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 국도國都
도시의 경관을 형성하는 것은 인공의 건조물만이 아니다. 자연도 또한 아울러서 도시의 경관을 형성한다. 도시 속의 하천이나 연못, 그리고 정원, 언덕, 신사 등 경관은 온갖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야말로 도시의 경관 가운데 최고의 점묘(點描)다. 도시를 만들고 경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활동하는 도시의 경관을 말할 때 도시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수도이다.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는 역시 수도이다. 얼마나 많은 첨단의 현상이 수도에서 시작되었던 것일까? 런던, 파리, 로마, 그리고 도쿄. 이것은 송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최첨단의 풍속을 보여주는 곳이다. 당시의 도시 경관과 풍속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는 우리도 수도를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송대의 수도는 카이펑과 항저우 두 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화북 평원에서 북송의 수도로서, 다른 하나는 강남의 수향에서 남송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이것은 송이 금의 침입으로 남북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이 두 도시가 형제 관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이한 지역에 성립되었던 매우 대조적인 수도였다.
우리가 송대의 도시에 몸을 위탁하기에 앞서 우선 이들 도시의 유래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북송의 수도인 카이펑은 송나라에 있어서는 잃어버린 수도이다. 남송의 수도인 항저우는 가짜 수도였다. 항저우는 화북에서 쫓겨나 남천(南遷)한 송에게 있어서 북으로 돌아갈 때까지 가짜 수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 행재(行在) 또는 린안(臨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두 수도 속에 우리가 몸을 맡길 거리는 북송 말의 카이펑(開封)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도시문화가 난숙했다는 것, 또 하나는 북송 말이라면 남송과도 가까워서 남송의 수도 항저우의 풍속에서도 언급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카이펑의 건설
앞서 서술한 대로, 카이펑은 강남에서 출발한 대운하가 황허(黃河)에 접한 곳, 화북의 대평원에서 발전한 도시였다. 이에 비해서 린안(臨安)은 강남의 풍부한 수원을 바탕으로 발전한 수생 도시였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두 도시는 명확하게 달라 [그] 의미도 다르다. 똑같은 제국의 수도이면서 두 도시는 도저히 형제라고는 생각지 않을 정도로 성격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도시의 구조, 거주민의 기질, 풍경, 도시 주변의 경관, 그리고 지배자. 이 모든 것들이 달랐다. 송대의 카이펑을 방문하기 전에, 이 두 도시의 성격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카이펑은 오래된 도시이다. 황허 남방의 대평원의 교통의 요충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황허의 범람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 카이펑이 이후 발전의 기반을 확립한 것은 수(隋) 이래로 대운하를 관통하고 발전시킨 것에 힘입은 것이다. 수를 계승한 당대(唐代)에는 강남의 개발이 진척되어 제국의 경제를 떠받치게 되면서, 그 의미가 한층 강화되었다.
강남을 출발한 곡물은 부지런히 반년에 걸쳐 대운하를 통해 화북에 운반되었다. 이 화물을 뤄양(洛陽), 창안(長安)에 운반하는 데에는 대운하에서 황허로 옮겨 실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점이 카이펑이었다. 그렇게 카이펑이 가진 경제적 중요성이 증대하여 도시 발전의 기반이 여기에서 확립되었다. 동란이 이어지면서 막힌 적도 있었던 대운하였지만, 이 기본적인 역할은 오래 이어졌다.
당을 멸한 오대의 최초의 왕조인 후량(後梁)은 이 지역의 경제성에 주목해 마침내 이곳 볜량(汴梁) 카이펑(開封)에 수도를 두었다. 이후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의 역대 왕조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성을 중시한 제국의 수도가 탄생한 것이다. 송이 이곳에 도읍했던 것은 그 마무리였다.
카이펑의 성벽은 두텁고 견고하다. 어째서일까? 카이펑은 대평원에 있기 때문에 수비에 불리하다. 게다가 황허는 항상 카이펑 일대에서 범람했다. 그렇기에 카이펑은 두터운 방벽에 둘러싸여 도시로서의 경관을 완성했던 것이다.
카이펑은 삼중의 성벽을 가졌다. 안으로부터 궁성, 내성, 외성의 세 가지였다. 각각의 크기는 궁성의 주위가 5리, 내성이 20리 150보, 외성이 50리 165보였다. 환산하면 궁성의 주위는 약 2.76킬로미터이고, 내성의 주위는 약 11.29킬로미터, 외성의 주위는 약 27.9킬로미터가 된다. 이것은 기록으로 남은 숫자를 환산한 것이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외성의 주위는 약 30킬로미터라고 한다.
카이펑은 장소의 성격상 황허의 홍수를 정면에서 받아야 한다. 황허의 굴곡점(屈曲點)에 있었기 때문에 범람을 되풀이해온 황허의 피해를 받아왔던 것이다. 현재의 카이펑은 청대의 것으로, 명의 도시조차 두터운 흙 아래 있다. 예전에 언덕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송대의 탑이 지금은 평지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범람의 무시무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발굴 보고 역시 이미 약간의 검증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어떻든지 간에 외성의 주위가 약 27.9킬로미터 또는 약 30킬로미터라는 것은 거대한 규모를 가진 도성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하지만, 제국의 수도로서 생각한다면, 당의 창안(長安)보다는 작다.
창안의 외성 주위는 35.7킬로미터에 이른다. 과연 세계적인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카이펑이 극단적으로 빈약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대한 수도를 만든 중국의 수도이다. 인구가 1억에 달했던 제국의 수도로서는 역시 작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작은 것은 궁성이다. 창안성의 경우, 황제가 있는 궁성과 정무를 보는 황성은 둘로 나뉘어 있기는 했지만 인접해 있었다. 그 주위는 실제로는 10.8킬로미터에 달했다. 이에 비해서 카이펑의 궁성은 4분의 1 남짓 정도로 작았다. 특히 궁성에 관한 한, 카이펑이 제국으로서 동아시아에 군림했던 당의 수도 창안과 비교할 때, 얼마나 권위와 무게가 떨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성벽은 창안보다 거대했다. 북송 중엽에 개수(改修)한 경관을 보면, 창안이 높이 1장 8척, 약 5.3미터였던 데 비해서, 높이가 4장이라고 했으니 12미터가 넘는다. 창안의 배 이상이다. 동시대의 다른 주성(州城)의 성벽과 비교해도 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성벽이 높아지면, 당연히 두께도 두터워진다. 두께는 5장 9척이라고 했기에 15미터가 넘는다. 카이펑도 성 밖에서 성 안의 풍경을 엿볼 수 없는 구조였다.
성벽이 두터운 것은 홍수의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평원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방어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축성 기술의 진보를 들 수 있다. 통상 두 배의 강도를 자랑했다고 하는 성벽이야말로 카이펑의 생명선이었던 것이다.
카이펑이 창안보다 자그마했다고는 해도 성벽의 높이로나 두께로나 당당한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엿볼 수 있다. 서민이 힘을 갖고 밝고 느긋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송 왕조의 수도 카이펑은 역시 거만한 경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압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