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시문 선집 서문時文後序,代作

<시문 선집 서문時文後序, 代作>[1]

‘시문’(時文)이란 이를 통해 오늘날 인재를 뽑는 글로, 옛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잣대로 옛날의 글을 보면 옛날의 글은 진정 지금의 글이 아니요, 훗날의 잣대로 지금의 글을 보면 지금의 글은 다시 옛날의 글이 된다. 그러므로 글이란 시대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한다. 오르락 내리락한다는 것은 저울질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시대의 저울질을 통해 평가가 내려져 뛰어나다고 인정된 작품은 후세에도 유행한다. 어찌 구차하다 하겠는가!

천고(千古)의 세월 동안 윤리가 같다면 천고의 세월 동안 문장도 같다. 같지 않은 것은 한 때의 형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5언시(五言詩)가 흥성하자 4언시(四言詩)는 옛날 것이 되었고, 당대(唐代)에 율시(律詩)가 흥성하자 5언시는 또 옛날 것이 되었다. 지금은 근체시(近體詩)가 유행하여, 이미 당대(唐代)의 것을 옛날 것으로 여긴다. 또한 의심할 것도 없이 천년 만년 이후에는 다시 우리의 시대를 당대처럼 옛날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물며 인재를 뽑는 글인 시문은 말할 것도 없다.

시문으로 인재를 뽑을 수는 있을지언정 후세에까지 멀리 전해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는 단지 문장을 모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대를 모르는 것이다. 그 사람의 글이 후세에까지 멀리 전해질 수 없는데 그 사람을 인재로 뽑은 경우는 없었다. 국가의 이름난 신하가 무리지어 배출되고, 도덕․공적 그리고 문장의 기세가 지금 찬란한데, 이들이 시문으로 뽑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므로 극위[2]에서 3일 동안 말한 것은 그 사람의 종신의 정론이 된다. 멀리 전해지지 않는 것은 필시 말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일 것이니, 그것을 선발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대중승(大中丞) 이공(李公)이 시문 중에서 좋은 글을 뽑은 것은 멀리 전해지기를 기원했기 때문일 뿐이다. 여러 인사들은 이 점을 유의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권3)


 [1] 시문(時文)’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 유행하는 문체(文體), 지금 이 시대에 쓰여진 글’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당대(唐代)부터 과거 시험을 통한 인재 선발이 본격화된 이후, 대부분의 문인들이 과거 시험 응시를 위해 글공부를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과거 시험 답안용 문체를 ‘시문’이라고 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송 시대에 ‘시문’ 하면 ‘율부(律賦)’를 일컫는 것이었고, 명․청 시대에 ‘시문’ 하면 ‘팔고문(八股文)’을 일컫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율부나 팔고문 등은 형식화와 규격화의 길을 걷게 되고, 비록 ‘시문’이라고 하지만, 자유로운 내용과 형식의 글을 추구하는 문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개혁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이중승이라는 사람이 후배 문인들의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해서 ‘시문’ 중의 명편을 모아 편집하면서, 이지에게 그 서문을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2] 극위(棘闈), 또는 극위(棘圍)는 글자 그대로는 ‘가시나무를 둘러 친 장소’이다. 여기서는 과거 시험장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일정한 장소에 사람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할 필요가 있을 경우, 가시나무를 둘러 쳐 놓아 무단 출입 금지 구역임을 표시했다. 과거 시험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극위’가 과거 시험장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卷三 雜述 時文後序代作

時文者,今時取士之文也,非古也。然以今視古,古固非今;由後觀今,今複為古。故曰文章與時高下者,權衡之謂也。權衡定乎一時,精光流于後世,易可苟也!夫千古同倫,則千古同文,所不同者一時之制耳。故五言興,則四言為古;唐律興,則五言又為古。

今之近體既以唐為古,則知萬世而下當複以我為唐無疑也,而況取士之文乎?彼謂時文可以取士,不可以行遠,非但不知文,亦且不知時矣。夫文不可以行遠而可以取士,未之有也→家名臣輩出,道德功業,文章氣節,于今爛然,非時文之選歟?故棘闈三日之言,即為其人終身定論。苟行之不遠,必言之無文,不可選也,然則大中丞李公所選時文,要以期于行遠耳矣。吾願諸士留意觀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