로 가득 채워진 골목길은 정취도 있고 품격도 느껴지는데, 중국의 외지인뿐 아니라 외국인 배낭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작은 고성이지만 이것저것 찾아볼 만한 유적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이저우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원급제를 했던 사람의 고택이다. 장원급제 이후 과거에 응시하는 이들이 과거급제를 기원하며 찾아왔다고 한다. 요즘에도 대학입시 시즌이 되면 구이양 인근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몰려들기도 한단다.

특이한 것은 작은 고성 안에 도교의 도관과 불교의 절이 몇 개씩 있고, 기독교의 회당과 천주교의 성당도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중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은 ‘중국에도 종교가 있다’는 의외의 발견에 놀라기도 한다.

고성을 가로질러 북문에 올라보면 성밖으로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펼쳐지고, 밤이 되면 고즈넉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여행객이 찾아드는 고성은 밤이 되면 전통은 어둠 속에 물러앉고, 인공조명 아래 상업적인 흥취로 시끌시끌하지만 이곳은 그런 게 전혀 없다. 그저 몇 개의 가로등이 반들반들하게 닳아버린 노면에 반사되면서 외지인들의 한가로운 산보를 도와줄 뿐이다.

칭옌고진에서 여행객의 재미있는 놀이의 하나는 두부나 떡, 설탕, 쌀 등으로 만든 갖가지 주전부리로 간식을 하고, 고춧가루가 듬뿍 뿌려진 각종 밑반찬을 구경하면서 서너 가지 맛을 보는 것이다. 구이양 일대에서 칭옌고진은 샤오츠小吃와 저장음식이 상당히 유명해서 칭옌샤오츠라는 팻말을 걸어놓은 상점이 많다.

칭예고진은 고성 안에 숙박시설이 없는 것이 외국인 여행자에게는 좀 아쉽다. 1인당 20위안 정도 하는 북문 밖의 허름한 객잔과 인근 버스종점 근처에 몇몇 빈관이 있지만 저렴한 가격만큼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불편을 피하려면 화시구 중심지에 숙박을 해야 한다.

구이양시 화시구에서 찾아갈 만한 세 번째 돌의 마을은 가오포高坡다. 칭옌고진에서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약 30∼40분간 산길을 가파르게 올라가면 도착하는 산 위의 시골 마을. 칭옌고진보다 해발 300∼400m 높기 때문에 기온도 그만큼 낮아진다.

이곳은 전산촌과 마찬가지로 먀오족과 부이족이 함께 사는 마을이다. 장날이라도 되면 형형색색의 장식을 갖춘 소수민족의 독특한 머리 장식과 복식이 넘쳐난다. 그러나 필자가 독자 여러분을 모시고 가려는 곳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집이다. 어느 야산 중턱에 있는데, 기괴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한 곳…….

장례는 땅에 묻는 일반적인 토장土葬 이외에 탈골하는 방법이나 시신 처리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난다. 티베트 일부 지역에서는 새에게 탈골하도록 하는 조장鳥葬, 만주 북부 삼림지대에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산짐승들이 탈골하게 하는 기이한 장례도 있다. 먀오족의 경우는 탈골하지 않고 현관장懸棺葬이나 동장洞葬을 했다. 현관장은 높은 절벽에 받침대를 수평으로 꽂고 관을 그 위에 올려놓는 것이고, 동장은 동굴 안에 관을 쌓아두는 것이다. 동굴의 경우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절벽 중간의 동굴을 사용하기도 하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야산의 동굴을 사용하기도 한다. 두 가지 모두 시신을 관에 넣지만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그대로 노출시켜 두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먀오족의 풍습인데, 바로 가오포에서 볼 수 있다.

먀오족의 기이한 풍습은 그들의 민족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다. 앞에서도 먀오족의 이주와 수난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현관장과 동장에는 황하와 창강을 건너온 이주의 경로를 기억하면서 언젠가는 다시 그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희원이 새겨진 것이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의 시신도 함께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는 뜻에서 관을 매장하지 않고 동굴이나 절벽에 쌓아두었다는 것이다.

먀오족의 장례 절차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의 복장에 선조들이 살던 성城을 새겨 넣은 것 역시 같은 발상이다. 동장을 볼 수 있는 가오포의 자딩甲定 마을은 먀오족 고유어로 ‘큰 강 황하’라는 뜻이라고 하니 선조가 이주해온 경로와 고향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애처롭게만 느껴진다.

가오포에서 동장과 현관장을 보려면 일반 교통편으로는 갈 수 없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야 한다. 중국의 시골이나 중소도시에서 흔히 오토바이들이 길가에 몰려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태워다 주는 사설 교통편이다. 이들이 태워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된다. 동장은 야트막한 야산 중턱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다. 현관장은 아래에서는 안 보이기 때문에 절벽 건너편 산으로 가야만 한다.

사실 칭옌고진의 성벽과 가오포의 동장, 현관장은 구이저우의 슬픈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앞에서 명나라가 구이저우를 거쳐 윈난을 정벌하던 정책을 ‘조북정남’이란 말로 요약했는데, 이런 정책이 청나라로 들어와서는 ‘개토귀류’라는 훨씬 혹독한 정책으로 바뀌었다. 원나라 시대에는 변방의 토착 세력에게 일정한 행정적·군사적 권한을 주어 자치권을 인정하여 토사土司라고 했다. 명나라 초기에는 구이저우에 한족을 대량으로 밀어 넣어 주요한 거점과 대로 주변은 황제의 군대와 한족 백성으로 채워졌지만, 그 주변에서는 여전히 토사제도를 활용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토사제도를 아예 없애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流官로 교체했다. 토착민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자 먀오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황제의 토벌군과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엄청난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칭옌고진은 황제의 군대가 군사기지로 사용하던 곳이고, 가오포는 그 군대가 반복해서 토벌했던 소수민족이 살던 마을이다. 가오포의 먀오족들은 황제의 군대에 맞서다가 패퇴하고, 다시 일어났다가 주살당하는 수난의 역사를 감내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고향을 찾아 돌아간다는, 실현이 불가능한 민족의 염원을 현관장이나 동장에 눈물로 얹어둔 것이 아닐까. 살아남은 자들의 집은 황제의 힘에 짓눌려 있었으니, 죽은 자의 집에나마 그 염원을 걸어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