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E. 매클라렌(Ann E. MacLaren)
독자의 구성
수많은 유명한 백화체 소설과 희곡은 먼저 필사본의 형태로 애호가들의 작은 동호회에서 유통되었다. 이는 취유(瞿佑)의 《전등신화》와 같이 문언으로 된 소설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동호회 성격의 독자층은 항상 문인 계층의 일원 또는 아마추어 수집가 겸 애호가(好事者)로 불린다. 예를 들어 1494년의 서문에서 융위쯔는 《삼국연의》를 필사본 형태로 다투어 베껴 쓴 이들을 “문인 수집가들(士君子之好事者)”이라고 지칭하였다. ‘무롄(目連)’에 대한 통속적인 종교 이야기에 바탕을 둔 희곡도 처음에는 필사본의 형태로 “아마추어 수집가들” 사이에 유통되었고, 그리고 나서 (1582년에 쓴 서문에 따르면) 이 책에 대한 커다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판된 것이다. 명대의 위대한 장편소설 중에서도 《금병매》는 초기에 감식안을 가진 문인 독자 동호회에서 필사본의 형태로 돌려봤기 때문에 복잡한 판본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문의 작자들은 종종 출판업자와 문인 독자 사이의 대화를 지어내었는데, 이 대화에서 문인 독자는 필사본을 보고 작품에 감탄하여 출판을 종용하는 인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슈란쯔(修髥子, 장상더(張尙德)의 필명)는 1522년에 쓴 그의 서문에서 《삼국연의》가 수월하게 읽힌다는 것을 칭찬하면서, “손님(客)”의 입을 통해 아마도 이 작품의 첫 번째 인쇄본이라 할 만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손님은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렇소, 당신은 나를 오해하지 마시오. [《삼국연의》는] 믿을 만한 역사서를 보완하면서도 사실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소. 책은 아주 많지만 좋은 책은 또 매우 찾기 어려우니 판목에 새겨 오래 살아남도록 하여 사방에 드러내어 줄 것을 청하니, 할 수 있겠소?”
백화체 소설에 대한 감식안을 가진 문인 독자는 ‘사자(士子, 문인)’, ‘군자(君子, 신사)’, ‘소객(騷客, 시인)’, ‘진신(縉紳, 관리)’, ‘상음자(賞音者)’ 또는 ‘지음자(知音者, 감식안을 가진 이)’, ‘아사(雅士, 교양인)’ 등등과 같은 용어로 지칭된다. 장슝페이(張雄飛, 활동 기간은 1522년-1566년)는 둥졔위안(董解元, 활동 기간은 1190-1208년)이 쓴 원대의 설창체 서사 《서상기제궁조(西廂記諸宮調)》의 개정판에 붙인 1557년 그의 서문에서 표적 독자층을 감식안을 가진 이(知音者)와 관리(縉紳先生)로 언급하고 있다. 학자이자 장서가인 후잉린(胡應麟, 1551-1602년)은 《수호전》을 애독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관리와 교육받은 이들(縉紳文士)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서문의 작자들은 자신의 독자들이 수준이 떨어지는 다른 작품 대신에 해당 텍스트를 선택했다고 칭찬하면서, 그들이 보는 눈이 있다고 추켜세웠다. 예를 들면 1589년에 쓴 《수호전》의 서문에서 톈두와이천(天都外臣, 왕다오쿤(汪道昆, 1525년-1593년)의 필명으로 여겨짐)은 《수호전》이 주는 즐거움, 즉 백과사전적인 시야와 현란한 플롯에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고아한 선비에게만 이야기 할 수 있지 세속적인 선비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다(此可與雅士道, 不可與俗士談).” 그는 《삼국연의》에는 사실과 허구가 어지럽게 섞여 있어 “무지의 어둠 속에 앉아있을 뿐인(坐暗無識耳)” 보통 사람이 읽기에나 적당하다고 비난하였다. 반면에 고아한 선비는 《수호전》을 또 다른 《사기》로 읽을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셰자오저(謝肇淛, 1567년-1624년)는 많은 허구 작품들을 칭찬하면서도 《삼국연의》와 다른 역사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너무 근접했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여겼다. 곧 그러한 텍스트들은 항간의 아이들은 즐겁게 할 수 있지만 문인들(士君子)은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문의 작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동일한 작품의 다른 판본에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명대의 장편소설은 (문장은) 단순하지만 더 많은 이야기 소재를 가진 판본(文簡事繁本; 簡本)과 그렇지 않은 판본(文繁事簡本; 繁本)이라는 두 가지 텍스트 전통으로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장펑이(張鳳翼, 1527-1613년)가 1588-1589년 경에 쓴 《수호전》의 서문에서 지적한 대로, 감식가(賞音者)는 궈쉰(郭勛, 1475-1542년)이 펴낸 권위 있는 텍스트와 왕칭(王慶)과 톈후(田虎)에 대한 추가된 이야기가 있는 상업적 출간물을 구분했을 것이다.
또 모호하거나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회적 집단을 가리키는 언급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집단은 아마추어 수집가로서, 이들에 대해서는 작자와 편집자에 관해 서술한 다음 절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선인(善人)”이라고 불리는 평민과 혈족 용어(형제자매 등등)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샹떼 파블(彈詞)과 종교적인 “보권(寶卷)” 서사의 표적 독자층이었다. 또 다른 그룹들은 “천하의 사람들(天下之人)”(1548년, 《삼국지전》 에스코리얼(Escorial) 소장본), “온 세상의 사람들(四方之人)”(슈란쯔(修髥子), 1522년, 《삼국연의》 서문), “네 부류의 사람들(四民, 즉 士·農·工·商)” 등이다. 윤리서와 이와 유사한 텍스트들의 독자층은 네 부류의 사람들(四民)과 “보통 사람들(凡人)”로 인식되었다. 진성탄(金聖嘆)이 쓴 것으로 되어있는(아마도 가탁일 것이다) 1644년의 서문은 “교육을 받은 사람(學士)”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不學之人)”, “영웅호걸(英雄豪傑)”과 “범인과 속인(凡夫俗子)” 모두가 독자층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독자는 스스로 이러한 범주 가운데 하나에 자리 매김 할 것을 권유받았을 것이다.
명대에 독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가장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리석은(곧, 교육받지 못한) 남자와 여자(愚夫愚婦)”이다. 고대에 이 상투구는 일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 통치자의 의무를 지칭하였다. 선도적인 명대 사상가인 왕양밍(王陽明, 1472년-1529년)은 이전의 유가적 사고에서는 전례가 없는 방법으로 “우부우부(愚夫愚婦)”의 잠재력을 고양시켰다. “우부우부와 같이 하는 것을 ‘정통’이라 하고, 우부우부와 달리하는 것을 ‘이단’이라 한다.” 아마도 “우부우부”라는 말이 백화체 텍스트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은 린한(林瀚, 1434년-1519년)이 1508년에 쓴 《수당지전통속연의(隋唐志傳通俗演義)》의 서문일 것이다. “이 작품이 《삼국지》와 함께 세상에 전해져, 우부우부라도 두 왕조의 일을 한 번 보고서 그 대강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는 실제로는 관찬 사서에 대한 보충물로서 “이후의 군자들(後之君子)”을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부우부”라는 말은 (관찬 사서의 심오함과 반대되는) 대중화된 텍스트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서문 담론에 쓰인 수사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롄(目蓮) 이야기를 기초로 한 정즈전(鄭之珍, 16세기 말 활동)의 희곡 《권선기(勸善記)》에서와 같이 다른 인쇄본에서 이 용어는 특수한 독자층을 가리킨다. 1582년에 쓴 서문에서는 “우부우부(愚夫愚婦)”를 감동시키고 그렇게 해서 도덕적 교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희곡을 썼다고 되어 있다.
이와 관련이 있는 용어는 “속인(俗人)”이다. 리다녠(李大年)은 1553년에 쓴 《당서연의(唐書演義)》의 서문에서 속인과 시인(俗人騷客) 모두 이 작품을 읽으면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 다른 경우로 슝다무(熊大木, 16세기 중반 활동)는 자신이 송대 영웅 웨페이(岳飛, 1103년-1141년)의 전기를 교육받지 못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언명했다. 출판업자이기도 한 슝다무의 인척은 그에게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라도 그 의미의 열에 하나 둘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 텍스트를 사화본(詞話本, 시와 산문이 섞인 형태)으로 다시 쓸 것을 종용하였다. 1522년에 등장한 이 개작된 텍스트는 《대송연의중흥―영렬전(大宋演義中興―英烈傳)》이라고 불렸다. 항저우(杭州)에서 나온 《삼국지전》의 17세기 판본에는 서문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뤄관중은 《삼국지》와 《통감》을 엮어서 통속연의를 짓고 그것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만들어, 어리석은 사람과 속된 선비들이라도 읽은 바를 거의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역사 소설을 읽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읽고 쓸 줄 알게 된 젊은이들(그 가운데 몇몇은 미천한 출신의 사람들이었다)이 백화체 소설, 특히 간략한 방각본들을 읽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면 우청언(吳承恩, 약 1506년-1582년)은 비단 가게 점원의 아들이었음에도 어렸을 때 아버지 몰래 비정통적인 역사들을 읽었다고 고백했다. 예순 여덟의 나이에 마침내 진사가 된 천지타이(陳際泰, 1567년-1641년)는 푸졘(福建) 우핑(武平)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찰기에서 어렸을 때 그의 삼촌에게서 《삼국연의》를 한 권 빌려서는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흠뻑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특히 페이지마다 이야기의 내용을 묘사한 텍스트 상단의 삽화에 매료되었다. 그가 읽은 텍스트는 분명 푸졘 졘양(建陽)에서 출판된 상도하문(上圖下文) 형식의 삽화본이었을 것이다. 《수호전》의 축약본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진성탄은 어렸을 때 느낀 사서(四書) 공부의 지루함을 기술하였다. 열한 살이 되자 그는 《수호전》의 “통속적인” 판본(俗本)을 즐기기 시작했다.
“우부우부”를 제외하고는 내가 아는 한 이 시기 희곡과 소설 작품의 서문에서 여성이 이런 식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확실히 백화체 작품의 신생 독자층을 형성했다. 예성(葉盛, 1420년-1474년)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된다. 그는 서상들이 차이보졔(蔡伯喈)와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아마도 희곡 판본에 기초하고 있는), 즉 농부, 장인, 상인, 장사꾼(農工商販)과 같은 일반 백성들이 베껴 써서 소장하기를 좋아한 이야기들을 선전하며 파는 것에 대해 주의 깊게 기록했다. 그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여자들이 특히 그러한 것들에 빠져들었다(癡騃女婦, 尤所酷好)”고 기록했다. 여성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들은 그들을 탄사나 설화(storytelling)를 듣는 청중의 일원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여성 독자에 대한 언급은 종종 청각적 독서(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혹은 청중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기)와 관련된다. 이와 같은 청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텍스트들은 청각적 특징을 가지도록 고안되어야 했다. 아래서 논의하겠지만 편집자들은 백화체 인쇄물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청대 중엽에 이르게 되면, 독서 행위의 계층 분화가 이루어지는 분명한 징후가 나타나게 된다. 18세기 말 장쯔린(張紫琳)은 여성들이 설화인의 통속적인 이야기를 보는 것[看]을 좋아는 하지만 “책을 읽어도(讀書) (귀를) 꿰뚫지는 못 한다”고 적고 있다. 평점가들은 이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볼(看)” 수 있도록 청각적 특징들을 구비하고 있는 구전 예술에 바탕한 것들과, 학습하고 통달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는 “독서(讀書)”라는 성리학적 의미의 경전적 텍스트들을 구분하였다. 교육받지 못한 집단 가운데서 새로 등장한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이 ‘여성’으로 묘사되는 반면, 문인 독자들은 은연 중에 ‘남성’으로 남아 있었다.
여성 독자라는 문제는 여성 문학의 성립과 읽고 쓰는 능력, 붓·벼루·먹·종이와 같은 중국의 필기 기술에 대한 비유적 연상이라는 측면에서도 탐구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주시(朱熹)는 유가적 계몽을 이루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남성 독자의 이미지를 수립하기 위해서 남성의 생물학적이고 직업적인 역할에 근거한 일련의 비유를 더러 사용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별나게 독특한 사람은 아니었다. 붓으로 글을 쓰는 것은 문인들이 이를 가리켜 종종 “붓 농사(筆耕)”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농부가 쟁기를 가지고 노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 작가가 붓을 가지고 노동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붓은 중국의 춘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때에는 남근을 상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대의 춘화집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붓을 벼루에 적시는 남자를 그린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외설적인 시, 희곡, 소설에서 남성과 여성의 읽고 쓰는 능력은 고도로 젠더화된(gendered) 방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연애편지를 쓰는 여성에게는 편지를 “스케치하고(素描)” “마름질하고(裁)” “수놓는다거나(繡)”, 바느질하고 화장하는 것과 같은 여성적인 일에서 가져온 용어들이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들 역시 외설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수놓다(繡)”는 성교 중인 여성을 가리킬 수 있으며, 이와 유사하게 “쓰다(書)”는 성적 행위에서 남성의 역할을 가리킨다. 문인들은 실제의 기생, 허구적 기생, 그리고 사랑 이야기의 여주인공을 구성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문학적 기교를 복합적인 성애 예술에서의 차별적인 추구로서 상정한 은유적인 네트워크를 모두 안배하였다.
젠더화된 읽기(와 쓰기)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다 다루기에 너무 복잡하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의 다양한 독서 행위 유형을 관찰하면, 여성들이 각기 다른 범위의 읽고 쓰기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범위는 공연 스타일의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던 반 문맹 여성들의 “청각적 문해력”과 고급 계층 기생들의 좀 더 정교한 “기녀의 문해력”(<그림 2>를 볼 것), 좋은 집안의 규수들로 여겨지는 이들의 소략한 유가적인 문해력이 그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남성 문인의 수준에 도달하여 심지어 “여학사(女學士)”로 간주되는 예외적인 여성의 교양에 대해 경탄했던 문인 계층의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많은 여성들이 읽을 수 있었고 또 읽었다 해도 15세기와 16세기의 여성들이 희곡과 백화체 소설의 편집자와 출판업자들에 의해 표적 독자층으로 언급되는 일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