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와 북조 – 새 문명의 재창조

5-1 재통일

진陳 왕조는 망하기 전에 스모그가 심했다.

짙은 스모그가 건강의 천지를 뒤덮는 바람에 사람들은 코가 맵고 시큰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 황제 진숙보는 심지어 신년 하례식 때 혼절해 황혼녘에야 겨우 깨어났다고 한다.1그날은 수나라 개황開皇 9년(서기 589년) 정월 초하루였다. 스모그 속에서 혼절한 진숙보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날,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보낸 대군이 두 갈래로 양자강을 건너 금세 성문 아래로 들이닥치리라는 것을.2

20일 뒤, 그 망국의 군주는 포로가 되었다.

그가 포로가 된 과정은 무척 볼썽사나웠다. 수나라군이 대성에 들어섰을 때, 성 안의 문무백관은 모조리 도망치고 겨우 몇 명만 궁 안에 남아 있었다. 한 충성스러운 대신이 진숙보에게 건의했다.

“정장을 입고 정전(正殿. 임금이 조회를 하며 정사를 처리하는 장소)을 지키소서. 당년에 양 무제가 후경을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수나라군의 장수를 접견하신다면 적어도 존엄은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숙보는 말했다.

“칼날 앞에서 어떻게 그들을 만난단 말이냐? 내게도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우물 속에 숨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진숙보는 수나라군이 우물에 돌을 떨어뜨리려 할 줄은 몰랐다. 그는 그들이 돌을 떨어뜨리겠다고 떠들자 비로소 우물 속에서 소리를 냈다. 이번에 놀란 쪽은 그들이었다. 얼른 밧줄 한 가닥을 내렸는데 뜻밖에도 올라온 사람은 세 명이었다. 진숙보와 귀비 장려화張麗華 그리고 귀빈 공씨였다.3

그 다음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미스터리도 없다. 절세미녀 장려화는 수나라군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그녀를 눈독들이던 진왕晋王 양광楊廣(훗날의 수 양제煬帝)은 무척 불쾌해했다고 한다. 망국의 군주 진숙보는 장안으로 끌려가 양심도 없이 뻔뻔하게 오래 수명을 누렸다.4

역사는 크게 변모했다. 그 전까지 중국은 4세기 동안 분열과 혼란을 겪었다. 삼국, 동진과 서진, 오호, 십륙국, 남북조를 거치며 사분오열되고 남북이 대치하여 동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숙보가 우물 속에서 끌어올려진 뒤로 이 모든 것은 전부 종결을 고했다.

한 시대가 그렇게 희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기까지 진한의 ‘제1제국’이 410년간 지속된 것을 알고 있다. 이어서 수 문제가 진陳나라를 멸한 후 주전충朱全忠이 당을 멸하기까지 수당의 ‘제2제국’이 318년간 지속되었다. 이 양자 사이의 세월은 정확히 4백 년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부질없이 연기처럼 사라진 시대가 아니었으며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사유를 요구한다.5

중국민족에게는 왜 그런 운명과 선택이 존재했을까?

진陳나라와 수나라를 살펴보기로 하자.

수 문제가 멸한 진 왕조는 진패선이 세웠고 그 시점은 후경의 난 이후였다. 그때는 양 무제의 자손들의 권력투쟁과 골육상쟁 그리고 매국 행위 때문에 남량의 국토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회남淮南과 광릉은 동위의 것이 되었고 익주益州와 한중漢中과 양양襄陽은 서위의 것이 되었다. 남조는 처음부터 천하의 절반을 차지했을 뿐이었는데 이제 그 절반을 또 상실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진나라는 건립 초에 이미 작은 왕조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남방의 한족 정권들이 그나마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릉巴陵(지금의 후난성 웨양岳陽)에서 건강에 이르는 양자강 방어선 덕분이었는데, 이제 강릉江陵(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荊州)이 실질적으로 서위의 통제 아래에 있어서 양자강의 천혜의 지리적 조건은 더 이상 믿을 만하지 못했다. 진패선의 나라는 처음부터 몹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6

그래서 초기의 황제 몇 명이 의욕을 가져보기는 했지만 사실상 대세를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한 차례 수복했던 양자강 이북의 여러 지역도 결국에는 적에게 다시 빼앗겨, 진 왕조는 도로 좁은 범위로 축소되고 말았다.7

진숙보가 제위를 이어받았을 때는 그저 망국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수 문제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진나라를 정벌했으며 출정식도 무척 요란했다. 심지어 그는 진숙보의 20가지 죄상이 적힌 격문을 발표하고 그것을 30만 부나 베껴 적어 널리 뿌리게 했다. 그때 누가 군사행동은 보안과 기만이 중요하므로 널리 알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수 문제는 생각이 달랐다.“짐이 하늘을 대신해 천도를 행하는데 왜 비밀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놈이 격문을 보고 스스로 잘못을 고친다면 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8

수 문제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당시 수나라군의 병력은 51만 8천여 명이었고 장병들은 하나같이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면 진숙보에게는 무엇이 있었을까? 수 문제의 말에 따르면 그의 국토는 겨우 손바닥 만했고 의지할 만한 것이라고는 겨우 산골짜기 정도의 험준한 지형뿐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천명을 받은 왕조의 강력한 군대를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9

하지만 진숙보는 천하태평이었다.

사실 수 문제의 대군이 국경을 압박해올 때 진나라 조정에는 첩자의 정보가 속속 전해졌다. 그러나 한 조정 대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다 변방의 장병들이 공을 세우려고 일부러 적의 실정을 과장하는 겁니다. 양자강은 예로부터 천험의 요새인데 북방의 오랑캐가 어떻게 건너겠습니까? 만약 건너온다면 소신이 큰 공을 세워 태위공太衛公이 되겠습니다!”10

진숙보는 껄껄 웃고서 매일 밤 잔치를 열었다.

그는 이토록 무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연애시는 매우 잘 써서 대표작으로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남겼다.11

그를 가리켜 수 문제가 “패기라고는 전혀 없다”(全無心肝)고 평할 만했다.

따라서 진숙보는 망국의 군주가 될 만했으며 수 문제가 진나라를 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진나라와 남량은 진즉에 망했어야 했다. 그들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북방도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북위에서 발생했다.

남북조시대를 연 그해(서기 439년)부터 북위는 중국 북방의 주인이었다. 그 후로 그들은 꼬박 한 세기 동안 북방의 통일을 유지했다. 그 공은 당연히 제국을 세운 탁발규, 북조를 창립한 탁발도 그리고 낙양으로 천도한 탁발굉, 이 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낙양 천도 후 5년 만에(서기 499년) 탁발굉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계자는 그의 이상과 생각을 따르지 못했고 역사의 방향을 읽지도 못했다. 개혁 뒤의 정국을 장악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궁정 쿠데타와 정치적 음모가 30년간 이어지다가 양 무제가 동태사에서 첫 번째 사신을 한 그 이듬해(서기 528년)에 북위는 대란이 일어나 분열되었다.분열 뒤에 북위는 동위(서기 534년)와 서위(서기 535년)로 변했다.

동위와 서위는 표면적으로는 탁발씨의 후예가 계승했지만 실제로 동위의 집권자는 선비화된 한족 고환이었고 서위는 한화된 선비족 우문태가 좌지우지했다. 이처럼 헤게모니가 남의 손에 있었던 탓에 군주가 자리를 선양하는 형식의 쿠데타가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결국 동위는 북제(서기 550년)로, 서위는 북주(서기 557년)로 변했다.

또한 서위가 북주가 된 그해에 남량은 진나라로 변했다.

제, 주, 진, 삼국이 정립했다.

삼국 중에서 북주가 영토가 제일 넓었지만 역량은 제일 모자랐다. 군사력은 북제보다 약했고 정치적 지위는 진나라만 못했으며 문화는 더더욱 상대적으로 낙후했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뜻밖에도 북주에 돌아갔다. 서기 577년, 북제의 수도 업성이 함락되고 북주가 다시 중국의 북방을 통일했다. 진 선제宣帝가 북제의 손에서 탈환했던 양자강 이북의 여러 지역도 북주의 소유가 되었다.

천하는 곧 북주의 것이 될 듯했다.

안타깝게도 북제를 멸한 지 1년 반 만에 주 무제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3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정신적 구심점을 잃은 북제는 곧장 혼란에 빠졌는데 나중에 한 강력한 인물이 나타나 사태를 수습했다.13

우리는 그가 바로 수 문제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 문제 양견은 선비화된 한족으로서 선비 성씨는 보륙가普六茄, 선비 이름은 나라연那羅延(금강석처럼 단단하다는 뜻) 그리고 작위는 수공隋公이었다. 그런데 이 보륙가 나라연은 수공에서 수왕隋王으로 지위가 오르고 다시 양견이라는 한족 이름을 되찾았을 때 또 한 차례 선양의 연극을 벌여 북주를 수나라로 바꿨다.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는 사명도 당연히 수나라가 맡게 되었다.

따라서 4백년의 그 역사는 이렇게 개괄될 수 있다. 통일된 대제국이 셋으로 나뉘어 삼국이 되었고 짧은 통일 뒤, 다시 크게 분열해 위진십륙국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남북이 대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남북조이다. 마지막에는 서쪽이 동쪽과 싸워 이기고 북쪽이 남쪽을 통일해 새로운 대제국이 탄생했으니, 그 노선은 옛날 진나라의 천하통일과 거의 유사했다.14

이상한 일이다. 4백 년간 분열되고 혼란했던 국면이 왜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을까?

통일은 왜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되었을까?

또 그 전에 북방은 왜 또 다시 분열되었을까?

분열된 적이 없었던 남방은 왜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을까?

마지막에 통일을 이룬 인물은 왜 선비화된 한족일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들의 답을 우리는 알고자 한다.

5-2 회하의 남과 북

북위 33도는 중국민족과 중국문명과 관련해 특수한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이 위도의 아래위에서 중서부에 위치한 해발 2000미터의 진령秦嶺이 남북의 온난 기류를 가로막고 그 산세가 동부, 즉 회하까지 이어진다. 또한 회하와 진령은 함께 중국의 800밀리미터 등강수량선을 이루고 있다. 연강수량이 그 북쪽은 800밀리미터 이하이고 그 남쪽은 800밀리미터 이상이다.

이것을 경계로 중국의 대지는 남방과 북방으로 나뉜다.

온대성 반습윤 기후에 속하는 북방은 광활한 비관개 농업 평야로서 비옥한 황토에서 밀과 대두 그리고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가 자란다. 예를 들어 부견苻堅은 전진의 국도 옆에 심던 홰나무를 뜻했다. 가을과 겨울 사이만 되면 온 산과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황량해지고 강물과 공기가 다 얼 때는 하늘과 땅 사이에 스산한 기운이 가득하다.

그곳은 혈기왕성한 남자들의 땅이다.

그런데 남방은 아열대성 습윤 기후에 속하며 1월에도 평균 기온이 섭씨 0도 이상이다. 나무는 대부분 사시사철 푸른 활엽수이고 농작물은 주로 벼와 유채다. 얼음이 얼지 않는 호수에는 마름과 연뿌리가 자라고 당연히 물고기와 새우, 게도 산다. 그리고 바람이 양쪽 기슭에 벼꽃 향기를 몰아오는 계절에는 다정한 여자가 자기 남자에게 간드러지는 노래와 춤 그리고 향기로운 요리를 바친다.

북방에서 수립된 정권이 일단 남방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왜 벼슬아치들이 안일과 향락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왜 북방에서 밀과 몽둥이에 의지해 자란 무장 세력이 천하를 통일했는지도.

회하의 남쪽과 북쪽은 서로 다른 풍경을 갖고 있었다.

십육국과 남북조도 서로 다른 시대였다.

차이는 현저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십육국은 대분열의 시대였고 남북조는 반半통일의 시대였다. 문명적으로 보면 오호는 동진보다 못했고 북조는 남조보다 나았다. 다시 말해 분열된 십육국이 통일된 북위로 변한 뒤, 역사의 발전 과정에 역전 현상이 생겼다. 이민족의 북방은 부단히 진보했지만 한족의 남방은 갈수록 쇠퇴했다. 그래서 통일의 대업은 북방이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15

이 모든 것이 또한 그 남북 분계선과 관련이 있었다.

사실상 동진 시대부터 회하는 지리적 분계선이자 군사적 분계선이었다. 후조와 동진, 전연과 동진, 전진과 동진은 모두 회하를 사이에 두고 통치했다. 회하 남쪽에서 동쪽부터 서쪽으로 지금의 화이인淮陰, 방부蚌埠, 화이난淮南, 신양信陽이 나란히 이루는 선은 거의 동진의 국경선이자 변경 방어의 최전선이었다.

회하가 없었다면 동진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회하로 나뉘어져 통치하지 않았다면 남방과 북방도 없었다.

중국문명의 사상체계에서 본래 남방과 북방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북은 동서와 마찬가지로 ‘중국中國’의 바깥 둘레였을 뿐 서로 대치되는 양쪽 절반이 아니었다. 상, 주부터 진, 한을 거쳐 위, 진에 이르기까지 중국민족은 자신들이 천하의 한가운데에 살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도 중심은 그곳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심은 위진 시대 이전에는 중국이라 불렸고 위진 시대 이후에는 중원中原이라 불렸다.16

중심은 무엇보다도 문화의 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문화가 앞선 화하족華夏族이 중심이고 그 동서남북은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이었다. 통일된 대제국이 탄생된 후에는 중심에 정치적 의미도 생겼다. 즉, 황제의 도읍이 중심이고 그 동서남북은 제국의 군현이었다. 바꿔 말해 진한 이전에는 단지 중국과 사방만 있었다. 진한 양대에는 중앙과 지방이 있었을 뿐이지 회하를 경계로 하는 남방과 북방은 없었다.

한나라의 중앙은 장안과 낙양이었으며 위진에는 낙양만 있었다. 낙양의 지리적 위치는 정확히 진령에서 회하까지의 남북 분계선 중간에서 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옛날에 주공 등이 낙양을 ‘중국’이라 칭한 것은 결코 일리가 없지 않았으며 심지어 혜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동한부터 서진까지 낙양은 3백 년 가까이 황제의 도읍이었으니 당연히 중심이었다.17

그런데 311년 낙양이, 그리고 5년 뒤 장안이 함락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편으로 그 유서 깊은 두 문명 도시는 게르만족에게 로마와 밀라노가 당했던 것처럼 처참하게 유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원의 사족들이 대거 남하해 건강을 중국의 비잔티움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때 중국민족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장안과 낙양을 버리고서 문명을 모두 남쪽으로 옮겨 건강을 중심으로 다시 기운을 내는 한편, 더 남쪽의 푸젠福建, 광둥廣東, 광시廣西, 하이난海南 방향으로 발전하여 마치 알렉산더 대왕 이후 북아프리카의 그리스화처럼 그 지역들의 철저한 한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중원을 차지한 이민족은 하나가 아니라 다섯이었다. 그들 중에는 로마에 비견될 만한 이들이 없었다. 양자강 하류 동남부에 안착한 한족 백성과 사대부들도 그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진 왕조 때까지도 여전히 중원을 수복하기만을 바랐다. 사실 그들은 꼭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뒤에서 이야기할 원인으로 인해 이 첫 번째 선택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선택들도 마찬가지로 가능성이 없었다. 예를 들어 북방의 이민족이 중국을 통일해 전 중국의 이민족화를 실현하는 것도, 반대로 중국에 들어온 다섯 이민족이 건강의 정부를 섬기며 동진 황제를 천자로 삼는 연방 국가를 만든 뒤 중국문명에 녹아들어 죄다 한화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확실히 그것들은 다 잠꼬대나 다름이 없었다.

불가능했던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진령과 회하가 남북을 가로막고 있기도 했고 이민족과 한족의 종합적인 국력과 군사력이 서로 엇비슷한 것도 문제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민족과 한족 모두 중국문명을 높게 평가하는 상태에서 단지 누가 대표권을 갖느냐를 두고 다툰 것이었다. 건강 정부와 한족은 당연히 그 권리를 포기할 리 없었고 북방 이민족 중에서 부견이나 북위 탁발씨 같은 이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중국문명의 정통성을 대표한다고 공언했다.

이민족과 한족은 양쪽 다 자신들이 중화中華이며 큰형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의 중심은 둘로 바뀌어 하나는 남쪽에, 하나는 북쪽에 자리했다.

결과적으로 남북조가 생긴 것이었다.

남북조가 생김으로써 비로소 남방과 북방이 생겼다.

지역적으로 남북으로 나뉜 것은 부적절한 게 없었지만 두 개의 중심은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상, 주부터 한, 위까지 줄곧 중국문명은 먼저 한곳에 모였다가 문화적 분위기가 희박한 주변부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심이 여러 개인 것은 중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중심들이 장안과 낙양처럼 서로 의존하면서도 각기 맡은 바 역할이 뚜렷하지 않다면 말이다. 장안은 동서를 융합했고 낙양은 남북을 소통시켰으며 또 장안은 진취성을 대표했고 냑양은 안정을 대표했다.18

하지만 건강과 호도胡都, 즉 북방 이민족의 수도는 그렇지 않았다.더구나 이민족의 수도는 전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데다 이동이 잦았다.19

그래서 탁발굉의 낙양 천도는 의미가 컸다. 사실상 바로 그곳에서 그는 훗날의 수 문제와 당 태종을 위해 사고의 방향을 바로잡고, 테스트를 행하고, 경험을 축적하고, 인기를 모으고, 또 희망을 남겼다. 비록 훗날의 동위와 서위는 낙양을 버렸고, 또 수 문제와 당 태종도 낙양이 아니라 장안에서 각기 새 제국과 새 문명을 세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장안도 지위가 높았다. 어쨌든 장안이 위치한 관중 지역은 주나라와 진나라와 서한의 발흥지였다. 오호 중의 사대천왕인 흉노의 전조, 갈인의 후조, 저인의 전진, 강족의 후진 중 세 나라가 의외로 장안을 수도로 삼은 것도(전조의 유요, 전진의 부건, 후진의 요장) 아마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오직 수 양제와 무측천만 낙양을 더 좋아했다.20

상대적으로 건강은 한참 뒤졌다.

지금은 난징이라 불리는 건강은 본래 기상이 예사롭지 않았다. 언젠가 제갈량은 건강을 가리켜 “종산鐘山은 용이 서린 듯하고 석두산石頭山은 호랑이가 웅크린 듯하니 여기는 제왕이 머물 곳이로다!”라고 찬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 서진이 오나라를 멸한 후로 그 사이 건강에 세워진 정권들은 모두 단명한 작은 왕조였다.21

북위가 건강의 정권을, 분수를 모른다는 의미로‘참진僭晋’이라고 부를 만했다.

하지만 오나라를 빼더라도 건강은 무려 270년 동안 제왕의 도읍이었다. 시간적으로 냑앙보다 그리 짧지 않았다. 또한 북위는 오히려 낙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안 돼서 내란에 빠지고 말았다. 더구나 남방의 잠재력은 일찍이 삼국시대에 이미 증명된 바 있었다. 북방의 군웅들을 추풍낙엽처럼 떨어뜨린 조조도 끝까지 양자강을 한걸음도 넘지 못했다.

아무래도 건강과 낙양은 역사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는 듯하다. 책임은 오직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실제로 중원의 혼란과 남북의 대치가 2백 7, 80년이나 계속된 것은 남방과 북방에 모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오호십육국시대에는 북방에 골칫거리가 많아 오호가 동진보다 못했고 남북조시대에는 남방에 문제가 더 많아서 북조가 남조를 능가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5-3 장성의 안과 밖

먼저 북방을 살펴보자.

남북의 분계선이 회하였던 것처럼 북방의 경계는 장성長城이었다. 회하는 자연적인 것이었지만 장성은 인위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남북조 이전에 이미 장성은 경계선이 되어 내지內地와 이민족을 구분했다. 그때는 장성 밖이 긴 세월 동안 북北이었으며 장성 안, 회하 이북이 중中으로서 찬란한 문명을 빛낸 중국 혹은 중토中土, 중하中夏였다.22

하夏에 대응되는 것은 이夷, 즉 만이융적蠻夷戎狄으로 호胡라고도 불렸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무례한 호칭 뒤에는 문화적 우월감과 민족적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다만 어느 누구도 미래의 어느 날, 장성 밖의 융적이 내지의 주인이 되고 본래 주인은 동남쪽 구석으로 쫓겨나 도이, 즉 바닷가의 오랑캐라고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성의 안과 밖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런 급격한 변화는 승리자들을 포함해 누구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권력의 진공 상태와 역사의 무대에 직면해 그들은 각자 한 지역을 차지해 왕이 되거나 차례로 등장해 마음껏 혈기와 야성을 발휘하여 중원 땅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오호십육국의 난은 바로 그래서 일어났다.

하지만 유례없는 혼란 속에서도 문명의 힘은 끈질기게 자라났으며 각 민족 백성들은 공통적으로 혼란에서 질서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먼저 후조의 석륵이 소통일을 이뤘고 그 다음에는 전진의 부견이 대통일을 이뤘다. 이 두 번의 통일은 비록 기간이 짧기는 했지만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지시했다. 게다가 갈인의 후조든 저인의 전진이든 선비족의 북위든 모두 스스로 중화라고 칭했다.

이 점은 로마와 달랐다.

한때 세계의 리더였던 서로마 제국은 북위의 풍 태후가 체제 개혁을 시작한 해(서기 476년)에 멸망하여 수많은 조각들로 갈라졌다. 동쪽의 비잔티움 제국만 중국 명나라 경태景泰 연간까지 유지되다가 결국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인에게 정복당했다. 바로 그해에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끝나기도 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사실 전혀 다른 국가, 전혀 다른 문명이었다. 적어도 그 제국의 초기는 알렉산더 제국의 기사회생이나 그리스 전통의 부활과 비슷했다. 여기에 기독교 교회의 사회 혁명은 로마문명의 위대한 부흥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정한 로마문명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는 그날 이미 사멸하고 말았다.

사실상 로마도 먼저 분열되었다가 나중에 멸망했으며 그 분열은 역시 삼국과 남북조와 함께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삼국은 다 한족 정권이었고 북조는 두 언어를 함께 쓰도록 규정했지만 동로마와 서로마는 각기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화권이었다. 그래서 동로마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졌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서로마의 파괴된 땅에서 게르만족에 의해 창조되었다.

중국과 로마는 서로 다른 분열과 변화를 겪었다.

로마에서 황제들의 호칭은 카이사르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카이저는 사실 카이사르였고 러시아의 차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탁발도가 중화의 황제로 자처한 것처럼 자신들이 로마 황제라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23

로마 황제가 아니면 로마문명을 부흥시킬 의무가 없었고 다시 제국을 통일시킬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로마문명은 본래 제2기 문명이었다. 그 전에 일찍이 서아시아문명, 이집트문명, 페르시아문명과 그리스문명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권역 내의 게르만족은 진작 로마화 되기는 했어도 꼭 로마문명에 충성하려 하지는 않고 완전히 독립적으로 살아갔다.

하지만 중화문명은 제1기 문명이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파미르 산맥에 가로막혀 서아시아와 인도의 문명은 중국에 거의 영향을 못 미쳤다. 적어도 위진 시대 전까지는 그랬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중화문명이 유일한 문명이었다. 그래서 장성 밖의 유목 민족에게는 선택지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계속 부락시대에 머무르든가, 장성을 넘어가 중화문명과 하나가 되든가.

오호는 후자를 택했다.

게다가 그들은 진즉에 장성을 넘었었다.

로마는 장성이 없고 큰 길만 있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 것과 장성이 한족과 이민족을 나눈 것은 서로 다른 모델과 방향이었다. 전자는 문명이 다원적일 수도, 새로 건립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설령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후자는 세계의 중심이 오직 하나이고 문명의 형태도 하나여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토대를 굳게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다시 결합되더라도 말이다.

안 그러면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4백 년간 혼란과 분열을 겪었는데도 다시 통일이 되고 통일 후 건설된 것도 역시 중화문명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지 문제는 누가 통일했느냐는 데에 있다.

역사는 선비족 탁발부를 택했다.

이것은 뜬금없는 일처럼 보인다. 선비족은 오호 중에서 문화가 가장 낙후했고 탁발부는 또 선비족의 각 부 중에서도 문화가 가장 낙후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나라도 전국칠웅 중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나라였고 미국도 서양 국가들 중에서 가장 늦게 부상하지 않았던가. 문화의 낙후함은 크게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에 능하고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물며 앞선 곳은 앞선 곳대로 문제가 있었다. 마치 큰 곳은 큰 곳대로 어려운 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로마와 동한이 결국 멸망한 것은 그 두 문명 모두 성숙할 대로 성숙해 발전의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자체 역량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해서 외부의 힘을 빌려 부흥을 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게르만족은 로마에 수혈을 해주지 못하고 그것을 해체했다.24

그 후, 유럽에서는 다채로운 판도가 펼쳐졌다.

하지만 선비족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았다. 상책은 중원을 제패하고 천하를 평정해 통일된 대제국을 설립하는 것이었고, 중책은 한 지역에 안착해 소규모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면 북쪽의 광대한 황무지로 물러나 다른 유목민족처럼 반복적으로 중원을 침략해 노략질하고 돌아가는 것이 하책이었다.

하지만 내지에 들어와 평성에 수도를 정하고 농업민족으로 변신한 뒤로는 세 번째 길을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같은 선비족 동포인 모용부의 전연 등처럼 잠깐 활약하다가 사라지는 지방정권이 될 수도 없었다. 이미 퇴로가 사라진 선비족 탁발부는 중화제국이 되는 목표를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나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소수민족이자 신진세력으로서 북위는 통일을 실현할 수는 있어도 중국을 선비족화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자신을 바꾸고 그 다음에 중국을 바꾸는 것이었다.

천하를 얻으려면 중국화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풍 태후가 철저히 혁신을 밀어붙이고 탁발굉이 대대적인 한화를 수행한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선비족의 문화전통을 바꾸고 일부 계층의 기득권을 해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 세기 가까이 통일되어 있던 북방은 다시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말았다. 동위와 서위도 각기 또 한 차례 쿠데타를 겪고 북제와 북주로 변했다.

북제와 동위 그리고 북주와 서위는 이름만 달랐지 사실은 하나였다. 실권을 장악한 이들이 동위와 북제는 모두 고환 일족이었고 서위와 북제도 모두 우문태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우문태는 한화된 선비족이었으며 고환은 선비화된 한족이었다. 그러면 한화된 선비족과 선비화된 한족 중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까?

선비화된 한족이었다.

하지만 고환이 아니라 양견이었다.

양견은 황하의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가 결국에는 대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하가 불안정한 근본 원인은 민족 관계에 있었다. 고환은 민족 간 모순을 조정하다가 북주에게 멸망당했고 우문태는 한족의 선비화를 추진하다가 수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수나라만 한족을 위주로 한, 한족과 이민족의 상호 변화를 꾀하여 최후의 성공을 거뒀다.25

수당 제국의 백성은 새로운 민족이었다. 그 민족은 흉노, 갈인, 저인, 강족과 선비족의 각 부를 융합하여 새로운 한족이라 불릴 만했다. 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중화문명의 주요 창조자로 나서게 된다.

3, 4백 년에 걸친 민족 간 대혼혈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선비족은 환골탈태했고 북위는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잉태했다. 새로 탄생한 수 제국은 사실상 탁발씨 북위의 업그레이드판이었다. 그들과 당 제국의 창시자는 모두 민족 간 혼혈이 낳은 뛰어난 인재로서 화하 문명의 유전자와 소수민족의 활력을 겸비했다. 그들은 새 역사의 창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남조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자체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 남조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5-4 늪지대

북방의 문제가 민족이었다면 남방의 문제는 계급이었다.

계급투쟁은 남조 정치의 주된 테마였다. 송 문제 유의륭이 즉위 후 1년이 조금 넘자마자 자신을 황제로 추대해준 서선지와 부량(본서 제3장을 참고)을 죽인 것도 계급투쟁의 결과였다. 유의륭을 꼬드겨 그 두 사람을 죽이게 한 자들은 모두 명문 사족이었고 서선지와 부량은 서족이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문벌정치를 끝장낸 송 무제 유유는 주로 황족과 서족에 의지했다. 후자는 조정을 차지했고 전자는 군권과 각 행정 구역을 차지했다. 그 후로 서족이 정무를 담당하고 지방 제후가 황실을 떠받치는 것이 남조의 기본 국책이 되었다. 이는 송, 제, 양, 진의 개국 군주가 모두 서족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족이 이미 부패하고 몰락해 중책을 맡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6

그러면 유의륭은 왜 서선지와 부량을 죽여야 했을까?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서선지와 부량이 유의륭을 맞이해 수도로 들어가 황제로 추대하려 했을 때, 유의륭의 장수들은 대부분 우려를 표시했다. 명문가 출신의 몇 명만 실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서선지와 부량은 다 미천한 서생 출신이고 그런 미꾸라지들은 아예 큰 파도를 일으킬 재주도 없는데 뭐가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의륭은 일이 그렇게 단순치는 않으며 상대가 미천한 서생 출신이라고 꼭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선지와 부량은 이미 대담하게 어린 황제와 왕까지 살해한 자들인데 다시 음모를 안 꾸밀지 어떻게 보증할 수 있겠는가? 요행과 도박에 의지해 상류층에 진입한 소인배는 도덕적 한계 따위는 아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유의륭이 정국을 안정시키자마자 그 두 사람은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남조의 피비린내 나는 계급투쟁도 시작되었다.

그 유혈극의 배후에는 심각한 역사적 배경과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사족 지주와 서족 지주라는 양대 계급의 권력과 노선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황족, 사족, 서족의 삼각연애로도, 그들 간의 ‘삼국연의’로도 표현되었다. 그래서 그 변화 양상이 당연히 무궁무진했다. 상앙의 변법과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논리에 따르면 제국에는 아예 계급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확실히 지주계급과 영주계급 간 투쟁의 산물로서 제국은 본래 계급의 소멸을 지향했다. 그 새로운 제도 아래 기존의 봉건귀족은 자취를 감췄다. 황족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귀하든 천하든, 지혜롭든 어리석든 죄다 제국의 호적에 일률적으로 등록되었다. 훗날 황제가 된 유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들은 황제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사회적 혁명이었다. 그 혁명이 있었기에 천하는 진정으로 통일될 수 있었다. 또 그래서 유방이 공신들을 죽이고, 조착晁錯이 삭번책朔藩策을 쓰고, 무제가 추은推恩의 영을 내렸다( 《이중톈중국사 7권⋅진시황의 천하》와 《이중톈중국사 8권⋅한무의 제국》을 참고). 그 연유를 살펴보면 황제와 평민 사이에 어떤 계급이나 계층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족이 이 제도를 파괴했다.

우선 그들은 관리가 되는 특권을 가졌으며 그 다음으로 세금 면제의 특권도 가졌다. 더 심각했던 것은 서진과 양진 정부가 반포한 점전령占田令과 점객령占客令에 따라 합법적으로 일정 규모의 토지와 일정 수량의 전객佃客, 즉 소작농을 점유한 것이었다. 전객은 독립 호구가 아니어서 납세의 의무가 없고 전적으로 명문세가에 귀속되었다.28

소작농 외에 부곡部曲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전투를 했지만 실제로는 명문세가의 사병이었다. 동한 말엽부터 부곡은 주인을 따라 각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였으며 때때로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과거 정부들이 부곡의 숫자에 제한을 둔 적이 없어서 부곡의 모집은 토호들이 군비를 확충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 되었다.29

그밖에 식객과 문생門生도 있었다. 그들은 출신이 미천한 사인으로서 명문세가에 빌붙어 끼니를 해결했다. 사족이 벼슬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주인이 자사刺史가 되면 그들은 현령縣令이 되었다.

전객, 부곡, 식객, 문생은 전부 종속인이었다.

명문세가와 종속인은 군신관계였다. 지방관이 직접 뽑은 부하 관리도 본래는 종속인이 아닌데도 상관을 군주처럼 여기고 평생토록 따라다니며 가문만 인정하고 나라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관계가 꼭 춘추시대의 가신과 대부 같았다( 《이중톈중국사 4권⋅청춘지》를 참고).31

요컨대 한나라 말과 위진 시대에는 마치 진한 시대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라에 봉건의 이름이 없는데도 봉건의 실질이, 제후의 이름이 없는데도 제후의 실질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일본 학계에서 ‘육조 귀족정치’의 학설이 나올 만도 했다.32

실제로 사족은 세습되는 작위와 봉지가 없어 진정한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 기세는 춘추시대의 대부보다 절대 못하지 않았다. 그 실례 중 하나가 서족과 엄격히 선을 그은 것이었다. 사족이 서족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서족은 황제의 명이 있어도 사족과 한자리에 앉지 못했다. 사족은 근본적으로 서족과 한데 어울리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불합리한 일이었다.

사족과 서족이 제국의 똑같은 백성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사농공상의 구분에서도 사족과 서족은 모두 사인에 속하여 높고 낮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족과 서족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났을 뿐만 아니라 사족 내에서도 귀천의 구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낙양 말을 쓰는 북방 사족은 오어吳語를 쓰는 남방 사족보다 높았고 남하한 북방 사족도 온 순서에 따라 나뉘었다.

이에 계급과 등급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북방에 오호가 있었던 것처럼 남방의 사회계층도 다섯 계층, 즉 사족, 서족, 평민, 종속인, 노예로 나뉘었다.33

그것은 기괴한 구조였다.

기괴한 것이 당연했다. 사족과 서족은 본래 다 지주였다가 두 계급으로 변했고 전객과 부곡은 본래 다 평민이었다가 종속인으로 변했으며 천하에 본래 군주의 신민이 아닌 자가 없었는데 명문 사족만 스스로 체계를 세워 법 밖의 존재가 되었다. 이런 기괴한 현상은 오로지 그런 난세에만 나타날 수 있었다.

기괴한 구조는 불가피하게 변태적인 심리와 기형적인 사회를 낳았다. 나아가 그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엄격한 등급과 계급의 장벽이 심각하게 정권의 안정과 국가의 안정을 위협했다. 통치 집단은 내부적으로 단결이 안 됐으며 사족은 갖가지 특권과 여러 수하들을 동원해 황실과도 능히 겨룰 만했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으니 나라꼴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동진 정권은 꾹 참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마예가 건강에 망명정부를 세웠을 때 모든 자원이 다 사족의 수중에 있고 그 자신은 허울뿐인 천덕꾸러기 사령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실권과 혜택, 심지어 존엄과 체면까지 내주며 명문 사족과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

그런데 황실에 대한 사족의 태도는 함께 다스리는 것일 뿐, 함께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가문의 힘과 명성이 국가 정권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가문을 보전하기 위해 정권을 옹호할 수는 있었지만 정권에 복종하기 위해 가문을 희생하는 일은 결코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까닭에 정권을 포기하거나 황제를 바꾸거나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는 남방이든 북방이든, 한족 정권이든 이민족 정권이든 모두 문벌제도와 사족의 특권을 인정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상태였으니 누가 황제가 되든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34

이런 사족은 그야말로 제국의 암세포였다.

그러나 그 치료 방안을 두고 통치자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동진 정권을 찬탈한 환현과 송나라를 세운 유유는 수술을 주장했고 송 문제와 양 무제는 보수적인 요법으로 생각이 기운 듯하다. 그러다가 유의륭과 소연이 서족을 기용하는 동시에 사족을 우대하면서 비로소 각자 수십 년의 안정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 병은 남조가 등장하기 전인 동진 때 이미 뼛속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그래서 송 문제의 원가의 치든 양 무제의 천감의 치든 모두 죽기 전에 잠깐 기력을 되찾은 정도에 불과했고 그 후에는 더더욱 백약이 무효했다. 남량이 망하기 전, 국토는 줄어들 대로 줄어들어 있었고 사회의 기풍도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으며 사족의 자제들은 하나같이 쓸모가 없었다. 후경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반격할 힘도 스스로를 구할 방안도 갖지 못한 채 화려한 차림으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안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양 무제였다. 그는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모든 일이 자기 뜻과 어긋났고, 종실을 우대하고도 버림을 받았고, 사족과 서족의 조화를 꾀했는데도 적대관계를 해소하지 못했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도 도덕이 땅에 떨어졌고, 신앙을 세우고도 넋이 나가버렸다. 그는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칠수록 더 빨리 재앙에 가까워졌다. 다만 그 늪에는 그 혼자만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민족과 사회가 모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늪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출로는 또 어디에 있었을까?

5-5 조합의 힘

양 무제가 동태사에서 두 번째로 사신을 한 해(서기 529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칙법휘찬勅法彙贊》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도 불린다.

그 후 16인의 위원회가 또 《학설휘찬》,《법학제요》, 《신칙법휘찬》을 완성하였고 그중 《학설휘찬》은 ‘로마법의 성전聖殿’이라 불리며 《신칙법휘찬》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 이 4가지 법전은 모두 합쳐 《로마법대전》이라 불리고 서양 법률의 어머니로 공인되어 왔다.35

이 장대하고 중요한 사업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 문명에 크게 공헌하였고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가장 위대한 입법자’라 불린다. 그는 성 소피아 성당을 짓는 등 다른 유산도 남겼고 따로 ‘대제’의 칭호를 얻기도 했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불후의 업적은 역시 《로마법대전》이다.36

그러면 그는 어떤 황제였을까?

유유 등과 마찬가지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를 후계자로 받아들인 전임 황제는 심지어 문맹이어서 목각 도장으로 서명을 대신했다. 또한 그의 황후인 테오도라도 곡마단의 비천한 문지기이자 곰 조련사였던 남자의 딸로서 결혼 전의 행적이 매우 의심스러워 상류사회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국모가 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내력이 불분명한 그 여자에게 흠뻑 빠졌다. 그녀가 일찍이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졌을지도 모르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황에게 관련 법률을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서로 비슷한 집안끼리 결혼해야 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단지 관습에 불과했지만, 동로마 제국에서는 원로원 의원이 하층계급의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이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후 어렵고 힘든 세월 속에서도 그녀는 굳건히 남편 곁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예를 들어 후경의 난 같은 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주장하는 자들을 단 한 마디 말로 제압했다.

“제왕의 권력은 가장 고귀한 수의壽衣이니, 통치자가 도망을 치는 것은 죽느니만 못합니다!”

이 말을 듣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용기를 되찾았다.

폭동을 진압하고 1년 뒤, 그는 기세등등하게 영토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서기 533년, 반달 왕국을 멸했고 535년에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했으며 536년에는 로마를 수복했다. 그리고 554년에는 동고트 왕국을 멸하는 동시에 서고트족이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 동남부 등의 지역들을 손에 넣었다. 그럼으로써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다.37

물론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호수였다.

이로써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의 소망을 성취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은 그에게 테오도라뿐만 아니라 넉넉한 수명도 선사했다. 그는 83세까지 살았고 38년간 통치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예이다. 86세까지 살고 48년간 통치한 양 무제와 비교해도 조금 모자랄 뿐이다.38

심지어 두 사람의 시대적 배경과 지향했던 목표도 대단히 유사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의 꿈을, 양 무제는 중화의 꿈을 꾸었다. 로마와 중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그들은 또 각자 종교의 힘을 빌렸다. 단지 양 무제는 부처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상은 하나의 국가(로마 제국), 하나의 법전( 《로마법대전》), 하나의 종교(기독교)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인들의 양 무제였다.

물론 그들은 모두 종교가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정교합일의 이슬람국가는 더 나중에 출현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법전을 편찬했고 양 무제는 불교를 크게 일으키면서 예악도 정비했다.39

그렇다. 한 사람은 법치를, 한 사람은 예치를 중시했다.

예치와 법치는 전통 중국과 서양 세계의 중대한 차이점이며 그 성패와 득실은 한 마디로 다 말하기 어렵다. 다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실현한 로마의 꿈은 금세 무너져버렸고 양 무제는 생전에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양 무제의 이상은 사실 중국 북방에서 실현되었다. 예치에 의지해 성공을 거둔 그 인물도 역시 ‘무제’였는데, 바로 북주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이었다.

이것은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당시 정립鼎立했던 진, 북제, 북주 중에서 북주는 본래 가장 약한 나라였는데도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은 일정 정도 북주 무제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어쨌든 재차 분열되었던 북방이 그로 인해 다시 통일되었고 새 제국의 토대도 사실 그가 생전에 닦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천하통일이라는 평생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물론 북주의 창시자 우문태가 존숭한 주례周禮의 치국 이념과, 그가 시행한 인의,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양禮讓, 염평廉平, 검약儉約 같은 유가 윤리도 전부 계승되었다. 바꿔 말해 천하를 예로 다스린다는 구상이 북주 무제 때 훌륭하게 실현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주 무제는 우문태의 후계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고 수 문제는 그의 정치적 유훈의 실행자에 지나지 않았다.41

북주 무제가 실현한 것은 모두 지난날 양 무제가 꿈꾸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양 무제는 실패하고 북주 무제는 성공한 것일까?

북주 무제는 근본을 틀어쥐고 올바른 경로를 찾았다.

근본은 바로 민심이었으며 민심은 응집이 필요했다. 사실 4백 년간의 혼란은 국가를 분열시키는 동시에 민심을 흩어지게 했다. 이민족과 한족의 민족 갈등, 서족과 사족의 계급투쟁 그리고 불교와 도교의 의견 대립이 빚어졌다. 천하를 평정하려면 먼저 그들을 아울러야 했다.

그 일을 하려면 힘이 필요했고 기치도 필요했다.

힘은 통치자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민간에는 그런 힘이 없었다. 그리고 기치는 어떤 종교일 수 없었다. 종교는 중국의 전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통일된 중화의 꿈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본토의 도교는 역부족이었다. 북위의 태무제가 그것을 증명했다. 외래 종교인 불교도 적절치 않았다. 이것은 남조의 양 무제가 증명했다.

유일한 방법은 유, 불, 도의 조합이었다.

양 무제도 그렇게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공자와 노자를 붓다의 제자로 만드는 것, 즉 삼교三敎의 근원을 불교에 두는 것이었다. 북주 무제도 삼교를 함께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우선순위를 두었다. 유학이 먼저이고 도교는 다음이며 불교가 마지막이었다. 한때는 도교를 최상위에 두려고 한 적도 있지만 말이다.42

애석하게도 삼교는 모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세속 지주와 승려 지주 사이의 모순이 나날이 격화되었고 무엇보다도 부국강병의 필요로 인해 이제는 승려들 중에서 병사를 뽑고 사원 소유의 토지를 취해야만 했다.

북주 무제는 논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북주가 북제를 멸하기 3년 전인 서기 574년, 북주 무제는 조칙을 내려 불교와 도교를 동시에 금지했다. 우상과 경전을 부수고 불태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와 도사를 모두 환속시키라고 명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 불교사상 두 번째 대법난이다.44

비무장 상태의 승려들은 당연히 항거하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북주 무제가, 점령한 북제에서 멸불령滅佛令을 내렸을 때 대전에서 훈시를 듣던 5백 명의 승려가 전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한 승려가 돌연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황권에 의지해 불문을 파멸시키면 폐하는 아비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그것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그곳은 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북주 무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 승려를 똑바로 쳐다보며 서슴없이 답했다.

“백성들이 인간세상의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짐은 지옥의 고통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실로 대단한 기백이었다.

사실 공권력을 이용해 종교를 간섭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범상치 않은 의미가 있었다. 북주 정권은 본래 선비족의 색채가 짙어서 많은 한족 장수들이 심지어 성까지 선비족의 것으로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북주 무제는 갓 입은 황제의 새 용포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짐은 오호가 아닌데 왜 부처를 믿어야 하는가?”46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이제는 이미 오호는 없고 중화만 있었다. 훗날의 역사는 민족의 융합이 한족 위주여야 했고 한족과 이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유교가 주가 되고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받아들이는 형태가 돼야 했다. 이것이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

북주 무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틀리지는 않았다. 사실 태무제가 도교를 신봉한 것도, 양 무제가 불문에 귀의한 것도, 그리고 북주 무제가 유학을 추종한 것도 모두 미래에 삼교가 합류해 장기간 공존하게 되는 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 세 황제는 모두 열린 마음과 긴 안목을 가진 채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괘념치 않았고 심지어 민족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했다. 그래서 수 문제 양견이 다시 한족 성으로 돌아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을 때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새 문명이 도래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장차 위대한 세계적 문명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중텐중국사 12 남북조 > 번역: 김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