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원의 루쉰 문학 번역과 1975년

우리나라의 루쉰 문학 번역사에서 1975년은 기념할 만한 해다. 1974년 장기근에 의해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납함(吶喊, 외침)』이 완역된 이후 1년만에 잡문을 제외한 루쉰의 문학작품이 이가원에 의해 대부분 완역됐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자들도 이 해에 이가원이 이룬 업적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 근거가 잘못 되어서 몇 가지 업적이 누락되었다.

기존 연구자들이 근거로 삼은 서적은 1975년 동서문화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사상전집 4』이다. 이가원은 이 책에 『눌함(吶喊)』(이가원은 吶을 눌로 읽음), 『방황(彷徨)』, 『야초(野草)』, 『조화석습(朝花夕拾)』, 『고사신편(故事新編)』을 번역해서 실었다. 이 중 『눌함』, 『방황』, 『야초』, 『고사신편』은 완역이고, 『조화석습』은 두 편만 번역했다. 이 판본이 현재 시중 서점에서도 유통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판본에 근거하여 1975년에 이가원이 『눌함』, 『방황』, 『야초』, 『고사신편』만 완역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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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1974년, 사진 출처 아낌없이주는나무 책방

하지만 이런 서술은 정확하지 않다. 1975년 동서문화사에서 또 다른 판본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1973년에서 1975년까지 동서문화사에서는 『세계문학사상전집』 외에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했다. 『세계문학전집』 제44권이 바로 ‘魯迅’(노신, 루쉰) 단행본이다. 이 책에는 놀랍게도 『눌함(吶喊)』, 『방황(彷徨)』, 『야초(野草)』, 『조화석습(朝花夕拾)』, 『고사신편(故事新編)』, 『양지서(兩地書)』가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즉 『세계문학사상전집 4』에는 두 편밖에 번역되지 않았던 『조화석습(朝花夕拾)』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었으며(후기만 빠졌음), 『양지서』도 전체 35편 중에서 33편이 번역되었다. 35편 중에 빠진 것이 있는지 아니면 편집 실수로 35편을 33편으로 계산했는지는 좀 더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나도 1975년에 출간한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사상전집 4』(魯迅卷)는 알고 있었지만, 『세계문학전집 44』(魯迅卷)는 알지 못했다. 최근에 국회도서관을 검색하다가 『세계문학전집 44』(魯迅卷)가 1973년에 출간되었다는 도서목록을 보았다. 만약 이 책이 정말 1973년에 출간되었다면 『납함』의 첫 번째 완역도 장기근이 아니라 이가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수정해야 한다. 나는 몹시 궁금하여 근처에 거주하는 노승현 님께 이 책을 좀 확인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노승현 님도 루쉰 선생의 열혈 팬이다. 그는 올해 1월부터 자신의 페북에 매일 한 편씩 루쉰 일대기를 연재하고 있다. 노 선생님은 나의 번거로운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국회도서관으로 행차하여 직접 『세계문학전집 44』를 확인하고 아래의 사진을 찍어 내게 보냈다.

확인 결과 『세계문학전집 44』는 1973년에 출간된 것이 아니라 1975년에 출간되었다. 아마도 『세계문학전집 41~50』을 카드 하나에 목록화하면서 41권 출간 연도인 1973년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조화석습』과 『양지서』도 이미 거의 완역 형태로 출간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양지서』의 경우에는 대개 1983년 박병태의 번역본(靑史 출판사)을 최초로 알고 있지만 그보다 8년 전에 이가원의 번역본이 나온 것이다.

아쉽게도 이가원은 자신의 번역이 어떤 판본을 원전으로 삼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목록을 조사해보면 루쉰과 관련해서 일제강점기에 이미 중국에서 출간한 다양한 판본과 일본에서 출간한 다양한 판본이 우리나라에 널리 유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가원의 학문 역정을 살펴볼 때, 그는 이런 여러 판본을 직접 독해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학자로서 현대중국어를 독해하면서 다소 부족한 점을 드러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맛깔나고 적절한 우리말을 구사하고 있다.

이로써 1975년에 루쉰의 소설 전체, 산문시 전체, 회고 수필 전체, 『양지서』 대부분이 완역되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의 루쉰 문학 번역은 그 누구도 이가원의 업적을 뛰어넘지 못했다. 더러 이가원이 일본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가 중국어 원전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번역본만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85~1987년 일월서각에서 일본 학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의 역주본 『루쉰문집1~6』이 출간될 때까지 이가원의 번역본은 루쉰 애호가들이 가장 많이 읽은 판본이었다.

안타깝게도 이후 동서문화사에서는 『세계문학전집 44』를 유통시키지 않고 『세계문학사상전집 4』를 유통시켰다. 지금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 『세계문학전집 World Book 91』은 『세계문학사상전집 4』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제목만 바꾼 것이다. 아마 『조화석습』과 『양지서』를 모두 포함할 경우 분량이 너무 늘어나고 루쉰 문학의 정수에서 벗어난다고 여긴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여기에는 독자들의 기호도 반영되어 있을 터이다.

국회도서관까지 직접 가서 『세계문학전집 44』를 확인해준 노승현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나도 조만간 『세계문학전집 44』 실물을 직접 보고 만지러 서울행 열차를 한 번 타야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