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09 저장성 둥양시 노택

저장성 둥양시 노택 – 자금성에 견주려는가, 강남의 구진 저택

1992년 8월 북방외교의 큰 걸음으로 한중수교가 이루어질 때 중국의 어느 민간인들은 한국의 대통령이 자기들과 같은 노盧씨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00년 6월 대한민국과 중국을 비롯한 9개국의 노씨 종친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 산둥성 지난시济南市에서 세계노씨종친회가 창립되었다. 이때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민간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한중수교를 계기로 생겼던 관심이 양국의 노씨 종친회 관계자들을 오가게 했던 것이다.

2003년 중국 저장성 둥양시东阳市 노택盧宅 문물관리위원회 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해 또 다른 종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지금도 노택 안에 자랑스레 걸려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아래 좌측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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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나라의 노씨중앙종친회에서는 노씨의 조상을 찾아가는 종친회 여행을 매년 두어 차례씩 주관한다. 베이징 서남쪽 외곽 줘저우涿州로 가서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盧植의 사당을 돌아보거나, 산둥성의 노씨 발원지를 찾아보거나, 중국에서 유일한 구진九進 민간주택인 노택을 찾는다.

이번에는 바로 이 노택을 찾아 그 안에 담긴 건축과 문화와 민간교류를 음미하려고 한다.

노택은 말 그대로 노씨의 대저택이다. 노택의 족보에 의하면 노씨는 강태공의 후예인데, 훗날 제환공을 도와 공을 세워 지금의 산둥성 지난시 창칭구 서쪽의 땅을 봉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땅은 흙이 검어서 검다는 뜻의 노盧라 불렸던바, 땅 이름을 성씨로 차용하여 노씨가 시작된 것이다. 진대에는 노씨 일부가 범양의 탁현涿縣(베이징 서남부 줘저우)에 정착해 살았다. 탁현의 노씨 중에는 삼국시대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이 유명하다. 지금도 줘저우에 가면 유비의 도원결의 기념공원과 함께 노식의 사당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범양 노씨의 후예 가운데 한 사람이 북송 시절 강남으로 부임하면서 저장성에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15세기 중반에 노택이 처음 지어졌으니 550여 년이나 된 민간 살림집이다. 종심이 320m나 되고 민간주택으로는 보기 어려운 구진, 즉 문 열고 들어가기를 아홉 번을 해야 제일 안쪽에 도달하는 대저택이다. 주변의 부수적인 건축물까지 포함하면 총 2만 5000㎡나 되고, 방도 125칸이나 된다. 전형적인 봉건시대 강남의 명문망족名門望族의 대가족 살림집이다.

중축선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35도 기울어져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를 보고 자리 잡은 것이다. 첫 대문의 안쪽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앞산의 세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이는데, 그것에 맞춘 것이다.

중축선을 따라 구진의 건축물들이 남북으로 배열된 것 이외에 중축선의 동서 양쪽의 부축선을 따라 또 다른 건축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 밖에 원림과 패방 등이 많다. 작은 하천이 전체 건축군의 서북동 삼면을 감아 흐른다.

실내장식(아래 좌측 사진, 우측은 둥양시 박물관 소장품)도 화려하다. 보와 도리는 물론 두공 작체雀替, 문과 창문에 이르기까지 살아나올 것같이 섬세한 목조木彫는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노택은 행정구역상 진화시에 속한 둥양시에 있는데, 둥양시는 목공예로 중국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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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80만 명의 둥양시에 도착하면 어디를 둘러보든지 목조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이 즐비하다. 지금도 베이징의 자금성을 수리할 때 둥양의 목장木匠을 초치해 간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둥양 목공예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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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택을 두고 베이징에는 자금성이 있고, 강남에는 노택이 있다北有故宫, 南有盧宅는, 꽤 오만한 말도 있다. ‘현존하는 고건축’에서 자금성은 황궁의 최고이고, 민간주택에서는 노택이 제일 크다는 이야기다. 1994년 진화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홍보용 슬로건이지만, 구진이라는 구조가 자금성과 공묘 이외에는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긍심을 이해할 만하다. 자금성에서는 황제가 대를 이어 살았지만, 노택에서는 황제가 주관하는 최종 과거에 일등으로 합격한 진사進士를 50년에 한 명꼴로 여덟 명이나 대를 이어 배출했다. 인재라는 면에서도 감히 자금성에 견주어보는 그들의 수사적 과장을 수긍할 수도 있다.

노택은 처음부터 구진으로 지은 것은 아니다. 명대였던 1456∼62년에 현재의 일진에서 사진까지를 신축했고, 60여 년 후에 오진을 증축했으며, 신축200여 년 후인 청대 강희제 시절에 육진에서 구진까지 증축했다고 한다.

구진을 기능적인 면에서 나눠보면 전형적인 전당후침前堂後寢이다. 전당, 즉 구진 가운데 일진에서 사진까지의 전반부는 방문객의 접대, 제사, 집회, 경조사, 교육 등 문중의 대내외 의례를 행하는 구역이다. 오진은 전당과 후침을 구분하고 있고, 후침은 육진부터 구진까지로 침실과 주방을 포함한 일상의 주거공간이다. 이것은 자금성도 비슷하다. 남쪽은 조朝라 하여 황제가 의례를 행하고 업무를 보는 공간이고, 북쪽은 정廷이라 하여 황제와 그의 가족들이 사는 공간이다. 전당과 후침을 구분하는 중간에 석고문이 있는데, 이 문은 평상시에는 닫혀 있어 외부인은 후침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1949년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되면서 이 저택은 한 가문의 사유물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동주택이 되었다. 방 한두 개씩으로 구분해서 수많은 가구가 복작대며 살았으니 주택 문제 해결에는 조금 기여했겠으나, 훨씬 큰 문화유적의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화재가 발생해 팔진이 전소되어 그 자리는 지금까지도 빈터만 남아 있다. 훗날 진화시가 노택을 유적지로 복구하기로 결정한 다음 노택에서 150여 가구가 이사를 나갔다고 하니 다가구 주택으로 살던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이제 노택의 중축선을 따로 구진까지 들어가면서 대저택을 감상해보자. 길에서 첫 대문으로 들어서려면 먼저 풍기세가風紀世家, 대방백大方伯, 정표정절旌表貞節이라고 하는 세 개의 패방(아래 좌측 사진)을 통과해야 한다. 노씨 가문을 칭송하고 유교적 도덕을 고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반듯하게 잘 정돈된 통로를 30m 정도 걸어가야 대문 앞의 널찍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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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문(위 우측 사진)이 바로 일진이다. 이 문에는 손님이 온 것을 얼른 알리라는 뜻에서 첩보捷報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손님이 왔을 때 하인이 안에 소식을 알리면서 문을 열어 안내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첫 번째 문이란 뜻으로 두문頭門이라고도 하는데, 문의 양편으로는 하인들이 사는 방이 붙어 있다.

일진을 통과해 마당을 건너면 이진이다. 두 번째 문은 국광國光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나 통상 의문儀門(아래 좌측 사진)이라고 부른다. 의례를 갖추는 문이란 뜻인데,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돌아가는 손님을 환송하는 지점이다.

의문의 가운데 큰 문은 3품 이상의 고관이 방문할 때에만 열고, 문지방(아래 우측 사진)까지 빼냄으로써 극진한 환영의 뜻을 표시하기도 한다. 손님이 왔다는 기별을 받은 주인은 의문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삼진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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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은 숙옹당肅雍堂이다. 노택을 숙옹당으로 부를 만큼 노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귀빈의 접대는 물론 문중의 제사나 경조사, 교육이나 회합이 열리는 곳이다. 숙옹당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숙옹당기》에 숙옹의 뜻이 풀이되어 있다. 肅은 敬으로 예를 세우는 곳이고, 雍은 和로 즐거움이 생기는 곳이라는 뜻에서 지은 당호堂號라고 한다.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들의 기풍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숙옹당의 내부 천장은 팔작지붕 형태이고, 외부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좌우 다섯 칸에 도리檩가 열두 개에 이르는 넓고 큰 공간을 품고 있다. 이렇게 큰 공간은 조정에서 반포한 건축 관련 규정에 위배되는 것인데 어떻게 민간주택에 이런 큰 전당을 짓고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숙옹당 앞의 정원은 460여 ㎡로 널찍하다. 현존하는 중국의 고건축 민가 가운데 가장 큰 마당이라고 한다. 중축선을 따라 중간에는 돌을 깔아 길을 냈고, 나머지 좌우로는 아란석으로 ‘米’자 형태가 반복되는 문양을 연출했다.

콘크리트가 없던 옛날에는 찹쌀을 으깨어 회에 섞어서 바닥을 쳤는데, 지금도 아주 견고하다.

지면에 개방된 배수로는 명구明溝라고 하고, 배수관처럼 묻혀진 배수로는 암구暗溝, 빗물이 빨리 빠지도록 지붕에 설치된 배수구는 천구天溝라고 한다. 노택에는 정원의 둘레에 명구를 설치해 배수가 잘되도록 했다. 이런 배수로가 잘 갖춰져 있고, 전체 건축군의 둘레를 흐르는 하천이 큰 배수구의 역할을 하고, 구진九進 후면의 연못이 배수장이 되기 때문에 큰비에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해 전에 구진 뒤의 연못을 메워 건물을 지은 뒤 큰 비가 내렸을 때 배수가 빠르지 않아 침수피해가 발생했었다. 되짚어보면 수백년 전에 집터 주위에 하천을 흐르게 하고 연못을 설치한 것은 꽤 현명한 재해 예방법이었던 것이다. 애석하지만 이곳에서도 당장의 부동산 가치가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삼켜버리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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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 숙옹당과 사진 동수당은 천당穿堂이라고 하는 회랑이 이어준다. 동수당 중앙에는 선조들의 초상이 걸려 있는데, 정초에 문중 사람들이 모여 배례를 하는 곳이다. 오진은 전당후침을 구분하는 석고문과 담장이다.

육진부터 구진은 2층으로 된 침실들이다. 칠진은 후침에서 중심이 되는 주체건축이다. 팔진은 1970년대 화재로 붕괴되고 지금은 양 측면의 담벼락과 빈터(위 사진)만 남아 있다. 후침은 13칸의 방으로 구성된 삼합원을 기본 단위로 해서 네 개의 삼합원을 직렬로 연결한 구조다. 각 삼합원은 좌우로 다섯 칸씩 열 칸이고, 정면에 세 칸이 있어서 3대가 함께 살 수 있는 침실과 주방등이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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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진에는 주인장 내외의 침실이 있는데, 두문에서 구진까지 거리도 멀고 문도 많아 출입이 몹시 불편하지 않을까 의아해할 수도 있다. 실제 중축선과는 직각이 되는 동서 방향으로 좌우 각각 여섯 개의 문 또는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문을 이문移門 또는 변문邊門(위 우측 사진)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임의로 출입이 이뤄지는 문이고,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해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문이다. 구진에는 좌우뿐 아니라 후면의 화원과 연못으로 갈 수 있는 쪽문이 설치되어 있다. 의례와 일상을 구분하여 건축으로도 반영해놓은 것이다. 화장실은 내부에 없고, 침실 안에 용변을 받아내는 대변통(위 좌측 상단 사진)과 요강(위 좌측 하단 사진)이 있을 뿐이다.

노택에 중축선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축선과 평행한 부축선을 따라 동쪽에 사진, 삼진, 이진 세 갈래의 건축물들이 있고, 서쪽으로도 일련의 건축물들이 도열해 있다.

중국에 가면 자금성이나 커다란 사원의 건축군에 익숙해진 탓에 대수롭지 않은 듯 느껴질 수도 있지만 민간의 살림집으로는 아주 특별한 집이다. 필자는 노택을 둘러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우선 한국의 노씨중앙종친회와 민간교류도 활발하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족보가 만들어진 것이 대개 조선 중기부터이니 그보다 1000년 전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가문의 구전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로서 얼마나 명확하게 고증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성同姓 혹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란 호의를 갖고 좋은 이웃으로 문화적 교류를 한다는 것은 훌륭한 민간외교임에 틀림없다. 정치는 다툼이 본질이고 경제는 경쟁이 불가피하지만, 문화적 교류는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이웃 간의 접착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웃의 어느 나라와도 풍부한 문화적 교류를 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민간주택으로 이런 대저택에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전통시대에도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아도 구진 대저택을 이루고 거기에 기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고, 경쟁과 견제 심리가 시한폭탄처럼 팽팽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집을 꿈꾸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눈을 들어 높이 보고 발을 뻗어 멀리 디뎌보면 세계 어딘가에 그런 꿈을 현실로 꾸며볼 수 있는 넉넉한 땅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발걸음이 닿으면 대한민국이고, 숨결이 쌓이면 그곳도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버거운 운명이자 빛나는 기회가 아닐까? 중국의 큰 집을 보면서 세계의 대한민국을 그려보는 게 상상의 비약이라 해도, 그런 비약을 시도해보는 것은 중국을 인문학적으로 조금 더 이해해보려는 중국 민가기행의 속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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