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虞姬에 관하여 4

중국 정사인 『사기』나 『한서』에는 우희의 자결 장면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중국 민간에는 우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 만약 당시 경국지색이었던 우희가 자결하지 않고 한나라 유방에게 사로잡혀서 그의 첩실이 되었다면 그 사실이 기록에 남지 않을 리가 없을 터이다. 예컨대 같은 시기 서위왕(西魏王) 위표(魏彪)의 후궁이었던 박희(薄姬)는 위표가 패배한 후 유방에게 투항했고, 그 사실이 정사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후대인 삼국시대 원소의 아들 원희의 부인이었던 견부인(甄夫人)이 조조의 아들 조비의 부인이 된 사실도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초한쟁패 시기에는 여성의 절개를 강조하는 유가의 윤리가 아직 보편화하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끝난 후 승자가 패자의 부인이나 후궁을 취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해당 여성도 별 거부감 없이 승자의 후궁으로 들어갔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은 후 그 아들이 황제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황태후로 존경을 받기도 했다. 위표의 후궁이었던 박희가 유방의 아들 문제(文帝)를 낳고 나중에 황태후가 된 경우가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사면초가가 울리는 해하(垓下) 전장에서 마지막 전투에 임하기 전 초패왕 항우는 눈물을 머금고 우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자색이 고우니 유방이 보고 살려줄 것이오, 절대 해치지 않을 것인데 몸을 기댈 땅이 없을까 근심하오?” 관례대로 유방에게 투항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권유다. 그러나 우희는 그런 피동적이고 종속된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랑과 자존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사례였다. 『서한연의』(원본 초한지) 제83회에 박희와 대비하여 우희를 칭송하는 시가 실려 있다.

박희는 일찍이 위나라 부인이었으나,
망국 후 갑자기 유씨 임금을 섬겼다네.
우희는 천 년토록 청사에 빛 뿌리며,
서릿발 같은 자태로 홀로 빼어났다네.
薄女曾爲西魏婦, 國亡遽爾事劉君.
虞姬千載昭靑史, 烈烈霜姿獨出群.

여기에는 벌써 ‘절개 지킨 열녀’라는 유가의 윤리가 투영되어 있지만 우희의 마지막 자결은 항우의 권유조차도 거부한 주체적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항우가 오강(烏江)에서 강동으로 도주하여 후일을 기약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우희의 사랑과 의리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강에서 항우의 애마인 오추마도 강물로 뛰어들어 비장한 최후를 장식했다. 항우가 노래한 「해하가」의 세 주인공은 모두 장렬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패왕별희」가 천고의 스토리로 전승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그림출처: Baidu Baike)

yuji3
그림출처: Baidu Ba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