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중세의 도시로
도시라 함은?
중국의 도시라고 해도 똑같은 것이 없다. 유구한 역사와 광대한 대지를 자랑하는 중국이기에 다양성이 풍부한 도시를 키워왔다.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점을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진(秦)나라 이래로 주현제(州縣制)를 시행해 온 중국에서 일반적인 도시라면, 주와 현이라는 지방 행정구역의 거점을 말한다. 주현제라는 것은 진대에는 군현제(郡縣制)라 불렸던 지방 통치제도였다.
천하를 제패한 진의 시황제는 각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전국에 시행했다. 그것이 군현제다. 전국시대 이래로 성숙되어 온 시스템으로, 새로운 지배를 군이라 하고 그 아래 현을 두었다. 통치에 임하여서는 중국에서 관료를 파견하고, 철저하게 강한 지배를 관철하려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이 급격한 방법은 반발을 사 진이 붕괴한 뒤에는 일시적으로 군국제(郡國制)로 되돌아갔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분도 많지 않을까? 군은 수대(隋代)에 주로 바뀌었다. 주 가운데 큰 것은 부(府)라고 부른 것도 있다. 진 이래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온 주현제가 바로 그것이다.
통치 시스템은 그밖에도 주(州) 위에 당대에는 도(道)가 송대에는 로(路)가 원대 이래로는 성(省)이 있었다. 그러나 근간은 어디까지나 주현제로, 주 아래에 복수 이상의 현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본으로 말하자면 현 아래 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것들의 행정상의 거점, 곧 주의 거점으로서 주성(州城)과 현의 거점으로서 현성(縣城)이 있었다. 이것이 도시이고, 대체로 엄연(嚴然)했던 성벽에 둘러싸여 그 중간에 지배의 거점인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는 성도 겸했던 것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도시를 ‘성시(城市)’라 부른다.
주, 현이라는 도시 외에도 진(鎭)과 초시(草市) 등으로 불렸던 소도시도 있다. 이것은 당 이래로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교통의 요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를테면 마켓 타운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진은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었고, 초시는 말시(秣市)로, 변변찮은 저자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렸던 것이 오래지 않아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인구가 많은 거대 도시가 발달한 중국에는 서구 중세의 도시보다 큰 것도 많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주, 현이라는 부류를 다룰 것이다. 이쪽이 우리가 갖고 있는 도시라는 감각에 좀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통치 시스템
주성은 관할하는 몇 개의 현이 모여 있는 경계에 있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복수의 현의 접점에 있는 주성은 여러 현에 분할 통치되었다. 당의 수도인 창안(長安)이 창안 현과 완녠 현(萬年縣)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고, 북송의 수도인 카이펑(開封)은 카이펑 현과 샹푸 현(祥府縣)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던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청대 쑤저우의 경우에는 우 현(吳縣)과 창저우 현(長洲縣), 위안허 현(元和縣) 세 현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럼에도 각각의 행정 구역은 현 전체였기에, 문제가 한 층 복잡해졌다.
주성에는 주 전체를 통치하는 정청(政廳)이 있고, 그밖에도 성내를 분할 통치하는 복수의 현치(縣治)가 설치되었다. 각각의 관할을 통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내가 분할 통치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현의 행정상의 담당 지역은 성벽 밖에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 안이 독립적으로 통치되지 않고 있는 복잡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곧 어떤 형태로든 성벽 안만을 대상으로 한 행정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당말 무렵부터 ‘상제(廂制)’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이 등장했는데, 곧바로 우제(隅制)로 이행해 또 다른 문젯거리를 던져놓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요컨대, 중국에서는 아타고 마츠오(愛宕松男)가 원대 도시제도와 그 기원(元代都市制度と其の起源)에서 지적한 대로, 몽골인이 통치했던 원대 이외에는 도시가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같은 성내에서 이웃 현의 관할지로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 처리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관할 현이 당사자의 거주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장례도 중요하다. 장례 인부들 사이에도 세력권이 있기 때문에, 쌍방간의 현 관계자의 이권이 얽힌 문제로까지 발전한다.
다만 이것도 알아줬으면 하는데, 분할 통치라는 게 전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성이 반드시 복수의 현의 접점에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성에 현성 하나가 겹치고 다른 관할의 현은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주성은 하나의 현성에 의해 관할된다. 이를테면, 당송 이래 무역항으로 번영했던 밍저우(明州), 곧 현재의 닝보(寧波)는 인 현(鄞縣)만이 주성에 현치(縣治)를 두었고, 다른 현은 부(府) 아래에 있었다. 주성 하나에 현이 하나인 것이다.
현성의 경우를 보자면, 어쨌거나 행정의 최저 레벨로서, 분할 통치는 이론상으로도 없는 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도시에서 보이는 이러한 몇 가지 현상이 특수한 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여 둔다. 서구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의 도시가 보이고 있는 것은 오토 부르너(Otto Brunner, 1898~1982년)가 서술한 바이다. 도시 국가적인 것이 번창해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자치를 중시함으로써 주위의 농촌과 엄연하게 구별되었다고 여겨지는 서구 중세의 도시도 사실은 다양한 형태가 있었던 것이다.
서구 중세의 도시라면, 아름답고도 휘황찬란한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꽃이 피게 한 북이탈리아의 도시만 머리에 떠오르지만, 이것이 꼭 옳다고만은 할 수 없다.
도시의 인구
중국 도시의 케이스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곧 중국의 도시는 그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데, 여기에 연구의 어려움이 있다. 행정 구역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인구도 명확하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구를 나타내 보여주는 도시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당대의 창안(長安)과 송대의 카이펑(開封)이나 항저우(杭州)의 경우도 명확한 인구 통계는 없다. 카이펑의 경우 그 정도의 도시라면 백만 가량의 인구를 상정할 수 있지만, 사료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항저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150만 명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도 남송의 유민인 우쯔무(吳自牧)의 몽량록(夢梁錄)에 씌어 있는 약간 부정확한 인구에 관한 기록에 의존한 것이다. 그 때문에 저우미(周密)의 무림구사(武林舊事) 가운데 있는 “항저우 사람은 하루에 30장(丈)의 나무로 살아간다. 30만 가구를 가지고 계산하면 ‘쌀을 찧을 때’ 대체로 10가구에서 방망이 한 개 분을 소모한다. ‘30만 가구로 그것을 계산하면’ 30장이 된다.”는 한 마디조차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물론 고려할 만한 사료는 몇 가지 있지만, 그런 논의를 일별하면 언제나 쥴 베르느의 해저 2만리를 떠올리게 된다. 잠수함 노틸러스호에서 탈출하려는 세 사람이 공기의 소비량으로 승조원의 수를 어림잡는 장면이 있다. 계산 결과 625명이라는 숫자가 나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는 그 10퍼센트 정도를 생각했지만, 나온 숫자에 아연해졌던 것이다.
그런 근사치가 나와도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의 사이즈와 스케일은 변함없이 선명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도시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야만 도시다. 그래서 도시에 엄연하게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이상, 도시의 사이즈나 스케일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도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도시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곤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