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는데, 대부분 이러했다. 무슨 무슨 날에 점을 친다. 아무개 사관이 묻는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길한가, 길하지 않은가? 몇 월(某某日卜 某史官问 要做某事 是吉? 是不吉? 某月).
갑골문의 내용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기록한 것, 둘째, 이웃 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일, 셋째, 왕의 출행(出行)에 관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외에도 상왕의 질병, 사냥, 아이를 낳는 일 등에 대한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갑골문을 통하여 상왕의 많은 사적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수집된 갑골문은 이미 이십 만 편(片)에 달한다(기록자 주; 일설에는 십여 만 편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발굴했지만, 뒤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발굴 작업을 벌였다. 미처 인쇄되지 않은 많은 것들은 중국과학원(中国科学院)에서 모두 인쇄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갑골문에 대한 연구는 이미 60년 간 진행되었다.(기록자 주; 이것은 1966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글자 해독에만 그쳤으나, 뒤에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스승인 왕궈웨이(王国维)가 여러 측면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상대의 역사를 상당히 명확하게 해놓았다. 그는 사기(史记)에 기록된 상대의 제왕, 지리(地理) 상황, 제도(制度) 등을 다시 연구하여 더욱 분명히 해놓았다.
갑골문의 연구는 중국의 역사과학과 고문자학 가운데 새로운 분야로 갑골학(甲骨学)이라 부른다. 최근 40년 간 갑골문의 연구에는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 왕궈웨이 때에는 갑골문 1900자밖에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이미 5000여 자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글자는 고증되지 않아서 추측을 해야 하고, 어떤 글자는 의미만 알 수 있을 뿐 그 독음(读音)은 알 수가 없으며, 또 어떤 글자는 아무리 추측을 해도 알 수가 없는 것도 있다. 현대에 갑골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는 궈모뤄(郭沫若), 지린(吉林) 대학의 위싱우(于省吾), 중산(中山) 대학의 상청쭤(商承祚),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의 부원장인 탕란(唐兰)이 있다.
고문자의 고증에는 갑골문과 종정문(锺鼎文)의 고증이 포함된다. 60년 동안 종정문은 꽤 많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동기(铜器)는 상대(商代)의 묘에서 출토된 사모무대정(司母戊大鼎)이다. ‘사(司)’라는 것은 제사를 뜻하는 것이고, ‘무(戊)’는 사람의 이름이다. 상대에는 종종 자신의 생일을 이름으로 사용했으므로 ‘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대정(大鼎)은 1,700근이나 되어 소 한 마리를 넣을 수 있다.
상대와 주대 초기에는 제사 때 쓰는 예기(禮记)로 사용하기 위해 각종 종(锺)과 정(鼎)같은 동기(铜器)를 주조했다. 그 이후 가짓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자 그것은 일상 용기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감상만을 위한 ‘농기(弄器)’도 생겨났다.
이들 종(锺)과 정(鼎) 등의 동기 위에는 정교한 무늬뿐만 아니라 문자도 새겨져 있는데, 바로 이것을 ‘명문(铭文)’ 또는 ‘금문(金文)’이라고 부른다. 종과 정의 명문 중에는 단지 몇 자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몇 십 자 또는 몇 백 자가 되는 것도 있다. 또한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명문’도 있다. 그러므로 역대로 전해져 오는 동기, 그리고 상대와 주대의 유적과 묘지에서 출토된 동기의 모든 금문은 상대와 주대의 사회 및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해방 전에는 대량의 동기가 외국인에 의해 출토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름뿐이다. 이를테면, 미국에는 매우 많은 수의 중국의 고물(古物) 동기가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서우춘초기(寿春楚器)라는 것이 있다. 서우춘이라는 지역은 안후이(安徽)에 있다. 원래 전국시대(战国时代)에는 채(蔡)의 땅이었으나 뒤에는 초의 땅이 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초의 유물은 상당히 많은데 특히 그 중에서도 해방 후에 출토된 것이 많다. 그 중에는 채의 것도 있고 초의 것도 적지 않다.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데 고대 동기의 종(锺)․정(鼎) 문자를 고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죽간(竹简)을 고증하고 연구하는 것 역시 고대 사료(史料)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죽간으로는 창사(长沙)의 초나라 무덤에서 나온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전국시대의 사건이 적잖이 기록되어 있다. 이 초나라 묘지는 항일전쟁(抗日战争) 기간에 출토된 것으로 묘 자리가 좋고 공기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죽간이 부패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대(汉代)의 사람들은 간(简)에 글씨를 썼다. 한간(汉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한대의 목간(木简)과 죽간을 가리킨다. 최근 몇 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한간을 대량으로 발굴했다.
그밖에 우웨이(武威) 한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웨이는 간쑤(甘肃)에 있다. 이것은 해방 후 1959년에 출토된 것으로, 이미 정리가 된 것은 손으로 베낀 의례(仪礼)로 서한(西汉) 시기에 필사한 것이다. 이 책은 예절과 의식만을 다룬 유가 경전(儒家经典)으로 한대의 경학(经学)을 연구하는 데 큰 가치가 있다.
또 쥐옌(居延) 한간이라는 것이 있다. 쥐옌은 간쑤(甘肃)에 있는 지역이다. 이 쥐옌 한간은 1930년에 한대의 봉수(烽燧)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소량의 죽간과 더불어) 대량의 목간 가운데에는 서신․잡기(杂记)․경적(经籍)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한대의 정치 토지제도․군사조직․변방의 설치에 대해 매우 가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수년에 걸쳐 각지에서 발굴된 다량의 한간은 한대와 한 이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본 자료로, 당연히 중요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증학적 연구에 더욱더 힘써야 할 것이다.
고학(古学)을 정리할 때에는 많은 방면의 고서를 고증해야만 한다. 고서의 고증과 연구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제 둔황(敦煌) 석굴에 소장되어 있던 고서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둔황은 중국 간쑤성 서쪽 끝의 지방으로서 ‘돈’은 ‘크다’, ‘황’은 ‘성하다’라는 뜻이다. 이 지방은 한대부터 일찍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성했던 곳이다.
진대(晋代)의 화상(和尙)인 웨쭌(乐尊)이 사람들을 모아 둔황성 동남쪽의 산에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 후 천년이 지난 수(隋), 당(唐)대에는 절정에 이르러 동굴이 천여 개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에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렸다. 이 동굴 안에는 진흙으로 빚은 불교의 신상(神像)과 사람의 소상(塑像)과 벽화가 많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둔황 동굴에 대량의 고서가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저명한 것은 ‘장경동(藏经洞)’으로 이 동굴에는 진(晋)에서 당․송에 이르는 10개 왕조의 불경이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갖가지 문자로 씌어진 소설(小说)과 호적(户籍), 계약서(契约书), 그리고 사곡(词曲) 등이 있다.
여기에 소장되어 있는 고서는 모두 두루마리 책(卷书)으로서 수량이 적지 않아 3만 권 짜리도 있다. 북송 때는 이 일대에 병란(兵乱)과 전란(战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서적들을 동굴 속에 넣어 ‘장경동’ 바깥을 봉하고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벽화 안쪽이 큰 서고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청 말 광서(光緖) 26년(1900년)에 우연한 계기로 동굴이 무너지자 비로소 그 안쪽에 책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곳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후 도사인 왕위안루(王圆箓)라는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것을 신선이 내린 것이라고 여겨서 환자가 생기면 곧 이 고서들을 태워 그 재를 선약(仙药)으로 마시게 함으로써 병을 치료하는 데 썼다. 뒤에 영국의 고고학 연구팀이 신쟝(新疆)에서 간쑤로 왔다. 이 팀을 이끌고 온 슈타인은 헝가리인으로서 이 사실을 듣자마자 서둘러 와서 왕위안루를 속여 은 500냥으로 그를 매수했다. 슈타인은 이곳에서 다량의 고서를 탈취해 갔다. 그 가운데에는 경․사․자․집(经史子集)을 포함한 많은 서적이 있었는데, 당연히 불경이 가장 많았다. 이들 서적 중에는 신쟝의 고대 문자의 하나인 투훠뤄(吐火罗) 문자로 씌어진 책이 있었고, 고대 페르시아인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의 경서도 있었다. 중국 명대(明代)에 있었던 명교(明敎)는 본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고에는 도교의 경서․민가(民歌)․중국 최초의 각판서(刻板书)인 수대(隋代)의 각판서가 있었다. 현재 중국 내에는 송대(宋代)의 각본만이 있다. 대서동(大书洞) 가운데는 당대의 고서, 예를 들어 당 태종(太宗) 시대의 저명한 서법가(书法家) 어우양쉰(欧阳询)의 화도사비(化度寺碑)를 탁본한 최초의 탁본서적(拓本书籍)이 있다.
중국어를 몰랐던 슈타인은 그것들 대부분을 영국으로 보냈다. 그 후 프랑스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프랑스의 베이징 주재 대사관 무관(武官)인 펠리오는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둔황으로 가서 중국에서 실전된지 이미 오래 된 고서적들을 정밀하게 선별하여 가지고 갔다. 그는 유명한 한학자였으므로, 이 고 서고에서 가장 진귀하고 뛰어난 것들을 가져갔던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 소식이 베이징에까지 전해져, 청조에서는 간쑤의 지방관에게 서적을 베이징으로 운송해 오도록 명령했다. 이때에는 그래도 8000권의 서적이 있었으나, 도중에 탐관오리들이 많이 훔쳐간 까닭으로 8000권이 채 못 되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남은 책을 둘로 나누어서, 다시 말하면 1권을 2권 짜리로 만들어서 8000의 숫자를 채워 베이징으로 운반했다. 처음에 그들은 이 서적을 학부(学部)에 놓았는데, 이때의 학부상서(学部尙书)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좋은 것만을 뽑아서 일본인에게 팔아 넘겼다. 마지막에는 베이징 도서관에 두게 되었지만, 항전 이전에는 또다시 국민당(国民党)에 의해 미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상의 사실은 나라의 치욕거리라 할 만하다.
이상에서는 청대의 고사(古史) 정리, 고 경서(古经书), 고 문자, 고 기물(古器物), 고서, 둔황 서고의 고증에 관한 상황을 간략히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