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경계했는데, 물론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생각되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내가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러우스柔石, 후예핀胡也頻 등 젊은 좌익 작가들이 체포되어 살해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루쉰의 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변에도 위험이 닥쳤다고 해서, 우치야마 간조 씨의 도움으로 그는 어떤 일본인이 경영하는 하숙에 피신했다가 다소 느슨해졌다는 것을 알고 다시 원래 거주지로 돌아갔을 때였다. 우연히도 나는 그가 일 개월 가량 피신했던 하숙집에 살게 되었고, 또 그가 부인과 아들 하이잉, 그리고 보모를 데리고 살았던 바로 그 방에서 기거하게 된 것도 기연奇緣이었다.
언젠가 상하이의 일본어 신문 기자 모군이 루쉰을 만나고 싶으니 소개해달라고 해서, 그에게 전하자 자신의 집에서는 곤란하니 우치야마서점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 신문기자는 루쉰이 그의 집에 들이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는데, 루쉰은 신문사의 사람은 정치에 관계가 있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떻든지 간에 외부에 누설되지 않을 수 없기에 자신의 집에서는 만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언젠가 일본의 모 이학자理學者가 그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전하니 이학자라면 정치와 관계가 없을 터이니 자신의 집에서 만나도 좋다고 말했다. 또 그림 전람회를 보고 돌아올 때였는지, 아니면 비어홀에 들렀다가 돌아올 때였는지, 그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이상한 놈이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자네는 먼저 돌아가 주게, 나는 내 집 근처에서 그 놈을 따돌릴 테니 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그와 걸으며 그런 말을 두세 번 정도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아들은 정치와 무관한 일을 시키고 싶어 수학이든 뭐든 좋고, 정치와 관계있는 일은 언제나 축축한 셔츠를 입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나쁘다 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정치적인 압박으로 상당히 시달리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거꾸로 점점 더 권력에 반발해가는 기백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문학을 연마하고 다듬어 나가는 방법도 되어 만년에는 아닌 게 아니라 필봉이 심오하고 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