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왕 이십이 눈 속에 보내온 시에 대한 답례로 酬王二十舍人雪中見寄/당唐 유종원 柳宗元
三日柴門擁不開 삼일 동안 사립문 꼭 닫고 연 적 없는데
階除平滿白皚皚 섬돌에 나란한 높이로 하얀 눈이 쌓였네
今朝蹈作瓊瑤跡 오늘 아침 보옥 위에 발자국이 났으니
爲有詩人鳳沼來 시인이 궁궐에서 시를 부쳤기 때문이네
이 시는 유종원(柳宗元,773~819)이 805년 영주(永州)로 좌천되어 810년 드디어 우계(愚溪)에 초가를 마련한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예전 판본에는 한유(韓愈)의 시로 된 곳이 많고 《유하동집(柳河東集)》에도 들어있지 않지만, 송나라 채정손(蔡正孫)이 《시림광기(詩林廣記)》에서 유종원의 시 5수를 뽑아 놓은 것을 바탕으로 후인들이 고증하여 알게 된 것이다. 작품 내용으로 볼 때 유종원의 시가 분명해 보인다.
유종원의 시는 보면 볼수록 시를 잘 쓴다는 생각이 든다. <포사자설(捕蛇者說)>이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에 보이는 인상 깊은 묘사가 있는가 하면 <영주팔기(永州八記)>에 보이는 중의적인 수법이 이 시에 다 나타나고 있으니, 시와 산문이 다르지만 그 장심(匠心)은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시는 상대가 보내준 시에 대한 답례의 성격을 지닌 시이므로 감상할 때도 그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선 앞 2구는 자신이 거주하는 황량하고 고요한 공간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 시인이 처한 고독하고 적막한 심회 역시 담아내고 있다. 이런 묘사를 한 것은 아래 2구에 자연 드러나고 있다.
경요(瓊瑤)라는 말이 참으로 절묘하다. 이 말은 섬돌 높이로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을 말한다. 우리 시골에서는 마당과 마루 사이에 있는 약간 높은 대를 ‘뜨럭’이라 하였는데 이는 표준어의 ‘뜨락’이라는 말과는 개념이 좀 다르다. 혹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에서 말하는 것은 눈이 그 ‘뜨럭’ 높이까지 쌓인 것을 말한다. 이 눈을 경요라고 한 것이다. 즉 보옥과 같은 눈을 밟아 크게 발자국이 난 것을 표현한 것은 친구가 보내준 편지에 대한 기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유종원의 과거 합격 동기생 왕애(王涯)라고 한다. 그가 당시 중서성(中書省)의 사인(舍人) 벼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 보면 봉소(鳳沼)라고 나오는데 이는 봉소지(鳳沼池)를 의미한다. 이 봉소지는 궁궐 후원에 있는데 이 근처에 바로 북조(北朝)의 중서성이 있었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봉소는 바로 왕애가 근무하고 있는 중서성을 말한다.
이 중서성의 관리들은 왕의 측근에서 문한을 다루기도 하고 감찰이나 간원 등의 일도 한다. 때문에 조선 시대에서는 중서성을 줄여 말하는 중서(中書)가 의정부를 가리킬 때도 있고 때로는 한림의 관직인 홍문관이나 예문관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 당나라 때 중서성을 자미성(紫薇省)으로 고친 적이 있기에 사간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정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중서라는 것이 어느 한 관청의 별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관직의 특징을 중서에 빗대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궁궐이나 관직 어휘에 이런 것들이 많은데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피상적인 것을 따지면 그 말이 가리키는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런 얘기를 왜 굳이 하였는가? 유종원은 좌천되기 전에는 개혁당의 일원으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권력 다툼에서 밀리자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인사들이 다 뿔뿔이 귀양을 간 상황이라 서로 서신 한 통 주고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영주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종원의 어머니가 병으로 작고하였지만 집에 가지도 못하였다. 이런 우울한 날들이 연속된 상황에서 지금 왕애가 조정에서 편지를 보내왔기에 그 기쁨을 경요 같은 보배로운 눈 위에 발자국이 크게 났다고 말한 것이다.
그럼 눈 위에 발자국이 난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가? 위에서는 경요의 의미를 절반만 말하였다. 이 말은 본래 《시경》 <위풍(衛風)>의 마지막에 수록된 <모과(木瓜)>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위풍은 위나라의 민요라는 말이다. 위(衛)나라는 정(鄭)나라와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사랑 노래가 일대 유행을 하여 후대의 유학자들이 집중적으로 비판을 한 지역이다. 이 시는 어떤 여인이 나에게 모과나 복숭아 같은 걸 주면 내가 좋은 보옥으로 답례를 하고도 하나도 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겠다고 한다. 그 여인과 잘 지내보기 위해 무슨 귀한 물건을 못 주어 안달하는 마음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경요라는 말은 상대에게 보내는 답례라는 뜻이 나오는데 후대인들이 상대가 보내온 시를 미화하여 瓊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경요는 또 왕애가 보내온 시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위에서 중의법이니 장심이니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황량한 오령(五嶺) 남쪽의 귀양지 초가에 보내온 시, 그 시 한 통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지금 시에서 유종원이 왕애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이러한 고마운 마음일 것이다. 그 고마운 마음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 구절이 바로 3번째 구인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런 시 하나에 이렇게 감격하는 마음을 드러낸 데에서 더욱 큰 쓸쓸함과 고독을 느끼게도 되니 이것이 바로 즐거운 것을 통해서 슬픈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유종원의 시가 인상 깊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니 <포사자설>의 의장(意匠)과 역시 통하는 것이다.
365일 한시 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