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36-변방의 혁명가 4 타이항산 조선의용군 진광화와 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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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성 북부인 린현(지금의 린저우시)의 타이항산 대협곡. 팔로군 지역으로 가려고 했던 조선의용대는 후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린현에서 국민당 군대와 합작을 하고 있었다

내가 타이항산을 처음 찾아간 것은 윤세주였다. 그는 김원봉의 고향마을 죽마고우였고 독립운동의 평생 동지였다. 의열단 창단에서 시작해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까지. 김원봉의 본대는 충칭에 있었고, 타이항산에서 조선의용대 교관으로 복무하던 윤세주는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맞선 전투에서 전사했다.

윤세주를 묘를 찾았을 때 그 옆에 또 하나의 별을 빛나고 있었다. 진광화라고 하는, 당시 내겐 낯선 이름의 혁명가였다. 같은 전투에서 같은 임무를 나눠 맡았다가 같은 골짜기의 아래 위에서 각각 전사했다. 진광화는 지금도 윤세주와 함께 같은 묘원에 묻혀 있다. 신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후 첫 번째로 개장한 국립묘지인, 허베이성 한단시 진기로예(晉冀魯豫) 열사릉원이다. 이 열사릉원으로 이장되기 전에는 한단시 서현 스먼촌(石門村)의 타이항산 구릉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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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화(왼쪽)와 윤세주(오른쪽)

윤세주는 1900년(족보 기준) 밀양 출생이고 진광화는 11년 뒤 평양에서 태어났다. 윤세주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고, 진광화는 11년 뒤 1993년에 애국장에 추서됐다.

열아홉을 갓 넘긴 청년 윤세주는 경성에서 3.1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고향인 밀양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조직했다. 그는 수배되었고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11월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창단했다. 윤세주는 창단 후 곧바로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고 기회를 노렸으나 사전에 발각돼 체포됐다. 6년 8개월 동안 고통스런 감옥살이를 감내했다. 출옥 후 5년 정도 밀양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다. 윤세주의 두 번째 망명길은 김원봉과의 재결합이었다.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 활동했으니 윤세주는 국민당과의 제휴선에 올라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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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와 진광화가 묻힌 진기로예 열사릉원

3.1운동이 십년 지난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열아홉의 청년 진광화는 평양 숭덕중학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반일시위에 벌였다. 곧바로 검거대상으로 지목됐고 1930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다. 윤세주 다음 세대인 진광화는 독립과 건국의 방책으로 사회주의를 좇아갔다. 민족주의는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투항하다시피 했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독립운동 등 변혁과 투쟁의 에너지는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청년 진광화에게는 시대의 흐름이고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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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화는 난징의 오주(五州)중학에 입학했고 조선인 학생 비밀단체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했다. 1933년 중학을 졸업하고 광저우의 중산대학 교육과로 진학했다. 중산대학에서도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조선학생단체인 용진학회에서는 집행위원이었다. 1935년 여름 중산대학에 중국항일학생동맹을 결성하고 간부가 되었다. 그해 12월 국공내전의 중지를 요구하는 광저우 12.12 학생운동에도 앞장섰다.

1936년 1월 중국 국민당 관헌에게 체포되기도 했던 진광화는 그해 7월 공산당에 입당했다. 진광화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과 제휴했으나, 국민당과 연결된 윤세주와는 달랐다. 그것은 개인의 차이인 동시에 시대나 세대의 차이라 할 수도 있다. 입당 후에 그는 중산대학 내 공산당 지부를 결성했고 서기가 되었다. 1937년 6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광저우 청년항일선봉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진광화는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공산당의 수부였던 옌안으로 가서 중앙당학교에서 수학했다. 2년 후인 1939년 4월 타이항산의 팔로군 야전사령부 정치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1941년 7월 황하를 건너 북상해온 조선의용대를 맞이했다. 그곳에서 윤세주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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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일본군의 소탕전에 맞선 팔로군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진기로예 열사릉원). 이 전투에서 진광화와 윤
세주가 전사했다

조선의용대의 핵심이고 영혼이라고도 불린 윤세주도 1941년 7월 초 타이항산의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왔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우한에서 창설됐다. 처음에는 화중과 화남의 국민당 군대에 분산 배속하여 정치선전대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정치선전에만 투입되던 젊은 대원들은 의욕은 감쇠했다. 장제스와 국민당 군대의 항일의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 대원들은 ‘동북노선’을 촉구했다. 조선인들이 많은 화북과 만주로 진출하여 대원을 확충하고 세력을 키워 일본군을 격파하고 조국으로 진군하자는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 11월 충칭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북상항일’을 결정했다.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의용대는 1941년 초 뤄양으로 집결했다. 다시 황하를 건너 국민당 지역인 허난성 린현에 있다가 7월 초 비밀리에 허베이성 서현(涉縣)의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갔다. 팔로군 129사단의 사단장 류보청과 정치위원 덩샤오핑이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팔로군으로 제휴선을 옮겨 탄 조선의용대는 40여 일 동안 대토론회를 거쳐 무장선전, 간부양성, 적구조직이라는 3대 활동방침을 새로 정립했다. 새로운 방침에 따라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화북조선청년학교)을 개설했다. 교장은 박효삼이고 부교장이 바로 진광화, 윤세주는 정치교관을 맡았다. 정치조직으로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지회를 결성하고 대원들이 대거 가입했다. 이때 회장은 진광화가, 부회장은 윤세주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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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항산의 롄화산에 1942년 10월 조성된 진광화(우)와 윤세주의 석묘. 지금은 비어 있으나 오히려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진하게 전해주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세대로 태어났으나 독립투쟁이라는 고난의 길에 스스로 나섰다. 출발이 다르고 경로도 달랐으나 조선의용대와 화북조선청년연합이라는 타이항산의 교차로에서 윤세주와 진광화가 세대를 건너 동지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난 지 일년도 지나지 않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마톈(麻田)에 있는 팔로군 총사령부를 포위했다. 팔로군 총사령부는 경위부대 이외에는 비무장이었다. 쭤취안(左權) 팔로군 참모장이 스쯔령에서 폭격을 당해 전사하는 등 큰 위기에 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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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항산의 우즈산 정상. 우즈산 풍경구 안에 조선의용군 구지가 있고 그 안에는 정율성 기념관도 있다. 이곳은 풍경구 안에 있지만 정규 관람코스가 아니라서 관리자들에게 보여 달라고 청하면 전동카트로 데려다 준다.

팔로군 총부와 가까이 있던 조선의용대의 박효삼 지대장이 전투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조선의용대는 서쪽에서, 경위부대는 동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 포위망을 뚫어 나갔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인 비전투원 대오를 호위하고 화위산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4개 조로 나누어 움직이기로 했다. 5월 28일 아침 윤세주, 진광화, 최채 세 사람은 김두봉과 여성 대원 등 비무장 인원을 숲에 숨기고 적정을 살피다가 그만 일본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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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시 진기로예 열사릉원의 북원에 있는 진광화의 묘. 이 열사릉원의 주제인물인 쭤취안의 묘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다. 쭤취안과 같은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인 희생자로 특별히 대우하는 의도가 뚜렷하다. 윤세주가 아닌 진광화가 이 자리에 묻힌 것은 진광화가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이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서 조직상의 지위가 더 높았기 때문이 아닐까.

대오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세 사람은 자신들의 몸을 던지기로 했다. 숲에서 뛰쳐나와 좡쯔령(庄子嶺)이란 산비탈을 향해 흩어져 뛰었다. 최채는 위로, 윤세주는 중턱으로, 진광화는 아래로. 진광화는 총에 맞고 추락해 전사했다. 윤세주는 허벅지에 총을 맞았고, 최채는 작은 굴에 은신했다. 일본군이 물러가자 최채가 윤세주를 찾아내 움집에 옮겼으나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6월 1일 최채가 다시 찾았을 때 윤세주는 계단밭으로 떨어진 채 죽어있었다. 이들 희생 덕분에 비무장 대오는 전원 살아날 수 있었다.

진광화와 윤세주가 전사한 좡쯔령을 가자면 한단시 서현에서 213번 성도를 타고 북으로 가다가 폔청진(偏城镇)으로 빠져야 한다. 산길을 넘고 넘어 칭타촌 다옌촌을 지나고, 소형차 두 대가 교행하기도 힘든 산길 끝에 다다르면 좡쯔령이란 허름한 아치가 나온다. 차를 세우고 조금만 오르면 능선이다. 하늘은 타이항산 위로 광활하고 능선과 계곡들이 첩첩 쌓여있다. 그곳 어디에선가 진광화와 윤세주가 전사했다. 그날을 반추해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나라를 망쳐 국권을 바치다시피 했던 놈들은 누구이고, 그걸 되찾겠다고 목숨을 던지는 이들은 누구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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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시 진기로예 열사릉원의 남원에 있는 윤세주의 묘. 한글로 새겨져 있다. 열사릉원의 전시관에는 국제주의 전사라는 항목으로 이 두 사람의 전사의 공적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선독립동맹(화북조선청년연합을 확대 개편한 것)과 조선의용대가 희생자 추도대회를 열었다. 7월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팔로군 전체가 조선의용대의 두 열사를 추도했다. 10월에는 팔로군 참모장 쭤취안과 신화일보 사장 하윈과 함께 윤세주 진광화를 스먼촌의 새로운 묘지에 안치했다. 이들 넷은 1950년 10월 한단시 열사릉원에 다시 한 번 이장됐다.

어디든 도시의 불빛이 사그라지면 밤하늘의 별들이 더 빛난다. 내 기억 속에는 타이항산의 밤하늘이 더 빛나는 것으로 각인돼 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열정과 희생이 세대를 이어가며 함께 빛나서 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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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화와 윤세주가 전사한 좡쯔령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