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11일, 구졔강(顾颉刚)선생이 고증학, 곧 청대의 고학 정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대의 황제들은 청대 사람들이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담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청대 초기의 사람들이 중원(中塬)으로 들어온 직후 몇몇 황제들은 여러 차례의 문자옥(文字狱)을 통하여 문인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취했다. 일반 문인․학사(学士)들은 자신의 의견을 나타낼 수 없었고 시정(时政)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가령 시(诗)나 문장(文章) 가운데 한 글자, 한 구절이 적절치 않아도 사형을 받고 멸족(灭族)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만이(蛮夷)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되었는데, ‘이(夷)’자를 ‘彝’로 바꾸어야만 했다.
일반 유학자들은 경언대의(经言大义)에 관하여 감히 담론할 수 없었고, 특히 당시의 현실과 관련된 의리(义理)․경제(经济)에 관한 연구와 토론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고대 전적(典籍)의 ‘장구(章句)’를 뒤지는 데에만 쏟아 넣음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고증학이 발생했다. 고증, 이것은 고서(古书)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한 책을 다른 책과 대교(对校)하여 모순되는 점을 찾아내고 조사․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사서(史书)와 사료(史料)를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청대 사람들은 바로 이 고증의 방법으로 고서를 읽어 내는 데 뛰어났다. 고증은 치학(治学)의 한 방법으로 각 시대마다 모두 존재했지만, 청대에, 특히 건륭(乾隆)이 즉위하자 경학의 고증을 크게 제창했다. 옛 경전에 대한 고증은 청의 조정을 안심시켰다. 그들은 문인들이 오래된 종이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그들에게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고증학은 조정의 격려 하에 롼위안(阮元)․비위안(毕沅) 등 몇몇 고관들이 창도(倡导)함으로써 매우 성행하게 되었다. 건륭 때 한림(翰林)․쳰다신(钱大昕)은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异)》를 저술했다.
최초의 고증학 서적은 청대 구옌우(顾炎武)의 《일지록(日知录)》이다. 구옌우의 치학 방법은 확실히 청대 고증학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지방에 가서 비석을 보든 고적을 보든 반드시 고증을 했다. 그는 ‘만 권의 책을 읽으면 만 리를 간다(读万卷书, 走万里路)’고 말하면서 집안에서만 하는 독서는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건륭, 가경(嘉庆) 연간의 많은 학자들은 모두 학술 연구에서 고증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학문과 고증을 같은 위치에 놓아 연구도 고증, 학문도 고증이며, 고증 이외의 것은 결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고서(古书)는 넓디넓은 바다와 같이 매우 많다. 수천 년을 거치면서 대대로 베껴 내었으니, 착오와 누실(漏失), 혼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어떤 고서는 이미 읽을 수조차 없었다. 고증학자들은 매우 정밀한 교감(校勘) 방법으로 거의 모든 중요한 고경 고적(古经古籍)들을 상세하게 고증하고 바로잡아서 후세에 읽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감소시켰다. 이미 읽어도 뜻이 통하지 않게 되어버린 몇몇 서적들이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된 것은 이들 고증학자의 공적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쉬쑹(徐松)은 도광(道光) 때의 사람으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신쟝(新疆)으로 유형(流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고서에 기록된 물길(水道)이 자신이 직접 보아 온 실제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서역수도기(西域水道记)》라는 책을 썼다. 고증에 관한 청대의 저작은 수백 부에 달했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고서에 대한 고증이다.
다음은 고기물(古器物)의 고증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자.
고대 기물(器物)에 대한 고증은 송대로부터 시작되었고 청 건륭 때 들어와 성행했으며, 건륭제가 수집한 고대 기물이 가장 많았다. 건륭 때에는 《서청고감(西淸古鉴)》이 편찬되었다. ‘서청’은 황궁의 한 전각의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많은 고대 기물과 그 기물 위의 문자들도 하나하나 그려내었다. 이것은 고대사를 고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고기물에 대한 고증이 처음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단지 고기물 위에 새겨진 문자만을 고증했다. 황제의 제창 하에 이러한 기풍은 고위 관리들, 거부(巨富), 그리고 유학자들에게까지 퍼졌다. 이렇게 하여 뒤에는 ‘이기관지(彝器款識’라 부르는 고대 문자를 본떠서 그리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기’는 바로 종정(鐘鼎)의 한 종류다.
최근 백년 동안의 고증학은 고학(古学)을 조사한다기보다는 고물(古物)의 고증에 힘써 왔다. 이제 계속해서 고증학의 다른 면, 곧 고대 문자의 고증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구 선생은 고대 문자가 모두 형체를 본뜬 것(象形)이라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 문자 역시 상형문자다. 후에 중국 문자에는 형체를 본뜬 것 외에 소리를 나타낸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성(姓)인 ‘구(顾)’자에서 ‘고(雇)’는 소리이고 ‘혈(页)’은 사람, 즉 형체다. 나의 성인 ‘허(何)’자에서 ‘인(人)’은 형체이고 ‘가(可)’는 소리다.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자의 기록에는 매우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청대에는 《설문해자(说文解字)》에 대한 고증이 매우 많았다. 즉 동한(东汉) 시대의 소전(小篆)을 연구하여 소전체(小篆体)를 알게 되면 대전(大篆)을 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고대 종정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청조 말엽에 우다청(吴大徵)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중일전쟁의 패장(败将)으로서 후난(湖南)의 순무(巡抚)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종정문에 대해 매우 많은 연구를 했다. 우다청은 고문자의 원리를 도출해 내어 《자설(字说)》을 저술했고 또 《설문고주보(说文古籒补》를 썼다.
본래 고문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전(小篆), 둘째는 고문(古文), 셋째는 주문(籒文)이다. 한대에 대전으로 기록한 《사주편(史籒篇)》이라는 책이 있었으므로 주문이라 부른다.
우다청은 청대 사람이었지만 그가 수집한 고문자 자료는 한대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수중에 있는 자료를 이용하여 한대 《사주편》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이렇게 하여 《설문고주보》를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종정문도 계통화했다. 종정문을 알아볼 수 있으면 고대 종정과 동기(铜器)에 기재된, 주대(周代)를 전후로 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문자의 고증을 말할 때는 갑골문(甲骨文)의 고증과 연구에 대해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60년 전(기록자 주; 이것은 1960년대 말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마땅히 80년 전이라 해야 한다)에 인쉬(殷墟)의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되었다.
‘인쉬(殷墟)’란 무엇인가? 은(殷)은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의 서부 지역으로 은(殷)․상(商) 때의 오랜 수도였다. 상 왕조가 주의 무왕(武王)에게 멸망된 후, 이 지역은 쓸모가 없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흐르자 점점 황무지에서 폐허로 변해 버렸으며 서서히 지하로 묻혔는데 그 뒤로 사람들이 ‘인쉬’라 불렀던 것이다.
왜 ‘갑골문’이라고 부르는가? 갑은 거북의 껍데기이고, 골은 소의 견갑골(肩胛骨) 또는 기타 대형 동물의 큰 뼈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갑과 골에 칼로 고대 문자를 새겼는데, 어떤 경우에는 필기 도구로 한 번 쓴 다음에 칼로 파내었다.
상대(商代)의 왕들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먼저 점을 쳤다. 점을 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을 다듬은 뒤 얇게 깎아서 평평하게 한 후에 구멍을 뚫고 불로 태운다. 갑과 골은 불로 한 번 지지면 곧 갈라져 버리는데, 이것을 복조(卜兆)라고 부른다. 상왕은 갈라진 무늬, 곧 복조에 근거하여 길흉(吉凶)을 판단하고 어떤 일의 실행 가부(可否)를 결정했다. 갈라진 무늬는 항상 ‘丫’또는 ‘卜’의 형태였다.
상대에 점복(占卜)을 관리하던 관리들은 이들 복조, 즉 점복의 결과를 갑골 위에 새겨 놓았는데, 그것은 3000여 년이 지나도 남아있을 만큼 쉽사리 훼손되지 않았다.
갑골문에는 몇몇 복사(卜辞)말고도 다른 일을 기록한 문자가 있다. 갑골문은 엄밀한 구조와 일정한 규격을 갖춘 문자로, 여기에는 상형자 이외에도 가차자(假借字)가 있었다. 갑골문은 중국 최초의 고문자는 아니지만 현재 중국에서 발견되어 연구된 가장 오래된 문자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정사(正史)에 관한 전책(典册)은 이미 모두 없어져 버렸다. 당시에는 죽간(竹简)에 썼는데, 죽간은 쉽게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갑골문이 출현한 이후 상나라의 역사적인 사실들은 이 문자에 의거하게 되었다.
갑골문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역대 《본초강목(本草纲目)》 류의 약서(药书)에 ‘용골(龍骨)’이란 것이 있고 용골에 문자가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예전에는 알 수 없었다. 청 말엽에 이르러 중국의 고문자학은 크게 발전했다. 사실 우다청까지만 해도 갑골문은 보지도 못했고 연구한 적도 없었다.
왕이룽(王懿荣)이라는 산둥(山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베이징에서 벼슬을 하던 중에 병을 얻어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약의 하나인 ‘용골’에 문자가 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용골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대량의 갑골문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는 팔국연합군(八国聯合军)이 베이징을 공격해 왔을 때 자살했다. 그가 남긴 대량의 갑골은 처음에는 《노잔유기(老残游记)》를 지은 류어(劉鹗)의 손에 들어갔다가, 뒤에는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의 스승인 뤄전위(羅振玉)가 손에 넣었다. 청이 멸망하자 뤄전위는 일본으로 가서 갑골문을 인쇄해 냈는데, 그것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뤄전위는 다시 안양으로 가서 직접 갑골문을 찾았다.
상대는 안양의 인쉬를 200년 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상의 점괘(占卦)․문복(问卜)․기사(记事)의 갑골문이 여기에서 많이 나왔다.
상왕은 미신을 매우 깊이 믿었으므로 무슨 일이든지 시작할 때에는 먼저 신에게 제사 드리고 점을 쳐서 결정했다. 신에게 제사 드리고, 괘를 점치고 복(卜)을 묻는 사람은 특정한 관직이 없는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이란 벼슬은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권력은 작지 않았다. 사관은 귀신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칼과 필기 도구로 갑골에 복사 새기는 일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