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 쑤저우蘇州 3

쑤저우 근교의 풍경

쑤저우에 이르는 것은 수륙으로 두 갈래 길이 있었지만, 당시의 교통 형태로 생각해 보면, 배를 사용하는 쪽이 많았던 듯하다. 내가 일찍이 쑤저우를 방문했을 때도 주변의 운하에는 당시와 똑같은 배가 항행하고 성벽 옆에도 배가 모여 있었다.

당시의 여행 일기와 기록을 보면, 도시에 가까워짐에 따라, 많은 장사꾼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루유 당시에도 그랬는데, 가격은 대단히 쌌다고 기록되어 있다. 죠진(成尋) 당시에는 관리도 나와 있었다. 제반 수속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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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쑤저우 부감도(위쒀팡(兪縮方), 「수도 쑤저우(水都蘇州)」에 수록된 그림을 참고하여 그린 것. 쑤저우를 남쪽에서 바라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된다. 원먀오(文廟)는 그 부근의 정원 등을 보완하는 의미로 덧붙였다.

이런 풍경은 아직도 숨 쉬고 있다. 도시의 주변에 가까워지면, 몇 개의 작은 배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시(无錫)와 양저우(揚州)를 방문했을 때도 눈에 들어온 광경이다. 가요곡(歌謠曲)이 되기도 했던 우시의 칭밍챠오(淸明橋) 아래를 크고 작은 배들이 항행했다. 여기에도 운하 옆으로 배를 끌어당겼던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 아직 남아 있다. 돌로 쌓은 이것은 예전 풍경을 방불케 하는 유물이다.

성문도 견고하고 복잡하다. 여기에도 배가 많다. 아침 안개가 차츰 걷히는 가운데, 새까만 배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모습이 인상에 강하게 남았다.

성문 밖에는 많은 장사꾼들이 모여 있었다. 일종의 자유 시장으로 노점과 점포가 늘어서 있어, 인근에서 운반되어온 듯한 신선한 야채와 어패류, 또는 일용품이 있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시끌벅적함으로 가득 차 활기가 넘쳤다.

성문은 도시와 교외의 경계를 만든다. 거리에 들어서면 도시라는 이경(異境)에 들어서게 된다. 더구나 야간에는 성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한층 강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밤의 불빛 속에서 검게 솟아있는 성문의 안팎에 모여들었다. 성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활동하는 것을 기다려 장사에 열을 올린다.

밤늦게 성문에 겨우 도착해 첫 번째로 입성하려는 이, 멀리 여행을 떠나려는 이, 성문 옆의 숙소에서 일박을 한 이, 이런 사람들을 노리고 점포를 연 이 등등. 성문이 갈림길이었기에, 여러 가지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남송을 대표하는 또 한 사람의 시인으로 쑤저우 교외의 스후(石湖)에 장원을 갖고 있던 판청다(范成大)도 아침 일찍이 성문에 배를 대고 개문(開門)을 기다렸던 풍경을 노래했다.

이것은 육로를 위주로 한 화북의 도시에서도 다를 게 없었던 듯하다. 카이펑의 성문 주변에서도 아침 일찍부터 사람이 몰려나와 개문을 기다렸다. 물론 장사를 한 이도 있었다. 황허의 물고기를 가져와서 파는 풍경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쑤저우 주변은 어땠을까? 아마도 그물코처럼 깊숙이 들어간 수로가 전개되어, 망망한 논이 펼쳐진 경관이지 않았을까? 성문 근방 모두가 인가로 가득 찼던 것은 아니었다. 서부는 인가가 밀집해 있었지만, 동부는 그렇지도 않았다. 동쪽에서 나아가면 논 맞은편에, 서북쪽에서 나아가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가들 맞은 편에 도시가 있었다. 그 경계선에 성벽이 우뚝 솟아있었을 것이다.

쑤저우 입성

육로든 수로든 여하튼 쑤저우에 입성하기로 하자. 이를테면, 남쪽의 판먼(盤門)으로 입성한다. 아득히 멀리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달한 일본의 여행객도 쑤저우에 들어올 때는 판먼으로 들어왔다. 그들 대다수는 닝보(寧波)에 도착해 거기에서 운하를 따라 북상해서 판먼으로 입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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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언쓰(報恩寺)(《송평강도》). 후룽졔(護龍街) 건너편에 솟아있는 탑은 현재는 베이쓰탑(北寺塔)이라 불리고 있다.

성문 바깥 쪽 측면에는 정관(亭館)이 있었다. 공식적인 여행자는 여기에서 관리의 접대를 받았다. 외국에서 온 여행자는 여기서 검사를 받는 한편 공식적인 접촉을 했다. 죠진(成尋)도 접대를 받았다.

문을 빠져나가면, 그곳은 이미 강남의 천국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쑤저우였다. 문 옆에는 사당(廟)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쯔쉬(伍子胥)의 사당은 신앙의 대상이지 않았을까? 우쯔쉬는 춘추시대 오왕 푸차(夫差)을 섬겨 월나라를 격파했던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건 공신의 처우는 가혹했다. 그는 참언과 월나라의 모략으로 오나라에 저주를 걸고 죽었다. 아마도 그는 쑤저우 사람들에게 원령신(怨靈神)으로 군림했을 것이다.

한 가운데에는 운하가 그리고 그 옆에는 가로가 이어졌다. 쑤저우는 진정 사치스러운 구조로 수로와 육로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은 느긋하게 흘렀고 사람과 화물을 실은 많은 배들이 오갔을 것이다.

육지로부터 배를 타기 위한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이 붙어 있는 방법이 재미있다. 《청명상하도》를 보면, 카이펑에서 수면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도로로부터 수직으로 붙어 있다. 또 배에서 판자를 건네주거나 해서 오르내렸던 듯하다. 이것은 예전에 도쿄의 수로를 배로 돌았을 때와 비슷하다.

예전 에도(江戶)의 수로는 도쿄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다리와 고속도로 아래에는 오래된 돌무더기가 있고, 석단(石段)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도 수면을 향해 수직으로 돌출해 있었다. 이를테면, 물을 향해 내려가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연전에 강남을 여행할 때, 깨달은 게 있다. 수면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구조가 일본의 그것과 상당히 달랐다. 길에 평행하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수면에 직각인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은 적었다. 이것은 아마도 간만의 차가 일본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륙의 물은 천천히 흐른다. 특히 수로가 착종된 강남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향해 직각으로 계단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쪽이 화물을 오르내리는데 편리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간만의 차가 큰 만큼, 또 배가 큰 만큼 안벽(岸壁)에 가로 붙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도 중국만의 도시 설계가 있다.

지도상으로는 이 판먼 주위에 인가가 밀집해 있었다는 흔적은 없다. [하지만] 인가가 없을 리 없다. 어찌 되었든 일반적인 것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쑤저우 남부는 결코 활기찬 곳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히려 적막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송평강도》를 보면 남부, 특히 소성(小城)의 남쪽의 길과 운하는 정비되지 않았다. 성문 바로 옆에는 관청이 서로 이웃해 있고, 성벽에 가까운 주변은 잡다한 길과 운하였다. 운하는 차치하고라도 가로는 막다른 곳이다.

게다가 그 주변은 정원과 사당이 많다. 거양원(居養院)도 있다. 거양원이라는 것은 송대에 설치된, 특히 전국적으로 행해진 빈궁한 사람들의 구제 시설이었다. 이곳에는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이나 병자, 아이들이 수용되었다. 이런 것은 도심에 세워지기 어렵다.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당치도 않은 밭이나 깊은 산 속에 양로원이나 구호시설이 세워져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케이스가 있다. 본래라면 그런 시설은 교통편이 좋고, 매일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 곳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만, 현실에서는 약자에게 주어진 장소에 쏟아지는 햇살은 약한 것이다.

무엇보다 소정(紹定, 1228~1233년) 4년이라고 했는데, 이 지도가 나오고 2년 뒤, 쑤저우 도심의 러챠오 동쪽에 2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후이팡(廣惠坊)이 설치되었다.

장소를 추정한다면, 메인 스트리트인 후룽졔와 관청이 있는 소성(小城) 사이의 길고 좁은 구역이 있다. 리징러우(麗景樓)라는 누각이 있고, 그 인근에 샤오이팡(孝義坊)이라는 방표(坊表)가 서 있는 부분이 아닐까? 덧붙여 말하자면, 기록에 의하면 광후이팡의 크기는 70간이라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충실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시설의 기본 구조는 우메하라 가오루(梅原郁, 1934~ )가 고찰한 바 있지만, 침실과 큰 방이 있고, 사원 관계자가 관리했던 듯하다.

수행(水行)과 육행(陸行)

성내에는 종횡으로 수로가 달렸다. 속칭 3횡4직(三橫四直)이라 불렀던 가로로 세 개, 세로로 네 개의 기간 운하를 중심으로 많은 수로가 착종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주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뉜다.

많은 배가 오갔던 수로는 번화가로 통하는 수로였다. 배는 번화가를 누비듯이 나아갔다. 머리 위에 가설된 많은 다리 아래를 통과했다. 주위에는 인가와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이에 비해서 별로 중요한 건물이 없는 수로와 가로는 역시 적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판먼(盤門)에서 직진하는 운하, 디이즈허(第一直河) 옆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었다. 왼쪽에는 구쑤관(姑蘇館)이 있고, 오른쪽에는 절과 관(館) 등이 있었다. 구쑤관 바로 앞에 위치한 성벽 위에는 누대가 있었다. 구쑤관과 나란히 관청 건물이 있다. 창고와 세금 관계의 관청들이다.

상륙해서 동쪽으로 걸으면, 정원과 절, 도관이 보이고 이윽고 부학(府學)에 도착한다. 이곳은 문교(文敎) 지구다. 유명한 쑤순친(蘇舜欽, 1008~1049년)의 창랑팅(滄浪亭)도 있다. 근방에는 문인들이 살았다.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면 관청가에 이른다. 지나쳐 가는 길에는 방표(坊表)가 서 있다. 이 코스는 운하로도 갈 수 있다. 팅위안(庭園)에 가려면 메이쟈챠오(梅家橋)나 신챠오(新橋)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이다. 관청가로 가려면 청챠오(程橋)에서 우회전해 그대로 성벽을 따라 나아가 난싱챠오(南星橋)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두 코스는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각기 다른 경관이 등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잘 보면, 이들 가로와 수로 가운데는 막다른 길이 되는 곳도 있다. 아무래도 그 근방이 미발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집들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경관은 슬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거리의 구조가 복잡해진 것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개발이 엄청나게 진행됐던 데다 멋대로 행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규제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그런 까닭에 복잡해진 케이스다. 이 일대는 후자의 케이스인 듯하다. 팅위안(庭園)과 관청가가 있었다고는 해도 도심에서 멀고, 경제적인 의미를 가진 지명이 결여되어 있다. 수로도 가로도 너무 복잡하다. 약간 한적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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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남부의 번화가(《송평강도》). 관청, 요정, 문교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이런 곳에는 습지대가 있고, 마름(菱) 열매를 따서 매일의 양식으로 삼았던 이도 있었던 듯하다. 성 안의 습지대, 또는 운하는 러챠오시베이(樂橋西北)에 있는 샤쟈후(夏駕湖)와 마찬가지로 매일의 양식을 만들어내 내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도시의 수로가 단순히 교통로만은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송평강도》를 검토하면, 성내 동남부의 정원(庭園)에는 연못을 갖고 있는 이가 많다. 아마도 운하의 물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남부의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슬슬 성 안의 중심부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