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지역 연행노정의 중절(中節) 구간은 심양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17세기 초, 명·청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곳이기도 하죠. 명·청 전투에 참전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사연과 명나라 붕괴의 기억 때문인지 이 구간을 통과하던 사신들이 심리전(心理戰)을 치르는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에게 새로운 경관이 주는 의미는 남다른 감동과 자기성찰의 기회를 주기도 했는데요,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대표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중절 구간은 무엇보다 사행을 힘들게 한 행역삼고(行役三苦:새벽안개, 낮 먼지, 저녁 바람)의 노정이기도 했습니다.
노정의 괴로움, 모래 바람과 진펄
연행노정의 중절은 심양을 벗어나 산해관으로 이어집니다. 경유지는 탑만촌-영안석교(永安石橋)-요하(遼河,주류하,거류하)-신민-이도정-반랍문-소흑산-광녕성(북진묘,의무려산)-여양-십삼산-대릉하-금주-소릉하-송산-행산-탑산-영녕사(다붕암)-영원성-동관역-중후소-맹강녀묘-위원대-산해관입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참고하면, 성경잡지(盛京雜誌)와 일신수필(馹迅隨筆)에 해당하는데요, 약 14일가량 소요되었고, 일반적인 사행의 경우 보통 11일 거리입니다.
사행길에서 요하 근처의 모래바람은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행역삼고’ 중 ‘낮의 먼지와 저녁 바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북방 몽고 사막에서 불어오는 잦은 황사로 사신들의 발목을 잡기로 유명했습니다. 연행록에는 “요하 일대에서 모래폭풍을 만나 일주일 가까이 움직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당시엔 ‘모래가 입안에 씹힐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엔 황사에 스모그가 더해져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경까지는 만만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도정-반랍문-소흑산 구간은 봄이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을 이루었던 곳입니다. 여름철이면 장맛비에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넘쳐 사행단 행렬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곳은 지대가 낮아 비가 내리기만 하면 강물을 이루고, 땅이 녹으면 무릎까지 빠지거나 말의 배까지 찰 정도였다고 하여 악명이 높았습니다. “요양에서 소흑산에 이르는 7일의 일정이 마치 1년처럼 길게 느껴지고, 귀신의 나라에 온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는 우기(雨期)에 이도정과 소흑산 일대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미 도로가 정비되고 시간이 지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간간이 유사한 장면을 목도 하노라면 과거 선조들의 고단한 사행길이 눈에 선하여 숙연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흑산은 광녕성에 도착하기 전의 작은 도시입니다. 연암 박지원도 이곳에서 쉬어갔던 곳이죠. 흑산에서는 사행단을 위로하는 작은 잔치를 벌이기도 했는데요, 돼지를 잡아 사행에 참여한 아랫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단체 회식’쯤 될까요?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험준한 산과 하천, 끝없는 요동-요서의 황톳길까지 짐수레를 끄는 고단한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먼 곳이니 ‘돼지 회식’으로 말몰이꾼을 비롯한 하예(下隸:부리는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워 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각과 성찰의 공간, 의무려산
연행노정 중절 구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광녕성 서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입니다. 이곳은 사행들의 유람처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1617년 이정구는 『의무려산기』를 남겼고, 1713년 김창업은 관음각에서 묵었고, 1725년 조문명이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의무려산과 각별한 이는 담헌 홍대용(1731∼1783)일 것입니다. 1776년, 숙부 홍억(서장관)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에 참여한 홍대용은 의무려산을 유람하고 각별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실옹’과 ‘허자’가 의무려산에서 세상사와 학문에 관한 문답을 벌이는 내용을 남깁니다. 홍대용은 이 글을 통해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화이관을 해체하는 자각에 이르렀고, 이후 그의 사상이 정립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무려산에 올라 요동벌을 바라보면 탁 트인 시야가 답답하고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답답한 조선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너른 세상에서 새로운 자각과 성찰의 기회로 삼기에 이만한 공간이 있었을까 합니다. 연암 박지원이 요동벌을 보고 ‘호곡장론’을 설파했듯이 말입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연행(燕行)은 세계인식의 장(場)이자 자아성찰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명·청 교체의 현장을 목도하다
중국지역 연행노정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공간이 십삼산(十三山)입니다. 사행의 숙소참이 있었던 곳입니다. 십삼산을 지나면 대릉하(大凌河)가 나오는데, 사행들이 배로 건넜던 장소입니다. 대릉하를 비롯하여 금주를 시작으로 명·청 교체기 격전의 현장들이 이어집니다.
대릉하와 산해관 밖 금주-송산-행산-탑산으로 이어지는 노정은 명·청 교체기 가장 격렬했던 전쟁터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서 볼모생활중이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곳 금주-송산 전투에 청 황제를 따라 종군했었습니다. 연암은 이곳을 지날 때 당시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면서 ‘어육지장(魚肉之場:처참했던 전쟁의 참상을 표현함)’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영원성은 지금의 흥성으로 산해관 밖의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은 명·청 교체기 청의 기세를 꺾어 명에 마지막 승리를 안겼던 명장 원숭환과 후금 누르하치의 일대격전이 치러졌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죠.
사신들이 영원성에 이르면 원숭환과 누르하치의 일대격전에 대한 논평도 많이 했지만, 당시 명장들이 후금으로 투항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기록이 영원성에서 패루에 관한 인상인데, 2개의 패루는 명말의 장수 조승훈·조대수·조대락 일가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죠. 패루의 기묘하고 대단한 위용에 놀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행은 조씨 패루를 통하여 명의 멸망과 쇠퇴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훈을 자랑한다지만, ‘나라를 배신한 장수였으니 오히려 욕되다’는 것입니다. 명·청 교체 이후 이곳을 지나던 대부분의 사신들이 비슷한 견해를 연행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영원성을 통과해 사행단의 필수 답사처인 맹강녀묘를 지나면 산해관입니다.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 산해관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으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이 있습니다. 문명과 비문명으로 대체되는 화이를 가르는 기준은 만리장성입니다. 산해관은 바로 만리장성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조선의 사신들이 관내(關內)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던 문명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성리학적 관념이 베어 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대국의 수도에서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문물과 문화체험, 인적교류에 대한 기대감이 ‘관내’로 들어서면서 더욱 증폭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조선 사신들의 발걸음을 유난히도 설레게 했던 산해관 안, 북경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