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 총괄 및 비평 5-2

제5장 총괄 및 비평

2. 《홍루몽》의 해석 방법에 대한 비평

이상 몇 장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근대의 많은 《홍루몽》 연구자들이 ‘작자 결정론’을 신봉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청나라 말엽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대다수 색은파 연구자들과 1921년 이후의 신홍학 연구자들, 1954년 이후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그들은 이미 작자의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었음)이 포괄된다. 이러한 ‘작자 결정론’에 입각한 해석 개념의 영향 아래에서는 만약 작자의 신분과 입장, 심리 등등이 비교적 뚜렷하다면 작품의 해석 역시 의견 일치에 도달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하지만 사실은 결코 이처럼 이상적이지 않다. 제2장에서 지적했듯이 《홍루몽》이 나온 뒤로 100여 년이 지났지만 작자가 누구인지는 아주 불명확하다. 이른바 ‘불명확’하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정위원(程偉元)처럼 《홍루몽》의 작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둘째는 명의(明義)의 〈제홍루몽소인(題紅樓夢小引)〉이나 원매(袁枚)의 《수원시화》, 또는 다른 전설을 따라 작자가 조설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째 상황에서도 이들 독자들의 조설근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조연정(曹楝亭)을 조연정(曹練亭)으로 오해하거나 조설근을 조인(曹寅)의 아들로 여기기도 하고, 조설근이 ‘한군(漢軍) 출신의 거인(擧人)’이라거나 ‘공생(貢生)’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설근이 상주(常州) 출신의 어느 효렴(孝廉)이라고 하기도 한다. (제2장 참조.) 중국 대륙에서는 1963년에 조설근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지만, 그 뒤에도 “조설근이 작자”라는 주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작자의 신분이 불명확한 상황 아래서 논자가 ‘작자의 심리적 재건’을 진행하려면 종종 우선적으로 작자는 어떤 사람이라는 ‘전제(presupposition)’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홍루몽》이 만주족에 대한 반대 의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첫 번째 전제는 ‘작자가 명나라의 유민’이라는 것이며, 여기에서 출발하여 ‘심리적 재건’을 진행함으로써 두 번째 전제를 만들어 낸다. 즉 명나라 유민은 반드시 청나라에 반대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차이위앤페이는 ‘원작자’가 누구라고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감히 “작자는 (한족의) 민족주의를 대단히 진지하게 지니고 있었으며”, “작자는 정통설을 깊이 신뢰했다.”고 단정하면서, 조설근이 도홍헌에서 수정한 것 《홍루몽》은 ‘명나라를 애도하는 뜻’이라고 했다. 또한 덩쾅옌(鄧狂言)은 작자가 오매촌(吳梅村)이고 수정한 사람은 조설근이라고 가정했다. 첫 번째 전제와 차이위앤페이 사이의 차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전제제와 추론의 논리적 맥락은 차이위앤페이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논의에서 조설근의 신분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역시 ‘유민의 마음’(덩쾅옌의 말에 따르면)이 있고 또한 거기에서 ‘명나라를 애도’(차이위앤페이의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 방식은 해석학에서 ‘전유(appropriation)’라고 하는 개념과 대단히 유사하다. 폴 리꾀르(Paul Ricoeur)는 《해석학과 인문과학(Hermeneutics and Human Scienc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유’는 독일어 ‘Aneignung’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Aneingen은 처음에 ‘이질적’이었던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는 뜻이다.’Appropriation’ is my translation of the German term ‘Aneignung’. Aneignen means to make one’s own what was initially ‘alien’.

차이위앤페이와 덩쾅옌은 모두 ‘조설근’을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한 인물로 바꾸어 버렸다. 만주족에 대한 반대를 주장한 후세의 색은파 연구자들은 이런 ‘전유’의 해석 전략을 더욱 교묘하고 능숙하게 구사했다. 예를 들어서 서우펑페이(壽鵬飛)는 조설근을 상주 출신의 어느 효렴 조일사(曹一士)와 같다고 여기려는 생각이 있었고(하지만 그도 감히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제2장 참조), 두스졔(杜世傑)는 양자의 합일을 강행하면서 그 효렴이 또 “청나라에 반대하는 남방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조설근’은 ‘청나라에 반대하는 소설’을 쓸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색은파 연구자인 리즈치(李知其)의 ‘조설근’이라는 이름에 대한 해석도 지극히 ‘전유’의 혐의가 있다. 그는 ‘해운(諧韻)의 독법’을 이용하여 “조설근은 울부짖으며 한을 호소하는 사람”이며, 그가 통곡하는 이유는 “국가와 가문의 멸망과 몰락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리즈치의 펜 아래에서 조설근은 청나라에 반대하는 ‘심리’를 갖게 되었고, 비로소 《홍루몽》에 대한 리즈치의 해석과 배합되었다. (차이위앤페이부터 리즈치까지의 논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2장을 참조할 것.) 두스졔와 리즈치의 해석은 다르지만 사용한 수단은 똑같이 ‘전유’이다. 즉 ‘조설근’을 색은파에 유리한 인물로 바꿔 버리는 것이다.

‘명나라 유민→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이라는 이런 전제는 단지 ‘심리적 재건’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작자의 심리를 ‘전유’하는 과정은 결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추측하더라도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만 있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행동’이 없으니 어떻게 작자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바꿔 말해서 색은파의 해석 기제 안에는 그저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만 있을 뿐 구체적인 행동은 없으니,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이란 것은 여전히 근거 없는 얘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두 번째 전제인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 위에 또 세 번째 전제 즉,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이 필연적으로 ‘청나라에 반대하는 행동’(예를 들어서 ‘기의[起義]’랄지 ‘선전’과 같은)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홍루몽》은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을 언어에 담은(verbalization) 결과라는 전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네 번째 전제가 만들어졌다. 즉 청나라 황실의 고압적인 정책 아래에서 만주족에 반대하는 소설을 쓰려면 필연적으로 어떤 창작 기교, 《홍루몽》이 만주족에 반대하는 뜻이 담긴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색은파 연구자들이 말하는 ‘은어’ 또는 ‘수수께끼’라는 기교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초기의 색은파 연구자인 왕멍롼(王夢阮)이나 선핑안(沈甁庵), 차이위앤페이부터 후세의 판중궤이와 두스졔, 리즈치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그렇게 주장했다. 이러한 색은파의 입론 방법은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이 〈언어와 시학(Language and Poetics)〉에서 제시한 소통 형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야콥슨은 소통의 요소로서 발신자(addresser)와 수신자(addressee), 배경(context), 정보(message), 접촉(contact), 기호(code)라는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이 여섯 가지 요소는 기호학에서 ‘표의(signification) 과정’의 여섯 가지 요소라고 부른다. 색은파의 추리 논리에 따르면 ‘유민 작자’는 ‘은어’ 또는 ‘수수께끼’가 되기 때문에 수신자로서 색은파 연구자가 기호 해독(decode)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발신자와 수신자가 소통 과정의 배경과 정보, 기호에 대해 반드시 똑같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발신자가 만주족에 반대한다는 배경 아래에서 기호 해독 작업을 한다면(왜냐하면 《홍루몽》은 만주족에 반대하는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배경과 기호, 정보)은 모두 수신자(색은파 연구자)가 일방적으로 정한 가설로서, 발신자가 반드시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이런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인 ‘작자는 명나라 유민’이라는 주장도 실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에 수반되는 세 가지 전제들(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 청나라에 반대하는 행동, 은어 제작) 역시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색은파 연구자들의 ‘심리적 재건’은 ‘작자의 민족 심리’와 ‘창작 심리’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작자를 ‘전유’한 혐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작자 심리의 재건’은 본래 작자를 ‘객관적’ 연구 대상으로 삼지만, 실제로 색은파 연구자들의 논술에서 작자는 오히려 전유의 대상(object of appropriation)이 되어 버렸다.

중화민국 초기의 색은파는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홍학 연구자들은 조설근을 작자로 확신했다. 이렇게 해서 ‘작자 심리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대단히 명확해졌다. (왜냐하면 조설근은 하나이고 명나라 유민은 수만 명이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조설근의 사정 가운데 전해 내려온 것은 많지 않다. 신홍학이 처음 흥기했을 때 위핑보는 이미 “조설근의 사적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아주 적다.”고 했다. 그는 구졔깡에게 보낸 평지(1921년 5월 21일)에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표현했다. 1963년에 중국 대륙에서 조설근 기념회가 열렸을 때 어느 학자는 “역사에서 조설근 본인에 관한 자료는 사실 더없이 작다.”고 했다. 앞서 위핑보가 그 말을 한 때로부터 50여 년 뒤에 마오궈야오(毛國瑤)도 그렇게 얘기했다. 위잉스는 “조설근 본인에 대해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아주 빈곤한 상태이며, 심지어 그의 생졸년조차도 아직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단계에 있다.”고 했다. (이 말은 1976년 11월 10일에 한 것임.) 이런 상황은 심지어 조설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조차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1978년 7월에 우언위(吳恩裕)는 “조설근의 전기에 관련된 자료는 대단히 결핍된 상태”라고 했다. 1979년 허베이(河北) 대학교 중문과의 학술보고회에서 저우루창도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다시 10여 년이 지난 1991년 4월 7일에 조설근 연구의 거장인 펑치용(馮其庸)은 여전히 “(조설근은) 반쪽짜리 책을 남긴 것 외에 기타의 각종 자료는 거의 완전히 공백에 가깝다.”고 개탄했다. 또 10여 년이 지난 2004년에 선즈쥔(沈治鈞)은 “지금 이 분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했다. 2006년에 량궤이즈는 “조설근 본인에 관한 역사 자료는 대단히 결핍되어 있다.”고 했다. 결국 각종 학술적 배경을 지닌 학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양 학자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폴란드의 철학자 로만 인가르덴(Roman Ingarden: 1893~1970)은 작품의 구조는 다른 층차(stratum)를 통해 구성되는데, 그 가운데는 많은 미정처(places of indeterminacy)가 있기 때문에 독자가 읽으면서 채워 넣어 구체화(concretization)해야 한다고 했다. 그 개념을 빌려 조설근에 대해 논의하자면, 조설근의 사상과 입장 등등에는 여전히 채워 넣어야 할 많은 ‘미정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작자의 영상과 입장, 심리에는 여전히 많은 ‘구체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설근은 기인(旗人)이기 때문에 후스나 위핑보, 저우루창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만주족에 반대했을 가능성이 없다. 우언위와 위잉스는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심리적 재건’에 따르면 조설근은 만주족에 반대하고 청 왕조를 비판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위잉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본서의 제2장을 참조할 것. 우언위의 주장에 대해서는 본서의 제3장에서 ‘방관의 개명’ 부분을 참조할 것. 저우루창의 주장은 앞뒤로 변화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2장을 참조할 것.)

다른 한 편,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 역시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하면서 색은파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지만, 그들의 ‘심리적 재건’ 수단은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과 유사한 데가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작자의 ‘세계관’을 초월하는 데에 힘쓰면서 또 한 편에서는 ‘조설근’을 ‘전유’한다. (본서의 제2장에서 이 점을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간단한 보충 설명을 하겠다.) 그들은 《홍루몽》에 반영된 ‘사회적 모순’과 ‘반(反)봉건’적인 경향과 ‘계급투쟁’을 극력 강조한다. 그들의 견해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근본적인 모순과 근본 문제는 단지 봉건지주계급과 농민 사이의 모순밖에 없는데”, 《홍루몽》은 현실주의 소설로서 바로 이런 모순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양인안(楊蔭安)은 이렇게 주장했다.

(조설근은) 자기도 모르게 혹은 완전히 자각적으로 ‘시대의 동력이 되는 어떤 정신’이 되었으며,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기의를 준비하고 있던 농민계급의 혁명정신에 물들어 격동했던 것이다. ……바로 농민 군중의 혁명 정서가 조설근의 심원한 사회 비판의 주요 동력을 구성했다.

류다졔(劉大傑) 역시 작품에 담긴 농민과 지주 사이의 갈등을 무척 중시하면서 《홍루몽》이 “지주 가정의 음란하고 부패한 삶”(이것이 바로 《홍루몽》 연구 역사에서 ‘농민설’이라고 하는 것임)을 ‘심각’하게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인 두스졔는 조설근이 ‘반청(反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고, ‘농민설’을 주장한 류다졔 역시 똑같은 ‘전유’의 수단을 운용하여 ‘조설근’이 “농민의 삶과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북경 교외에 거주한 적이 있으니 농민의 삶에 가까이 다가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당대(當代) 농민 대중의 계급투쟁이 조설근에게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 데에는 조설근을 ‘전유’한 혐의가 있다. 시험 삼아 물어 보자. 만약 조설근이 ‘농민 대중의 혁명 정서’를 갖고 있었다면 그는 왜 ‘황건(黃巾)’과 ‘적미(赤眉)’――‘농민설’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황건과 적미는 ‘농민 기의’임――를 ‘유적(流賊)’이라고 불렀겠는가? 왜 농민 기의를 진압한 항왕(恒王)과 임사낭(林四娘)에 대해 시를 지어 칭송했겠는가? (《홍루몽》 제78회 참조.) 이 부분에 대해 중국 대륙의 연구자들은 어느 정도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의 학설 가운데는 또 ‘시민설’이 있다. ‘시민설’도 ‘농민설’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갈등’과 ‘투쟁’을 중시하지만, 단지 투쟁하는 ‘계급’이 농민 계급이 아니라 시민 계급이라는 것이다. ‘시민설’은 《홍루몽》이 “신흥 상공업 종사 시민 계층과 봉건 통치세력 사이의 갈등”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제기한 학자들도 작자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들의 주장을 공고히 다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구위(谷峪)는 이렇게 주장했다.

조설근은 바로 이런 사상(신흥 시민의 사상을 가리킴)의 영향 아래, 현실 사회에 대해 자신이 체험하고 관찰한 몇 가지 삶의 견해를 근거로 《홍루몽》을 썼다.

덩퉈(鄧拓)는 이렇게 주장했다.

조설근은 귀족 관료 가정 출신이면서 신흥 시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결국 어떤 입장에서 봉건에 반대했는가? 기본적으로 그는 신흥 시민의 집장에서 봉건에 반대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민설’을 주장하는 여타의 논자와 평론가들도(장다이[張戴], 양샹퀘이[楊向奎], 훠송린[霍松林], 리시판[李希凡], 란링[藍翎] 등을 포함해서) ‘조설근’이 새로운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그들의 논의를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다. 결국 ‘반만설’에서 농민설, 시민설에 이르기까지 논술의 책략은 전혀 차이가 없다. 그들은 그저 조설근이 ‘청나라에 반대하는 / 농민 / 시민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즉 ‘조설근’이라는 옛 사람을 자신들의 쓸모를 위해 수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일찍이 어느 학자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조설근에 대한 평가가 부단히 높아짐에 따라 조설근은 갈수록 신성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조설근 저작권의 옹호에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다르다. 즉, 신성화는 작자의 능력이 범속한 것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논자는 조설근이 “놀라운 천재로서…… 고금에 보기 드문 기묘한 ‘복합 구성체’이다.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시인, 위대한 사곡(詞曲) 작가, 위대한 문호(文豪), 위대한 미학자, 위대한 사회학자, 위대한 심리학자, 위대한 민속학자, 위대한 전장(典章)과 제도의 전문가, 위대한 정원 건축학자, 위대한 복식 및 진열 전문가,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의학자……. 그의 학식은 지극이 넓고 소양은 지극이 높고 심원하다. 그는 분명 기재(奇才)요 절재(絶才)”였다고 칭송했다. 결국 “조설근의 비할 데 없이 숭고함을 극진하게 얘기한 것”이다. 이런 논의들은 보는 이들의 질시를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조설근에 대한 논자의 진심 어린 숭배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조설근이 신성화된 ‘효과’는 그를 거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만들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갖게 함으로써 대중들이 쉽게 경복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해석 활동에서 조설근의 ‘역할[角色]’ 또한 지극한 ‘묘용’을 갖게 되었다. 해석자의 펜 아래에서 조설근은 만주족에 반대하는 저서를 쓴 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 있었고, (‘반봉건’에 참여함으로써) 계급투쟁의 선봉이 될 수도 있었으며, ‘현실주의자이자 유물론자’도 될 수 있으며, 또 폭군에 대항한 용감한 사람도 될 수 있었다. 이런 신성화가 해석 활동에서 미치는 영향은 작자의 권위와 명망이 갑자기 치솟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자의 권위와 명망은 각종 논술에서 빌려 기대려는 바가 된다. 그 결과 조설근은 곧 하나의 논술 공간이 되며, 적용성이 극대화된다. 각양각색의 해석자들은 모두 이 ‘공간’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최근의 예는 류신우(劉心武)의 ‘비밀 폭로[揭秘]’이다. 류신우는 이렇게 인정한다.

조설근이 《홍루몽》을 쓸 때에는 이 삶의 원형이 그로 하여금 회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응당 그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진가경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개괄하자면 진가경의 원형은 폐위된 태자 윤잉(胤礽)의 딸이자 그의 큰아들 홍석(弘晳)의 여동생이다.

이야말로 다른 학자들이 논의한 것처럼, 류신우가 제시한 이 ‘삶의 원형’은 역사에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심지어 그 원형조차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류신우가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을 때 ‘생각’한 것은 조설근인가 아니면 류신우 자신인가? 혹시 실제로는 류신우가 조설근으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억지로 ‘시킨’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종합하자면 ‘작자 결정론’의 영향 아래 수많은 연구자들이 ‘작자 심리의 재건’을 추진해 왔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작자의 의의’는 해석을 제약하는 어떤 요소로서, 연구자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른바 ‘작자의 심리’ 자체는 해석자가 구축한 것(interpreter’s constructions)에 지나지 않는다. 해석의 영역에서 ‘작자’는 (‘저작권’과 ‘저작 심리’의 측면에서) ‘우유부단한’ 인물이어서 해석 행위에 제약을 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이용해 먹을 만한 인물로 전락해 버린다.

이상은 조설근의 ‘사상적 공백’과 ‘심리적 공백’을 이용하여 논자 자신의 해석을 설명한 예들이다. ‘공백을 이용하는’ 이런 해석 수단은 ‘역사의 공백’과 같은 다른 분야에도 이용될 수 있다. 콩샹셴(孔祥賢)은 《홍루몽》이 여사낭(呂四娘)이 옹정제를 칼로 암살한 일을 은밀히 묘사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황제가 암살된 것은 정식 역사에 기재할 수 없기 때문에 조부(曹頫)가 제공하는 정보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정식 역사의 공백’이 가지는 묘용으로서 반박이 어렵다.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의문이 제기되더라도 그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있지. 하지만 종이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야. 있어. 다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뿐이지.” 또 훠궈링(霍國玲) 등은 ‘조설근의 연인 축향옥(竺香玉)’이 옹정제에게 빼앗겼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여기서 관건이 되는 인물인 ‘축향옥’을 역사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축향옥은 역사 서적에서 말살된 후 남은 공백”이라고 주장했다. 또 류신우는 조설근의 가문이 건륭제 때의 ‘홍석(弘晳)의 반역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서 《홍루몽》에서 이 사건을 은밀히 썼다고 하면서, “건륭제가 이 사건을 박멸한 후 관련 문건들을 없애 버림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했고, “이 일의 처리를 끝낸 후 분명 건륭제가 관련된 문건들을 없애 버리라는 뜻을 내비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상 세 논자의 수단은 모두 하나에서 나온 것처럼 비슷하다. 논자는 역사적 증거를 들 필요가 없으니 상상력을 발휘하여 공백을 메울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해석’을 엮어내게 된 것이다. 이런 해석 방법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거로 삼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홍루몽》의 잃어버린 원고를 찾는 연구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은 텍스트와 지연재 비평을 근거로 삼았지만 ‘공백을 메우는’ 성격 때문에 그들의 탐색 결과도 온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 또 증거 부족으로 인해 해석자는 그저 ‘깨달음’으로 보충하는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은 비록 ‘오묘한 해석’을 제사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오묘한 해석이란 너무나 호방하고 비현실적이며 주관적 요소가 적지 않다. (이에 관해서는 본서의 제3장과 제4장을 참조할 것.)

작자가 해석 행위를 제약할 수 없다면 《홍루몽》의 텍스트는 제약 작용을 할 수 있는가? 《홍루몽》 텍스트 자체에서 ‘작자의 의도’를 찾는 것은 가능한가? 윔새트와 비어즐리는 〈의도적 오류〉에서 문학 비평은 텍스트 자체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텍스트 내에서 작자의 의도가 구현되지 않는다 해도 비평과는 상관없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텍스트를 조사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텍스트와 ‘작자 심리의 재건’ 사이의 관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본서 제3장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홍루몽》의 ‘이문(異文)’이 아주 많고 복잡한데 해석자들은 종종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문장만을 작자의 원문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문장은 배척하거나 비판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제2장 제3절의 논의는 이런 경향을 더욱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판중궤이는 어떤 때는 판각본의 문장을 취하고 어떤 때는 필사본의 문장을 취해 (‘권력’을 상징하는) ‘전국옥새(傳國玉璽)’라는 논리를 구축했다. 위핑보는 ‘진가경의 죽음’을 처리할 때 ‘이문’에서 작자가 ‘실록(實錄)’의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추론했다. (즉 자서전설을 가리킨다. 나중에 지연재 비평이 나타남으로써 그의 ‘심리적 재건’이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이 증명되었다. 작자는 수정하고 싶은 곳은 바로 수정하면서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자는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치공(啓功)은 작자가 줄곧 “청나라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의인[宜人]’이 아니라) ‘공인(恭人)’이라는 표현으로 “청나라 때 관료제도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을 피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또 22회의 마지막 부분은 각 판본마다 차이가 아주 큰데, 어느 것이 작자의 원래 문장인지가 ‘작자의 의도’와 ‘내재 구조’에 대한 해석자의 ‘깨달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63회에서 방관이 이름을 바꾼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자가 생각하는 ‘작자관’이 홀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위핑보는 이 부분의 글에 ‘만주족에 반대하는’ 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에 “후세 사람이 끼워 넣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중에 ‘반만설’과 ‘만주족에 대한 아첨’이라는 두 가지 주장이 함께 제기되었는데, 논쟁의 초점 역시 작자의 ‘입장’과 ‘창작 수단’(‘수사법’으로 꾸며 놓은 말이 있는지 여부)이었다. 1990년 말엽에 이르러 “정고본(程高本)이 지연재 판본보다 앞서 나왔다.”는 설이 제기되자 방관이 이름을 바꾼 부분 또한 지연재 판본의 가치를 떨어뜨릴 만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어느 논자는 이렇게 비판했다.

이렇게 극단적이고 좁은 민족 정서가 결코 조설근의 ‘마음[襟懷]’일 리 없다. 가보옥은 성스러운 군주의 공덕이라면 ‘장난질과 우스갯소리라도 칭송할’ 정도로 못나고 속되다는 것은 결코 조설근의 ‘원문[筆墨]’이 아니다. 특히 이 천진난만한 소녀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은 더욱 조설근의 사상이 아니며, 조설근이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방관을 ‘벽창호[野驢子]’라고 놀려대도록 하게 할 만큼 잔일할 리 없다.

논자는 ‘결코’ ‘~~하게 할 만큼 잔인할 리 없다’라고 강조하고 또 “더욱 조설근의 사상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조설근의 지기로 자처하는 듯하다.

필자가 보기에 이 역시 일종의 ‘작자 심리’를 장악하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논자는 왜 그리 긍정적으로 이야기했을까? 이것은 더욱 깊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설근이 틀림없이 ‘좁은 민족 정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을 증명할 역사 자료상의 근거는 있는가?) 만약 조설근이 ‘성인을 칭송’하지 않았다면 《홍루몽》에서 “황제는 지극히 어질고 효성스럽게 지내는 분”이라고 쓴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논자가 생각하는 ‘작자의 형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제67회 본문의 두 가지 계열 가운데 작자의 원고가 어느 것인지 판단할 때에도 해석자의 작자관과 작자 형상에 따라 결정된다. (자세한 논의는 제3장을 참조할 것.)

이런 문제들은 모두 비교적 미시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이며, 또한 논자도 해석 과정에서 외부 요소(예를 들어서 작자의 신분과 의도, 창작 배경 등의 요소에 대한 가정의 차이)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120회 전체의 《홍루몽》을 놓고 보았을 때, 작자에 대한 가정이 같다면 텍스트가 대체 어떤 ‘작자의 의도’를 구현했는지는 여전히 《홍루몽》 연구 방법에 의지해 검증할 수밖에 없다. (후스, 위핑보, 저우루창 같은) 신홍학 연구자들과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모두 《홍루몽》 앞쪽 80회와 뒤쪽 40회의 작자가 다르다고 인정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렇게 똑같은 전제 아래 신홍학 연구자들은 두 명의 작자와 (텍스트에서) 전후 양쪽의 차이를 강조할 수 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전후 텍스트의 유사점을 강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유사점과 차이점은 해석자의 착안점이 다른 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들의 논술에서는 각자 텍스트의 어떤 요소를 전경화(foregrounding, ‘돌출’이라도 번역하기도 함)한다. 이 점은 텍스트 문제를 논의할 때 상세히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간략하게 보충하고자 한다.

이른바 전경화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전경화라는 개념은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 무카로프스키(Jan Mukařovský: 1891~1975)에게서 가져온 것인데, 원래는 시의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표준어와 시적 언어(Standard Language and Poetic Language)〉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적 언어의 기능은 발언을 극도로 전경화하는 데에 있다. ……그 목적은 전경화된 표현 수법에 의해 표현된 주제에 좀 더 근접하도록 독자(청자)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창작의 언어적 기교를 가리키는 의미였는데, 나중에 수잔 호튼(Susan R. Horton)은 이 개념을 빌려 해석 행위를 분석했다.

해석은 본질적으로 러시아 형식주자들과 프라하학파의 언어학자들이 텍스트의 일부 요소를 ‘전경화’한다고 하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양식들을 모으면서 일부는 강조하고 나머지는 뒤에 남겨 놓는다.

제2장에서도 얘기했듯이 위핑보가 뒤쪽 40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가 앞뒤 쪽의 작자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미리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심리적 재건’에 따르면 조설근과 고악은 개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하나의 작품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곳곳에서 고악이 조설근의 ‘원래 의도’를 위반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는 〈고악 속작의 근거(固握續書底依據)〉에서 100가지 항목의 속작 근거를 나열했지만, 그의 판단은 이러했다.

나는 결국 뒤쪽 40회가 단지 장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곳에 다 근거가 있다 해도 기껏해야 아주 정밀한 장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의 목적은 이러했다. “나는 이러한 고찰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뒤쪽 40회가 보충해서 엮은 것이지 조설근의 원본이 아님을 더욱 잘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다시 말해서 위핑보의 목적은 《홍루몽》의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작자의 의도’가 관통되지 않음을 부각시키려는 것이지, 100개나 되는 ‘고악 속작의 근거’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 역시 120회본 《홍루몽》에 두 명의 작자가 있다는 견해를 수용했다. 이 때문에 그들도 위핑보를 비판하는 와중에서도 뒤쪽 40회의 어떤 부분은 “작품 전체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뒤쪽 40회에서 앞쪽 80회를 ‘계승’한 부분에 대해 더욱 중시했다. 이 때문에 그들의 글에 대한 ‘담론 분석(discourse analysis)’을 해 보면 곧 그들의 논술이 종종 “비록 ~~이지만 ……하다[雖然~~, 但是……]”라는 투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쪽 40회에는 당연히 많은 결점이 있지만, 《홍루몽》의 주인공 가보옥과 임대옥은 전체 모순의 발전 과정에서 오히려 앞쪽 80회에서 완수하지 못했던 임무를 완성했다.

고악의 속작에는 당연히 결점이 있으며 특히 가보옥이 거인(擧人)에 급제하고 가씨 가문이 중흥한다는 두 가지 내용은 작품 전체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묘사에서 봉건 가정 통치자의 음험함과 허위적 가면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고, 투쟁의 진행을 더욱 첨예하고 맹렬하게 함으로써 작품 전체의 주요 모순이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게 하였으니, 결국 과오보다는 공적이 더 많다. 100여 년 이래 뒤쪽 40회가 전체 작품의 일부로서 앞쪽 80회와 서로 보완 관계를 이루며 유행함으로써 인민 대중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고악의 속작에는 물론 조설근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지 않은 부분들이 조금 있다. 그러나 뒤쪽 40회는 기본적으로 앞쪽 80회에 담긴 이야기 발전의 맥락과 방향을 근거로 가씨 가문의 추악하고 어두운 삶을 계속해서 묘사하고, 긍정적 주인공과 부정적 주인공의 성격들을 계속해서 묘사함으로써 봉건제도에 대한 반항자인 가보옥과 임대옥이 태부인[賈母]을 우두머리로 하는 봉건 통치계급의 대표자들과 일으키는 갈등과 투쟁을 더욱 첨예하게 묘사해냈다. 또한 비극으로 끝나는 가보옥과 임대옥의 사랑과 그 밖의 중요 인물들의 결말을 묘사해냈다. 하나의 완정한 예술 작품으로서 120회본 《홍루몽》은 160여 년 동안 줄곧 광대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비록 뒤쪽 40회의 이런 결말들이 앞쪽 80회와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고 심지어 서로 어긋나는 부분도 있지만, 주로 그것이 앞쪽 80회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이어받아 《홍루몽》의 주요 모순을 심각하게 반영했기 때문에, 즉 봉건 통치제도에 반대하는 가보옥과 임대옥이 봉건제도를 옹호하는 태부인과 가정, 왕희봉, 설보차 등과 일으키는 갈등이 그들 사이의 충돌과 투쟁을 새로운 단계에 이르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투쟁을 열렬히 찬송하고 긍정적인 인물이 보여주는 불굴의 정신을 찬양하고, 봉건 통치자들에 대해 폭로하고 채찍질을 가했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은 현실주의의 거대한 성취를 이루어냈으며, 강렬한 예술적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다. 100여 년 동안 뒤쪽 40회는 줄곧 《홍루몽》의 한 부분으로서 광대한 독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당연히 많은 결점이 있다.”느니 “물론 조설근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느니 어쩌니 할 때 ‘당연히’, ‘물론’, ‘비록’ 등등의 표현들은 모두 억압적인(바꿔 말해서 일부러 소홀히 하는) 요소들이다. 컬러(Jonathan Culler)는 《탈(脫) 구축(On Deconstruction)》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전 해석자들에 의해 주변으로 추방되거나 버려진 것은 바로 그것이 버려지게 만든 어떤 이유들 때문에 중요할 수 있다. 해석이란 일반적으로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핵심적인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행위라고 여겨진다. 해석이란 하나의 텍스트 또는 텍스트 그룹에서 중심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위핑보의 해석 체계에서 뒤쪽 40회는 비록 ‘근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주변으로 추방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뒤쪽 40회의 결점을 희석시키면서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내용을 ‘전경화’했다. 위 인용문들 가운데 “물론 ~~하지만 ……하다.”랄지 “당연히 ~~하지만 ……하다.”라는 등의 표현은 모두 ‘추방(marginalzing)’과 전경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서술의 틀이다. 텍스트를 읽는 이런 태도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조잡한 것은 제거하고 정화를 취해야[去其粗粕, 取其精華]” 한다는 마오쩌둥 주장을 이어받은 것과도 유사하다(제2장 참조). 4집으로 구성된 《홍루몽 문제 토론집》에 수록된 글을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마르크스의 문학이론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독해 방법 역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틀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문예이론에서는 문학이 마땅히 첨예한 계급투쟁을 반영하고 신흥 세력의 승리와 몰락하는 역량들의 사망을 표현하여 문학의 당성(黨性) 원칙을 제기해야 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바로 《홍루몽》을 “봉건 대가정의 필연적인 멸망을 묘사한” 소설로 여기기 때문에 뒤쪽 40회에서 ‘갈등[矛盾]’과 ‘반(反)봉건 정신’을 반영한 부분을 중시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앞쪽 80회와 뒤쪽 40회 또한 ‘완정한 예술 작품’(스쯔위[施子愉])이 되고, 뒤쪽 40회는 ‘작품 전체의 한 부분’(탕타오[唐弢])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한 논자는 아주 많은데,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반봉건이라는 《홍루몽》의 기본 정신으로 보든 등장인물의 성격으로 보든, 아니면 이야기 줄거리로 보든 간에 뒤쪽 40회는 앞쪽 80회와 아무 충돌 없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쪽 80회를 합리적으로 이어서 발전시키고 있다. 그래서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속작은 ‘비극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홍루몽》 현실주의 예술의 반봉건적 경향성을 완성했다. 그것은 또한 가보옥과 임대옥의 비극적 운명을 열렬히 노래하고, 봉건 통치자의 죄악을 분노하며 고발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것은 비로소 광대한 인민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앞쪽 80회와 더불어 굳세고 단단한 객관적 연계를 이루며 전해 내려왔다.

이 위대한 비극의 주제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홍루몽》의 뒤쪽 40회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뒤쪽 40회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발전은 봉건사회의 필연적인 몰락이라는 현실의 내용을 구현했다.

이렇게 《홍루몽》 전체가 ‘반봉건’ 소설이라는 대전제 아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뒤쪽 40회가 ‘갈등’(가보옥, 임대옥과 가씨 집안의 ‘봉건 통치 계급’ 사이의 갈등)을 충분히 발전시켰으며, 이 ‘갈등’은 앞쪽 80회에서 묘사된 가보옥과 임대옥의 ‘반역적 형상’과 서로 협조하여 ‘예술 형상의 완정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쪽 40회에서 ‘전개’하는 갈등도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보기에 원작자(조설근)의 의도와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서 수수(舒蕪)는 “(고악의 속작은) 앞쪽 80회의 주요 갈등을 전개하면서 또 강화하여 앞쪽 80회에서 작자가 보여준 경향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허졘쉰(何劍熏)은 이렇게 주장했다.

고악의 속작은 조설근을 부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점은 아마 연구자들이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설근의 사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앞쪽 80회의 갈등은 고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충분히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씨 집안의 재산은 몰수되고 가보옥은 집을 나가는 장면을 보자. 특히 그가 진보옥(甄寶玉)과 결별하는 것은 이 점을 더욱 잘 설명해 준다. 다만 마지막에서 ‘난계제방(蘭桂齊芳)’을 안배한 것은 고악의 사상적 약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약점 역시 역사적 한계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다. 조설근의 사상에서도 이런 약점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이 약점은 바로 그가 귀족 지주계급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해 어느 정도 연민과 애석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악과 조설근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둘 다 진보적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조설근과 고악은 ‘진보적 분야’에서도 일치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약점’까지도 서로 같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지연재 비평과 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자들은 ‘작자의 심리’를 빌려 자신의 주장을 부연하기를 좋아한다. 가령 “모든 작자들이 빌려 읽는 여타 인물들에게 마음대로 비평을 달도록 허락할 리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데 조설근이 자신의 원고나 정서한 필사본에 이처럼 혼잡하게 비평을 달도록 허락했을 리 있는가?”라는 식이다. 반문하는 문장을 사용한 이런 진술은 읽을 때는 무척 유력하게 느껴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적지 않은 문제들이 드러난다. ‘모든 작자’가 어떠어떠하다는 식의 표현은 절대화된 화법이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작자’를 하나씩 다 조사하여 실증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것(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은 하나의 가설이다. 다음으로 조설근이 정말 허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이 책에다 비평을 쓰는 것을 제지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원고가 어떻게 전해져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연재 비평의 현상을 ‘작자 심리의 재건’을 위한 토대로 삼는다면 결과적으로 어떤 가설들만을 얻어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설을 토대로 해석을 한다면 신뢰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연재 등의 언론 또한 《홍루몽》 연구자들이 ‘심리적 재건’을 진행하는 데에 극히 중요한 재로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작자의 의도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다.

[제1회] 가우촌의 오언시 아래에 적힌 갑술본의 두 줄로 된 협비

이것은 맨 처음 나오는 시이다. 뒤쪽에 묘사된 규방 여인들의 정서는 모두 허망한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조설근이 이 책을 쓴 데에는 시를 전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這是第一首詩. 後文香奩閨情皆不落空. 余謂雪芹撰此書, 中亦有傳詩之意

(저자: 이 비평은 갑진본에도 들어 있는데, 마지막 구절이 “中亦爲傳詩之意”라고 되어 있다. 우언위[吳恩裕]는 ‘爲’가 행서 ‘有’를 잘못 쓴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2회] 갑술본 측비

작자의 의도는 원래 말세를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作者之意原只寫末世.

[제2회] 갑술본 미비

아마 저자는 사실 형제의 슬픔과 형제의 위세 때문에 이 규방 부녀자들의 전기를 지었을 것이다.

蓋作者實因鶺鴒之悲、棠棣之威, 故撰此閨閣庭幃之傳.

[제16회] 귀신이 진종(秦鍾)을 잡는 장면에 대한 경진본 미비

《석두기》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정서와 이치에 맞고 반드시 있을 만한 일들과 반드시 있을 만한 말들이다. 또 이처럼 황당하고 경전에 맞지 않는 이야기도 간혹 들어 있는데, 이는 작자가 일부러 장난삼아 쓴 글이 아닌가? 그것으로 웃음을 자아내려고 한 것이니, 다른 책에서 진지하게 귀신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石頭記》一部中皆是近情近理必有之事, 必有之言. 又如此等荒唐不經之談, 間亦有之, 是作者故意游戱之筆耶? 以破色取笑, 非如别書認眞說鬼話也.

이렇게 보건대 비평가가 비록 작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정말 그렇다 치고)이긴 하지만 ‘작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비평가가 말하는 ‘작자의 본래 의도’ 역시 그(또는 그녀)의 개인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기도 한다. 위 인용문에서 “내 생각에……”라는 구절이나 “이는 작자가 일부러 장난삼아 쓴 글이 아닌가?”라는 구절은 모두 추측을 한 말이다. 비평가는 매번 ‘숨겨진 뜻[隱意]’이라거나 ‘깊은 뜻[深意]’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 역시 자신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며, 작자가 결국 그런 숨겨진 뜻이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사실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비평을 작자의 ‘심리적 재건’을 위한 근거로 삼는 것도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본서 제4장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지연재 비평의 연구에서 ‘각자 필요한 바를 취하는’ 방식도 실례가 없지 않다. ‘전기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비평 가운데 어느 부분을 잘라 인용하여 이론을 건립하면서 지연재 비평에 담긴 그 밖의 반대 증거들은 못 본 체한다. 예를 들어서 저우루창과 우스창이 지연재와 기홀수를 동일인으로 보는 까닭은 그들이 비평을 해석할 때 그들 사이의 같은 점만 보고 다른 점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우루창은 비평가가 여성임을 논증하기 위해 지연재 비평 가운데 ‘여성의 어투’만을 내세우고 남성의 어투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오깡과 천종이[陳鍾毅]는 반대 증거로서 ‘남성의 어투’로 된 지연재 비평을 나열하여 저우루창의 주장을 부정했다.) 또한 ‘합전설’과 ‘다른 사람의 전기라는 설[他傳說]’ 역시 비평가가 가보옥으로 자처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연재 비평에서 ‘가보옥으로 자처하지 않는’ 부분을 소홀히 취급한다. 이런 방식은 사실 지연재 비평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전경화’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전유’의 해석 전략 역시 지연재 비평의 연구에서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서 색은파 연구자인 판중궤이는 지연재가 언급한 ‘실제 인물의 사실[眞人實事]’를 단번에 말살해 버리고, 지연재 비평에서 실제 인물과 실제 사실은 “단지 《홍루몽》 작자의 붓끝에서 묘사된 인물과 사건의 사실성을 과장한 것”일 뿐이며, 지연재의 경력과 작품 속에 묘사된 내용이 은연중에 부합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평에서 언급한 ‘작자’에 대해서도 판중궤이는 어떤 때는 원작자(판중궤이의 주장에 따르면 ‘돌[石頭]’)를 가리키고 어떤 때는 ‘개작자[增刪者] 조설근’을 가리키는지 구별한다. 이 주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연재 비평을 가져다 쓴 것이다. 왜냐하면 비평가는 ‘원작자’와 ‘개작자’를 일률적으로 ‘작자’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판중궤이는 ‘작자’라는 단어만 가지고 그런 구분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그의 방법은 지연재 비평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론에 배합한 것일 뿐이다. 그가 목적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논증 과정의 내재적 모순은 오히려 이 때문에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 다른 몇 가지 예에서는 해석자의 ‘전유’ 방식이 더욱 뚜렷하다. 본서 제4장은 체계를 스스로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시간의 순서에 따른 서술 방법을 채택하면서 이런 예들에 대해 논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간략히 보충하고자 한다.

《홍루몽》 제21회에서는 가보옥이 아침 일찍 임대옥의 거처에 놀러 갔다가 이홍원에 돌아온 뒤에 화습인에게 질책을 듣지만, 그는 아예 화습인을 상대하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가보옥이 “하녀들을 부르지도 않고 오직 사아(四兒)에게만 심부름을 시키는데, 뜻밖에 사아도 영리하기 짝이 없는 계집애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경진본의 두 줄로 된 협비는 다음과 같다.

또 하나의 유해무익한 인물이다. 작자는 이런 이들 때문에 평생을 그르쳤고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책을 펼쳤을 때 이런 인물을 보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야 물론 즐거워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원한을 품게 된다. 대개 네 글자는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심하다. 그르침을 당해 본 이라면 이 비평에 깊이 감명할 것이다. 又是一个有害無益者. 作者一生爲此所誤, 批者一生亦爲此所誤, 于開卷凡見如此人, 世人故爲喜, 余犯[反]抱狠[恨], 蓋四字誤人甚矣. 被誤者深感此批.

여기서 “네 글자는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심하다.”라고 했을 때 ‘네 글자’는 본문의 “영리하기 짝이 없는[聰明乖巧]”을 가리킨다. 하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작품에서 묘사한 ‘사아’라는 보통의 하녀가 비평가로 하여금 이렇게 개탄하게 하고 또 “네 글자는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심하다.”라는 추상적인 얘기를 하게 했으니, 이는 나로 하여금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이곳이 제목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통째로 아우르는 말[囫圇語]’의 배후에 있는 창끝이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조씨 가족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한 강희제의 넷째 아들 즉, 훗날의 옹정제이다. 그러므로 작자는 뒤이어서 “그르침을 당해 본 이라면 이 비평에 깊이 감명할 것”이라고 했다. 《홍루몽》의 본문과 비평에서 이런 예증(例證)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어서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다. 이런 것을 너무 깊이 따지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다. 다만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자가 손이 가는 대로 써 버린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깊은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면 작자의 고심을 저버리는 결과를 면치 못한다.

“《홍루몽》의 본문과 비평에서 이런 예증(例證)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거나 깊이 따지지 않으면 “작자의 고심을 저버리는 결과를 면치 못한다.”는 진술을 보면 논자가 바로 지연재 비평을 가져다가 작자의 심리와 저작 의도를 재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예에서 보면 해석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반봉건, 반 청조’의 선입견에 가려져서 그 비평을 이렇게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지연재 비평에서 ‘네 글자’를 언급한 예는 또 있는데, 바로 본문 속의 네 글자를 가리킨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라는 설이 의식적인 곡해인지 무심결에 저지른 잘못인지에 상관없이 “네 글자는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심하다.”라는 비평의 문장은 이미 작자의 ‘반봉건’ 사상과 ‘투쟁’을 묘사하는 증거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 예가 단지 비평의 문장을 오해한 것이라면 이어지는 다음 예는 분명히 고의적으로 지연재 비평을 ‘전유’한 것이라 하겠다. 《홍루몽》 제22회에는 가정이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낸다.

身自端方 몸은 단정한 사각형이고
體自堅硬 체질은 단단한데
雖不能言 비록 말은 못해도
有言必應 남의 말엔 반드시 응한다네.

경진본에서는 이 수수께끼 아래에 두 줄로 된 협비가 달려 있다. “아주 훌륭하다! 확실히 가정의 수수께끼에는 가씨 가문의 조종(祖宗) 자신이 숨겨져 있다. ‘필(必)’자에는 ‘필(筆)’자가 숨겨져 있다. 훌륭하다! 아주 훌륭하다![好極! 的是賈老之謎, 包藏賈府祖宗自身, ‘必’字隱‘筆’”字. 妙極, 妙極!]” 이에 대해 어느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홍루몽》은 ……봉건 귀족 지주계급이 심지어 자신들이 처한 사회가 청나라 옹정, 건륭 연간의 “외면적인 틀은 그다지 심하게 무너지지 않았지만 안쪽 주머니는 비어 가고 있는”(제2회)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반영했다. 즉 이 ‘번영’의 외피가 감싸고 있는 내부는 어떤 거대한 변화 즉 봉건사회가 점차 붕괴의 지경으로 나아가는 불가피한 발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런 필연성을 당시 사람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제22회에서 가정이 ‘벼루[硯]’에 대한 수수께끼를 얘기할 때 지연재 비평에서는 “아주 훌륭하다! 확실히 가정의 수수께끼에는 가씨 가문의 조종(祖宗) 자신이 숨겨져 있다. ‘필(必)’자에는 ‘필(筆)’자가 숨겨져 있다. 훌륭하다! 아주 훌륭하다!”라고 했다. 이런 필연적인 변화를 작자는 매우 심각하게 알아채고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묘사해 냈던 것이다.

“‘필(必)’자에는 ‘필(筆)’자가 숨겨져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아주 명백해서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지연재 비평의 ‘필(必)’가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가 “(《홍루몽》이 묘사하는 봉건사회의) 필연적인 붕괴”라고 할 때의 ‘필연[必]’과 같은 글자이기 때문에 그는 이 비평의 내용을 곡해하여 “이런 (붕괴의) 필연성을 당시 사람도 눈치 챌 수 있었다.”고 했고, 나아가 “이런 필연적인 변화를 작자는 매우 심각하게 알아채고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묘사해 냈다.”고 했다. 이른바 작자가 “알아 챈[看到了]” “이런 필연성”은 논자가 작자의 처지를 아주 잘 이해했음(심리적 재건!)을 나타낸다. 이른바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묘사해 냈다.”는 표현도 봉건사회에 반대하는 ‘작자의 마음’이 이미 실행에 옮겨져서 ‘봉건사회에 반대하는 행위’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침 지연재 비평이 “당시 사람이 제시하는 증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해법은 지극히 견강부회한 것으로서, 지연재 비평에 대한 전유와 작자에 대한 전유를 동시에 진행한 일종의 해석의 폭력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조설근의 사상’은 여전히 대단히 쓸모 있는 논술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서 (지연재 판본을 위작으로 간주하여) ‘지연재 타도’를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 커페이(克非)는 지연재 판본이 조설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의 비유를 조설근의 ‘발언’으로 삼았다. 즉 “조설근이 지연재로 하여금 자신의 원고를 마음대로 수정하도록 허락했을 리 만무하고,” “조설근이 지연재로 하여금 자신의 원고를 가져가서 작업실을 차린 다음 저열한 필사자를 고용하는 데에 동의했을 리 없으며,” “지연재가 많은 비평 문장에서 《홍루몽》에 대해 왜곡하고 함부로 해석하고 엉터리로 추측하도록 조설근이 용인해 주었을 리 없고,” “지연재가 《홍루몽》을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멋대로 갖다 붙이는 것에 조설근이 결코 동의했을 리 없고,” “조설근이 지연재가 ~~하는 것을 허락했을 리 없으며,” “조설근이 절대 지연재가 ……하는 데에 찬성했을 리 없다.”(《홍학말로》 제10장)는 식이다. 이른바 조설근이 “절대 ~~할 리 없다.”는 식의 표현은 대단히 긍정적인 말이어서 전환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렇게 보면 조설근의 심리에 대한 커페이의 이해 정도는 사실 더할 나위가 없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커페이는 《홍학말로》 제1장에서 분명히 “그(조설근)의 많은 일에 관해서 우리는 여전히 무지한 상황에 처해 있다.”라고 인정했다. 그런데 왜 제10장에서는 조설근의 심사에 대한 그 본인의 이해가 다시 아주 분명해졌는가? (‘모든 것을 알’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