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월분패의 미학
번화한 상하이 남경로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는 1934년이나 1935년쯤이었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서는 그녀의 몸이 다소 흔들렸다. 어두워진 거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기 먹은 바람에 얼굴 화장이 다소 윤기를 더했고, 뒤로 쓸어 넘겨 짧게 묶은 단발의 머리카락이 더욱 검어보였다. 머리의 왼쪽 윗부분에 살짝 얹은 하얀 꽃 모양의 장식 비녀가 환한 얼굴과 어울려 서로를 빛내고 있었다. 제홍색(祭紅色)의 치파오 칼라를 명월주 두 개가 목 아래에서 묶고 있어 미소 짓는 붉은 입술 사이의 하얀 치아와 호응하고 있었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서며 벌어진 치파오 측선 사이로 고근혜(高跟鞋)의 호접결(蝴蝶結)이 날아갈 듯 드러났고, 옆무릎 위로 타고 올라간 하얀 다리의 살결 위로 이제 켜지기 시작한 네온 빛이 짧게 비치고 지나갔다. 야총회(夜總會)에서 춘 호보무(狐步舞)의 여운이 남아서일까 치켜 든 두 손의 하얀 장갑이 춤추듯 흔들렸다. 아니면 완곡하게 굽어진 초승달 눈썹 아래 눈동자는 전영관(電影館)에서 <신녀>(神女)를 보고 나온 듯 꿈꾸는 듯하였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서며 벌어진 치파오 측선 사이로 고근혜(高跟鞋)의 호접결(蝴蝶結)이 날아갈 듯 드러났고, 옆무릎 위로 타고 올라간 하얀 다리의 살결 위로 이제 켜지기 시작한 네온 빛이 짧게 비치고 지나갔다. 야총회(夜總會)에서 춘 호보무(狐步舞)의 여운이 남아서일까 치켜 든 두 손의 하얀 장갑이 춤추듯 흔들렸다. 아니면 완곡하게 굽어진 초승달 눈썹 아래 눈동자는 전영관(電影館)에서 <신녀>(神女)를 보고 나온 듯 꿈꾸는 듯하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먼저 본 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훈염하듯 그윽하게 내려간 눈두덩 아래 커다란 호수가 타원형으로 놓여 있었고, 고요하게 찰랑이는 물속에 까만 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호수에 빠질 것만 같았다. 천 칠백 년 전 이곳 송강 출신이었던 육기(陸機)가 이러한 모습을 “수기가찬”(秀氣可餐)이라 표현했던가. 나도 모르게 탄식처럼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샤오지에, 선 메이!”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말고 나에게 들고 있던 성냥갑만한 물건을 하나 건네주었다. 종이 갑 겉에는 원형의 문양이 있고 가운데 ‘Jintan’이라 쓰여 있었다. 뒷면을 보니 작은 글씨에 어두워서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본 것은 베이징 판자위안 골동품 시장에서였다. 가끔 갔던 명식(明式) 가구 모조품을 취급하는 집에서 문혁(文革) 기념품과 ‘노월분패’(老月分牌)를 한쪽에 걸어놓았다. 이미 반세기가 지나 색이 바랬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동자는 내가 걸을 때마다 나를 따라다녔다. 월분패가 북경의 골동품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가열된 혁명의 열기도 오래 전에 식고 자본이 대도시를 데우기 시작한 1990년대였다. 1995년 처음 베이징에 갔을 때는 그저 한두 점 어쩌다 보일 뿐이었고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비록 미인들의 하얀 피부가 먼지 속에 묻혀 있다지만 그 눈매는 여전히 서늘하였다. 값도 10위안이니 20위안이니 하던 것이 100위안은 예사로 넘었다. 크기도 정만타 그림 그리 크지 않는 것이 그랬다. 노트를 펼친 크기였다. 그 후 상하이미술관을 찾아간 것도 그녀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근현대 자료실에서 홍콩의 수집가가 기증한 컬렉션으로 가득 찬 ‘월분패 수장고’에서 그녀를 몇 점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어디엔가 그녀의 모습은 더 남아 있을 것이다. 한창 때는 매년 천 종이 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가.
그녀의 그림 가운데는 전통 사녀복을 입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정만타(鄭曼陀)가 1914년 상하이에 가서 신식 복장으로 바꾸어 그리기 전에는 항저우에서 전통 복장으로 그렸으니까. 이 작은 변화는 그 효과가 생각보다 컸다. 전통 채색 판화에서도 이미 전통 복장은 오랫동안 출몰하였기에 그다지 새로운 바가 없었다.
사실 이욱(李煜) 사의 의경을 마찬가지로 표현하였지만 문인의 정서를 표현한 풍자개(豐子愷)의 그림에 비해 정만타의 미감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밤공기가 이미 물속 같이 풀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살결과 옷이 미끄러지듯 윤기를 내고 향기가 은은히 떠도는 듯하다. 거기에 발에 비친 나뭇잎과 구름, 단선(團扇)에 투시된 옷자락도 섬세한 여성적 미감을 드러낸다. 석인 판화로 찍혀진 칼라는 전통적인 여성의 완약(婉約)과 요조(窈窕)를 시각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표현해내었다. 여인은 그믐달이 내려앉은 밤 굽이진 난간으로 사람을 이끄는 듯하다. 전통적인 훈염(暈染)과 새로운 그라데이션이 완미하게 잘 어울렸지만, 그러나 이러한 전통 복장 속에 갇힌 여성은 이미 시대적 미감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인들이 더 많이 웃기를 바랐고, 눈을 내리깔지 않고 바로 직시하기를 바랐다. 그녀들은 이러한 바람을 잘 따랐지만 한 가지 더, 뜻밖에도 그녀들은 손에 물건을 들고 나타났다. 풍자개 그림 그 물건이 향수든 담배든, 술이든 화장품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상품이었으므로 사도 되고 안 사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될수록 사도록 유혹해야 했다.
풍자개와 정만타의 ‘무언독상서루’는 상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족적인 정감과 형식이었다. 그것은 값을 요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예술이 모두 그러하듯 거기에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의 시작과 끝이 없는 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상품을 들고 나타난다면 이 공간은 달라진다. 미녀는 자신을 팔면서 상품을 팔아야했다. 당시 월분패의 모델이 대부분 기녀나 여배우였던 점도 그녀들이 자신을 팔아야했다는 점에서 그 이미지가 맞아떨어졌다. 관람자와 거래를 해야 했다. 때문에 여성들은 보이는 대상에서 보는 대상으로 바뀌어져야 했고, 그 눈길은 점점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상하이의 월분패 속을 거니는 그녀가 이미 서양의 잡지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밝게 웃고, 신장(新裝)을 입고, 발랄하게 뛰어놀고, 사람의 마음을 전혀 거슬리지 않는 표정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상품의 긴고주(緊箍咒)를 벗어던지고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수동적이고 남성의 시선을 받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설탕처럼 달콤하고, 찹쌀처럼 찰지고, 입술처럼 부드럽고, 남성의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예쁜 척을 다하고 있지만, 상품을 내려놓고 나면 떠나버릴 것을 안다. 그녀는 밝은 대낮의 태양 아래 당당하지 않다.
그것은 문혁 선전화에서 보듯 넓은 면적의 얼굴과 큰 눈동자에 깃든 혁명 정신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없었다. 차라리 <선녀>(神女)는 모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비록 기녀이지만 ‘선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월분패 속의 여인들은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는 내재적인 이념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지금도 계속되는 화장품 광고 속 미녀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공허했다. 그것은 애초에 전통 인물화 속에 여성의 모습에 자유, 정의, 승리와 같은 남성적 또는 중성적 이미지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자유, 정의, 승리가 꼭 남성적인 이미지인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과 관련된 전통 문화가 없거나 적었기에 비여성적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월분패에서 신여성의 틀을 덧씌웠다고 해도 정신의 변혁까지 이르지 못했으므로, 그 아름다움은 여전히 남에게 의지하는 것에서 머물게 되었다. 월분패 미학이 주는 아쉬움은 동아시아 여성의 미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히 남성의 미감에 적응하여 나온 것이므로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다. 상하이에 가서 남경로를 걷다보면 언제나 월분패의 여인들이 떠오른다.
by 이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