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홍학 시기의 지연재 비평 연구
1) 지연재 비평의 재출현
정각본(程刻本)이 간행된 이후 세상에 유행하면서 비평은 묻히기 시작했다. 1911년에 이르러 유정서국에서 80회본 《석두기》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비평이 붙어 있어서 지연재 비평이 다시 독자 대중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 80회본 《홍루몽》의 앞쪽에는 덕청(德淸) 척료생의 서문이 있기 때문에 후스는 〈고증〉(개정판)에서 이것을 ‘척본(戚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석두기》의 첫머리에 실린 척료생 서문 필적과 뒤쪽 본문은 한 사람이 쓴 것이니 석인본(石印本)의 저본은 이미 척료생이 얻은 원래 필사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어떤 연구자들은 그것을 ‘유정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정본의 작품 제목은 매우 주목할 만한데, 그것이 비평을 대하는 학자들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정본의 제목은 《원본 홍루몽》이며, 속표지에는 《국초 초본 원본 홍루몽(國初鈔本原本紅樓夢)》이라고 되어 있어서, 나중에 나타난 필사본들에 《지연재 중평 석두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 외에도 후세에 나타난 기타 필사본에는 비평 아래에 지연재의 서명(署名)이 들어 있기도 하지만, 유정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비평을 단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1921년에 구졔깡은 위핑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정본의 비평을 누가 언제 달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비평 자체도 즉각적으로 학자들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1921년에 이르러 후스의 〈고증〉(개정고)에서야 비로소 유정본의 비평을 거론했다. 그러나 그의 착안점은 완전히 비평의 내용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홍루몽》의 ‘원본’이 백문(白文)으로 되어 있었으며 비평이 달린 판본은 오히려 늦게 나온 것임을 알리는 표지라고 가정했다.
이 판본(유정본)에는 이미 총평과 협평(夾評), 운문에 대한 평가와 칭송이 들어 있고 또 종종 ‘제시(題詩)’가 들어 있으며, 어떤 때는 비평을 본문에 넣어 베껴 쓰기도 했으니(제2회), 이로 보건대 이것은 결코 원본이 아니라 아주 나중에 나온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그가 처음 《지연재 중평 석두기》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중평’이라는 말이 나중에 나왔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서 아마도 별로 큰 가치가 없을 거라고 여긴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렇게 ‘나중에 나왔다’는 편견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는 〈고증〉(개정고)에서 유정본에 담긴 지연재 비평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지 않았다. 학자들이 모두 유정본의 비평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핑보는 1922년 4월 29일 척본의 비평을 근거로 〈뒤쪽 30회의 《홍루몽》〉을 써서 척본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비평에서 제시하는 뒤쪽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했다”고 밝혔다. 신홍학 연구자들 가운데 위핑보는 유정본의 비평에 주목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핑보의 〈뒤쪽 30회의 《홍루몽》〉의 기본 자료는 완전히 유정본의 비평에서 나왔지만, 그 역시 구졔깡처럼 이 비평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몰랐다.
척본의 평주(評注)는 누가 했을까? (제41회 끝부분의 시에 대한 평에는 입송헌[立松軒]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는데) 한 사람이 한 것일까? 그들이 주고받은 ◌◌의 얘기를 보면 한 사람이 아닌 듯하지만 분명 동시대 사람일 것이다. 그들이 ◌◌한 연대도 결코 고악보다 늦지 않다.
이것은 그가 ‘애석’하게 여기는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그로 하여금 이 글을 써서 비평가의 비평 연대를 추측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위핑보의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비평가의 신분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그 비평가가 제시한 뒤쪽 이야기를 속작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비평가와 작자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비평에서 제시된 어떤 사실들과 관점이 위핑보 자신의 관점과 어긋나면 그는 회의를 표명했다. 예를 들어서 비평에서 “뒤쪽 30회[後之三十回]”라고 언급한 부분을 위핑보는 제80회 이후에 30회가 더해진 것으로 추측했지만, 그 자신은 30회의 분량으로는 뒤쪽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정말 무척 의심스럽다.”라고 하면서 지연재 비평이 제시하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위핑보는 〈뒤쪽 30회의 《홍루몽》〉에서, “이 책의 80회에 서술된 사건으로 보면 80회는 기껏 전체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하며, 최소한 작품 전체에서 9분의 4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예는 비평에서는 작품의 뒤쪽에서 화습인이 “가보옥을 모시게[供奉玉兄]” 되므로 결코 박정하지 않다고 한 사실이다. 이것은 화습인에 대한 위핑보의 관점과 다르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큰 착오’라고 하면서, “비평가가 그저 칭송만 하는 바람에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위핑보가 이 글을 쓸 때는 비평가의 신분이 불명확하고 비평가와 작자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평 역시 특별한 중요성이 없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비평가의 신분이 비평의 권위와 관련된다는 점은 위핑보의 〈뒤쪽 30회의 《홍루몽》〉(수정 원고)에서 알 수 있다. 이 수정 원고는 1950년 10월 28일에 쓴 것이다. 원래 원고에서 수정 원고가 나오기까지 28년의 간격이 있는데, 그 사이에 또 갑술본과 갑진본이 발견되었다. 이 두 필사본에는 모두 《지연재 중평 석두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것들을 유정본과 비교해 본 뒤에 위핑보는 척본의 비평 역시 “지연재 비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28년 전에 그가 그 비평에 대해 품었던 회의도 적지 않게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뒤쪽에 몇 회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28년 전의 위핑보는 정고본에서 40회 분량으로 뒤쪽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것은 여전히 너무 촉박하다고 지적했다. “마무리를 지을 때 흡사 장부를 적는 것 같아서” 척본의 비평에서 제시하는 ‘뒤쪽 30회’에 대해 큰 의문을 품고, “지나치게 촉급한 게 아닌가!” 하고 주장했다. 수정 원고를 쓸 때에 이르러서는 ‘지연재’라는 명호가 이미 확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위핑보가 ‘지나치게 촉급하다’고 했던 초기의 의문 역시 다시 제기되지 않았다.
화습인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위핑보는 28년 전에는 비평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비평가가 화습인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비판하는 말을 쓰지 않은” 데에 반대하면서 그는 “비평가가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선입견이 너무 깊다.”고 비판했다. 나중에 지연재 비평의 권위가 확립되자 위핑보는 여전히 비평가의 견해가 작자의 뜻과 같은지는 의심스럽게 여기지만, 어쩔 수 없이 초기의 관점이 “우리의 편견”이라고 인정해야 했다. 위핑보의 비평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사실 비평가의 신분과 비평의 권위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핑보의 예를 통해 비평의 권위는 사실 비평가의 신분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홍학 연구자들이 비평가의 신분을 어떻게 밝히는가 하는 것은 돌아보고 토론할 가치가 충분하다.
2) 비평가의 신분과 비평의 권위 설립
《홍루몽》 연구자들이 비평가의 신분을 어떻게 밝히는지 거슬러 고찰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자. 그것은 바로 《홍루몽》 연구자들은 줄곧 지연재와 기홀수의 진짜 성명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문헌상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평가의 신문을 밝히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1) 독자 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의 계시
제인 톰킨스(Jane P. Tompkins)가 편집한 《독자 반응 비평: 형식주의에서 구조주의까지》에는 노먼 홀랜드(Norman Hollans: 1927~ )의 〈전체, 개성, 텍스트, 자아〉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안에 담긴 논점이 우리의 이 문제를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듯하다.
독서를 할 때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상징화하고 최종적으로 복제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이용한다.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적응의 특별한 형식들을 성립시킨다.
이 때문에 그는 해석을 개성의 기능(a function of identity)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독자로서 우리는 각자 다른 종류의 외부 정보를 활용한다. 각자 자신이 관심 있는 특정한 주제를 찾으려 한다.”고 했다.
주관 비평(Subjective Criticism)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이론가 블라이치(David Bleich: 1940~ )의 독서 모델도 ‘정서적 반응(affective response)’과 ‘조합적 반응(associative response)’을 포괄한다. ‘정서적 반응’이란 독자가 “시를 읽을 때 느끼는 실제적인 정서”(공포와 만족, 격분 등을 포괄하는)를, ‘조합적 반응’이란 ‘정서적 반응’을 받음으로서 야기된 과거의 경험을 가리킨다. 사실 《홍루몽》 필사본의 비평은 모두 비평가의 강렬한 개성과 신분적 특징(예를 들어서 모자지간의 사랑에 대해 극도로 감동하고 대가족의 삶과 가문 출신에 대해 특별히 민감한 것)을 구현하고 있다. 동시에 비평 역시 비평가의 ‘정서적 반응’과 ‘조합적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전자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제9회에서 가보옥이 서당에 갔다가 문득 임대옥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황급히 임대옥의 방으로 가서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에 대한 척서본의 두 줄로 된 협비(夾批): 정말 오묘하다. 돈 문장의 흐름이 멈추고 바뀌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나는 이미 잊고 있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마음이 후련해졌다. 조금도 빠진 것이 없다.
제73회에서 사람들이 가탐춘에 대해 험담하는 장면에 대한 경진본의 두 줄로 된 협비: 죽여! 죽여! 죽여야 해! 이런 무리들은 오로지 사랑하는 남녀 사이를 갈라놓기만 한다. 나는 그런 이들의 미혹에 당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제 이 글을 읽으니 정말 칼을 뽑아 페이지를 자르고 싶다.
제13회에서 왕희봉이 녕국부의 다섯 가지 병폐를 분석하는 장면에 대한 경진본의 미비: 다섯 가지 사건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대성통곡을 억누르지 못했다. 30년 전 작자는 어떠했겠는가?
이런 예는 다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조합적 반응’에 대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제8회에서 사람들이 가보옥의 서예 솜씨가 갈수록 훌륭해진다고 칭찬하는 장면에 대한 갑술본의 미비: 나도 이런 거짓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이제 이걸 읽으니 얼굴이 달아오르며 웃음이 나온다.
제13회에서 취금강(醉金剛) 예이(倪二)가 가운(賈芸)에게 돈을 빌려준 장면에 대한 경진본의 미비: 나는 30년 동안 금강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 보았고 금강보다 못한 사람도 많이 만나 보았는데, 애석하게도 책에서는 그 훌륭한 이름을 분명히 적지 않았으니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임오년 초여름.
제28회에서 가보옥과 설반(薛蟠) 등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 대한 경진본의 미비: 큰 잔에 술을 마시니 서쪽 사랑채에서 구대영지(九臺靈芝)가 난 날이다. 여기까지 주석을 달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임오년 중양절.
이런 비평들이 바로 블라이크가 말한 ‘조합적 반응’이다. 비평에 비평가의 뚜렷한 특징과 지나간 일에 대한 무한한 감개(感慨)가 드러나기 때문에 《홍루몽》 연구자들은 비평가의 신분에 대해 특별한 흥미를 느끼며, 심지어 비평가와 소설 소의 인물을 억지로 비교하여 지연재가 곧 사상운이라고 주장하거나(저우루창), 가보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후스, 우스창). 이런 주장은 ‘자서전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홍루몽}i의 해석 문제를 검토할 때 소홀히 할 수 없다. 다음에서는 우선 “비평가의 신분과 비평의 권위”에 대해 검토해 보자.
(2) 지연재 비평의 신뢰성: 후스의 ‘당형제설(堂兄弟說)’과 ‘작자의 자주설(自注說)’
앞서 언급했듯이 후스는 〈고증〉(개정판)에서 비평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긴 했지만 그 가치를 높게 보지는 않았다.
1927년에 누군가 후스에게 갑술본을 주려 했는데, 이 필사본의 제목은 《지연재 중평 석두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에 후스는 ‘중평’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 필사본을 가벼이 여겼지만, 나중에 원본을 검토해 보고 나서야 중시하기 시작했다. 1927년 8월 12일에 그는 〈쳰쉬앤통(錢玄同)에게 보낸 편지〉에서 갑술본의 지연재 비평을 인용하여 두 가지 문제를 논의했다. 첫째는 조설근이 태어난 연도이고 둘째는 진가경의 죽음에 관한 진상(眞相)이었다. 〈쳰쉬앤통에게 보낸 편지〉는 아주 간단하지만 최소한 그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첫째는 비평가 신분의 특수성(“비평가는 조설근의 본가 친척으로서 조설근과 아주 친한 벗이었다.”)이고 둘째는 비평을 한 시간(“그 가운데 먹으로 한 비평은 조설근 생전에 한 것이고 주필[朱筆]로 쓴 비평은 그의 사후에 한 것이다.”)이었다. 그러나 후스는 그 해 안에는 유정본과 갑술본의 비평에 대해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같은 해 연말에 쓴 〈건륭 임자본(壬子本) 《홍루몽》 중인(重印) 서(序)〉도 위핑보와 마찬가지로 유정본 비평에서 뒤쪽 이야기를 거론한 것을 속작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1928년 2월 12일에서 16일까지 후스는 〈《홍루몽》 고증을 위한 새로운 자료〉를 쓰면서 비평에 대해 상당히 깊이 연구했다. 이때 그가 갖고 있던 갑술본은 국내 유일의 판본(정식 명칭은 《지연재 중평 석두기》인데 후스의 글에서는 ‘지본[脂本]’으로 칭했음)이었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갑술본과 유정본의 비교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갑술본이 유정본과 다른 점은 바로 비평가의 신분과 관련된다. 우선 갑술본은 제목에서 “지연재 중평”이라고 표명함으로써 유정본보다 비평가의 신분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갑술본 제1회에서 “종이를 가득 채운 황당한 말들에, 한 움큼 쓰라린 눈물 흐르네![滿紙荒唐言, 一把辛酸淚]”라는 문장 다음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지연재가 갑술년에 베껴 쓰면서 다시 비평할 때에는 여전히 《석두기》라는 제목을 썼다. 출처는 이미 밝혔으니 이제 돌 위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지 보자. 至脂硯齋甲戌抄閱再評仍用《石頭記》. 出則[處]旣明, 且看石上是何故事.
이 가운데 “출처는 이미 밝혔으니” 이후의 문장은 유정본에도 있지만, 이 구절 앞의 한 문장(15자)은 갑술본에만 있다. 이것은 즉시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중요한 정보에 주목하게 한다. 첫째, 비평가는 지연재이다. 둘째, 비평가가 비평할 때 작자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건륭 19년, 즉 서기 1754년). 그러나 후스의 착안점은 분명히 비평 자체가 아니라 비평의 내용을 통해 《홍루몽》의 저작 시간을 추정하는 데에 있었다. 후스가 이 글에서 인용한 첫 번째 비평은 다음과 같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쓰라린 눈물로 통곡하며 이 책을 쓸 수 있었다. 임진년 섣달 그믐날 밤, 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조설근은 눈물이 모두 말라 세상을 떠났다. 나도 그를 위해 통곡하다가 눈물이 다 말라 가는 참이었다. 언제나 청경봉을 찾아가 돌 형에게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머리에 부스럼 있는 승려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어찌 하랴! 아아, 슬프구나! ……갑오년(1774) 8월 눈물로 쓰다.
위에 든 예와 마찬가지로 후스가 주목한 것은 여전히 비평에 담긴 작자의 생졸년에 대한 정보였지 비평가와 작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었다.
후스가 인용한 두 번째 비평은 다음과 같다.
조설근에게는 예전에 《풍월보감》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아우 당촌(棠村)이 서문을 쓴 것이었다. 이제 당촌이 이미 죽어서 내가 새 필사본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것을 따랐다.
이에 후스는 《풍월보감》이 《홍루몽》의 초고이고, 당촌은 본문에 등장하는 공매계(孔梅溪)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후스가 작자의 창작 과정을 극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의 내용 가운데 곳곳에서 작자를 언급하고 비평가가 작자의 창작 과정에 대해 환히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점으로 보건대 비평가는 작자와 무척 친밀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스는 우선 “지연재는 조설근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으며, 조설근의 형제와도 아주 잘 알고 지냈다. 아울러 나는 그가 조설근의 친척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의심스럽다.”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홍루몽》 제13회에서 진가경이 왕희봉의 꿈에 나타나 당부하는 장면에 대한 몇 가지 비평을 보고 나서 후스는 “이런 비평들을 보면 비평가 지연재는 조설근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며, 제13회에 기록된 녕국부의 일이 바로 그의 집안일이니, 그는 아마 조설근의 당형제(堂兄弟)일 것이다. 어쩌면 조옹(曹顒) 또는 조기(曹頎)의 아들일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이 얘기 가운데 후스가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고 판단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루몽》 고증의 새 자료[考證《紅樓夢》的新材料]〉 제5절의 제목은 “지연재 판본과 척료생 판본[脂本與戚本]”이다. 이 저에서는 비평 연구의 중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후스는 갑술본을 이용하여 유정본을 교정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1. 《홍루몽》의 최초 저본은 비평과 주석이 달린 것이다.
2. 최초의 비평과 주석 가운데 적어도 일부분은 조설근 자신이 쓴 것이며, 그 나머지는 지연재와 같이 그와 가까우면서 신뢰할 만한 벗이 쓴 것이다.
첫 번째 결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첫째, 이 결론은 지연재 비평이 필사본과 동시에 세상에 나왔음을 반영하며, 후스 본인도 이 점을 이미 의식하고 있었다. 둘째, 후스는 첫 번째 결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갑술본과 유정본의 비평 및 주석이 비평이 달린 하나의 원본에서 나왔지만, “지연재 판본(갑술본)은 직접 베껴 쓴 것이고 척료생 판본(유정본)은 간접적으로 베껴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갑술본과 유정본이 같은 저본에서 나온 것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자. 순수하게 비평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후스의 이 결론은 유정본 비평의 작자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당시 유정본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판본이었기 때문에, 학자들이 비평가가 누구인지 모르면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스의 두 번째 결론은 논거가 유력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 중요성은 결코 첫 번째 결론에 못지않다. 후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작자가 직접 주석을 달았다.’라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첫째, 작자 스스로 비평과 주석을 붙인 작품을 내는 것은 소설가에게서 흔히 있는 일이다. 둘째, 대다수의 비평과 주석은 모두 작자 스스로 붙인 듯한 어투이다. 첫 번째 결론의 이유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증거를 제시하지 않아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작자가 반드시 “스스로 비평과 주석을 붙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론의 이유는 후스의 개인적인 인상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제1회의 “하늘 보수할 재간 없어 환영의 형체로 속세에 들어가다[無材補天, 幻形入世].”라는 구절에 대한 비평에는 “이 여덟 글자는 작자 일생의 참회와 한이다[八字便是作者一生慚恨].”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후스는 “이런 말은 당연히 작자 스스로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연히’라는 표현을 다른 독자들도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우루창과 우스창은 후스의 이런 견해에 반대했다.
나중에 후스는 또 갑술본과 유정본의 총평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원본에는 비평 및 주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회에 총평이 있다. 그것들은 각 회의 본문 앞에 적혀 있어서 제1회의 이 순서와 비슷하니 아마 이것들 역시 작자 스스로 쓴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일부 총평은 각 회의 뒤쪽에 적혀 있으며 똑같이 먹으로 쓴 해서(楷書)이지만, 이것은 비평가가 덧붙인 것이지 작자가 원래 쓴 것은 아닌 듯하다.
여기서 ‘아마[大槪]’, ‘듯하다[似是]’라는 표현들은 후스의 주장이 추측에 지나지 않을 뿐 “작자 스스로 비평과 주석을 붙였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강력한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후스는 갑술본의 비평을 참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평가의 신분에 대한 그의 결론(비평이 부분적으로는 작자에게서, 부분적으로는 지연재와 같은 작자의 친우에게서 나왔음)은 위핑보의 추측(비평가는 응당 조설근과 동시대에 살았지만 연배가 조금 늦은 인물일 것)보다는 훨씬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의 신분이 이전보다 뚜렷해졌기 때문에 후스도 위핑보보다 비평을 더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뚜렷한 예는 화습인이 기관(琪官)을 시집보낸 일에 대한 비평에서 그들 부부가 여전히 “돌 형을 모시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供奉玉兄, 得同終始]”라고 한 점이다. 일찍이 위핑보는 비평가가 “책을 잘 읽지 못하고” “선입견이 너무 깊다.”고 하면서 정고본에 서술된 화습인의 결말이 “조설근의 뜻을 잃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스는 이 비평을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위핑보와 전혀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즉 “고악의 속작은 조설근의 원래 의도와 크게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가의 신분을 확립하는 것은 비평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과 마찬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후스는 지연재 판본(갑술본)에만 있는 비평을 자세히 연구했고 또 자신이 이미 비평가와 작자가 아주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연재가 조설근의 사라진 원고를 본 적이 있다고 믿었다. 지연재 비평에서 언급하는 뒤쪽 이야기는 바로 조설근의 사라진 원고에 들어 있는 것이지, 위핑보가 얘기하는 ‘속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후스의 이 글은 비평의 권위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비평 연구를 크게 발전시킨 셈이다.
1933년에 이르러 후스는 쉬싱수(徐星署)가 소장하고 있던 《지연재 중평 석두기》(경진본)를 보게 되었다. 그 해 1월에 그는 〈건륭 경진본 《지연재 중평 석두기》 필사본의 발문〉을 써서 비평가의 신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그는 경진본의 먹으로 쓴 비평에 ‘감당(鑑堂)’과 ‘의원(漪園)’이라는 서명이 있고, 주필로 쓴 비평에 지연(脂硯), 매계(梅溪), 송재(松齋), 기홀(畸笏)이라는 서명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감당’과 ‘의원’에 대해 후스는 후세의 소장자라고 추측했지만,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더 이상 고증하지 못했다. 주필로 비평을 단 네 명의 경우 지연재의 신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견해에 중대한 수정을 했지만, 나머지 세 명에 대해서는 더 이상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1928년에 그는 지연재를 조설근의 당형제라고 추측했는데, “이제 이 판본(경진본)을 보고 나는 지연재가 바로 연지(胭脂)를 즐겨 먹는 가보옥 즉, 조설근 자신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이 글에서 제시한 논거는 더 이상 “소설가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거나 “작자 스스로 비평과 주석을 단 어투” 같은 논리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세 가지 새로운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이유는 비평 자체에서 얻은 것이다. 경진본 제22회에서 가보옥의 생일에 왕희봉이 연극을 고르는 장면에 대한 주필 비평에는 “왕희봉이 연극을 고르고 지연재가 붓을 든 일에 대해서는 이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억울하지 않은가?”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지연재가 붓을 든 일[脂硯執筆]”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후스는 그 구절을 지연재가 붓을 들고 왕희봉을 대신해 연극을 골랐다고 해석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왕희봉은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연극을 고를 때 반드시 다른 사람이 붓을 들어야 하는데, 이 회에서는 가보옥이 붓을 들었다는 설명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자격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람은 가보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평가 지연재가 작품에 등장하는 가보옥과 동일한 인물이며, 가보옥은 또 작자인 조설근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 이유는 비평가의 이름에서 상상한 것이다. 후스는 “‘지연’이란 그저 연지를 즐겨 먹는 어리석은 돌일 뿐이며, 그것이 작자의 탁명(託名)이라는 것은 본래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 이유는 후스의 가설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얘기했다. 즉 “당시 《홍루몽》을 막 썼을 때는 결코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런 상세한 주석을 달 만큼 ‘《홍루몽》에 빠진’ 독자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지연재 비평 판본이라는 것은 바로 원래 작자의 비평과 주석이 달린 저본을 가리키는 것이지, 정해(丁亥)나 갑오(甲午)의 비평이 달린 판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후스가 제시한 세 가지 이유는 모두 문제가 있다. 세 번째 이유는 후스의 가설이지 확실한 증거가 아니다. 두 번째 이유는 추론이 지나치게 간단하여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우선 ‘지연’을 “연지를 즐겨 먹는 어리석은 돌”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 볼 여지가 있다. 저우루창은 일찍이 “‘지연’이 ‘연지를 즐겨 먹는다.’라고 해석한 점은 약간 해학적인 느낌이 들며, 벼루[硯臺]가 연지를 즐겨 먹는 그 어리석은 돌이라고 한다 해도 억지스럽다는 혐의가 있다. 조설근이 정말 스스로 그런 호를 만들었다면 그 역시 아주 낯간지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저우루창의 말이 결코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작품에서 연지를 즐겨 먹는다고 서술한 것은 가보옥이지 돌이 아니다. 돌을 가보옥으로 착각한 것은 정고본의 오류로서 실제로는 말이 안 된다. 첫 번째 이유에서 관건은 “지연재가 붓을 든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이에 대해 1957년에 왕페이장(王佩璋)은 이미 “연극을 고르는 데에 연극 제목을 쓸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중에 다이부판(戴不凡) 역시 《홍루몽》 제11회에서 가경의 생일에 왕희봉이 연극을 고르는 장면의 원문을 인용했다.
우씨가 연극 목록[戱單]을 가져오라 해서 왕희봉더러 몇 개 고르라고 했다. ……왕희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네!”하고 대답하고 연극 목록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죽 한 번 훑어보더니, 「환혼(還魂)」과 「탄사(彈詞)」를 고르고……尤氏叫拿戱單來, 讓鳳姐兒點戱, ……鳳姐兒立起身來答應了一聲, 方接過戱單, 從頭一看, 點了一齣《還魂》, 一齣《彈詞》……
이어서 그는 왕희봉이 연극 목록의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 옛날에 연극을 고를 때에는 그저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말로 분부할 뿐이지 ‘붓을 들’ 일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지연(가보옥)이 붓을 들고 왕희봉을 대신해서 연극 목록을 골랐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비평가의 신분에 대한 후스의 탐구를 총괄해 보면 하나의 뚜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먼저 지연재가 작자의 친척이거나 친구라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또 당형제라고 주장했고, 나아가 비평 가운데 일부를 작자의 글이라고 주장했고, 마지막에는 지연재와 작자를 동등하게 취급했다. 후스는 비평을 중시하긴 했지만 사실 저작 상황과 관련된 조목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쳰셴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갑술본의 비평을 언급하면서 “역사 자료로 쓸 수 있는 부분이 아주 많다”고 주장했다. 또 〈건륭 경진본 《지연재 중평 석두기》 필사본의 발문〉에서는 “갑술본 제13회는 이 판본에서 가장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 이 회에 주필로 적힌 총평과 비평(眉評), 협평(夾評)들은 다른 모든 《홍루몽》의 옛 판본들에는 보존되어 있지 않은 자료”라고 했다. 그가 비평의 가치를 정면으로 평가한 적은 없지만 비평가를 작자와 동일시한 것은 어쩌면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실 비평의 권위를 대대적으로 끌어올린 셈이었다. 비평가의 신분과 비평의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핑보가 후스에 비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위핑보의 견해를 분석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