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자로, 안연孔子、子路、顔淵
여기에서 우리가 (잠시) 부, 명예, 권력을 비구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결코 그것들이 다 속 빈 강정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아직 비가 되어 내리지 않은”, 어떤 동경의 형태임을 지적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경험을 통해 구름과 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구름은 시각적 환상이 아니고 사람들이 고대하는 비를 데려오거나 머금고 있으며 구름층의 고저와 특정 형태에 의해 비의 유무와 많고 적음이 결정된다. 중국의 ‘夏’ 자는 무당이 비가 오기를 빌 때 추는 춤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글자로서 春, 秋, 冬, 세 글자가 대자연의 경관이 변화하는 모습(예를 들어 싹이 났거나 가지가 얼어붙은 모습)에서 유래한 것과 달리 특이하게도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여 모종의 긴장감을 띠고 있다. 마치 그 춤이 1년 중 석 달간에 벌어지는 생사의 크나큰 일과 관련이 있어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갖가지 보물을 아낌없이 바치고 심지어 동물과 사람까지 죽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비는 너무 많이 내려서도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재난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구름의 비유라고 하면 바로 공자가 떠오른다. 그렇다. 2천여 년 전의 현인 공자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공자의 말은 매우 경쾌했고 약간 유머러스한 겸양이 느껴졌으며 솔직히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도 결코 상대방을 누르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귀(부와 권력)는 그에게 뜬구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도 그것을 원했겠지만 아무래도 다소 거리가 멀었고 억지로 불편한 일까지 해야 해서 웬만하면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하고 싶고, 좋아하고, 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확실히 그는 언제나 다재다능한 이였고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의 사유 속에는 ‘타자’가 가득했으며 거의 (하늘이나 마음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듯한 책임감과 삶의 소박한 의무들을 갖고 있었다.
이런 경쾌한 느낌은 마르크스와 매우 흡사하다. 나는 이것이 어느 정도 그들의 ‘구사일생’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인간 세상에서 절대 수요라는 생존의 한계선을 계속 위아래로 넘나들며 몸부림치다 보면 진정으로 편안할 틈이 없고 천재지변과 인재(전쟁이나 통치자의 증세)와 불운이 단지 작은 부주의만으로도 사람을 깊은 수렁에 빠뜨리곤 한다. 그럴 때 마치 질곡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절대 수요를 만족시키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당장 눈앞이 확 트이면서 세상에 다른 어려움이 더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달리 공자는 사람이 생존의 질곡에서 벗어난 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마르크스보다 더 섬세하고 이성적이었으며 또 비관적인 동시에 실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세상은 생존 한계선 위쪽에 있어야 비로소 흔들흔들 위태롭게 나아갈 뿐이며 그것은 결코 천국이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수요가 충족된 후에도 더 심화된 온갖 수요로 인해 고민하고 분주하다는 것이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이 점에서는 더 오래전 인물인 공자의 말이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시대와 더 잘 맞아떨어진다.
공자의 일생은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절대 수요가 그의 고민거리였던 적은 (진陳, 채蔡 지역에서 제자들과 함께 적에게 포위되어 굶주렸던 며칠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자신의 그 장점 혹은 행운을 잘 이용했고, 그래서 자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일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늘 위험과 마주했다.
이미 생존 한계선 위쪽에 자리한 채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다”(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未足以議也)고 말한 것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어디에나 적용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배불리 먹고 마시며 따뜻함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생물학적 요구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그 효용은 빠른 속도로 제로가 되거나 심지어 마이너스까지 떨어진다(일본 티비의 푸드파이터 시합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장면을 참고하기 바란다). 공자는 스스로를 그런 단순한 데에 한계짓지 말고 시간과 지혜 같은 유한한 삶의 자원을 마땅히 다른 곳으로 돌려 삶의 효용가치를 극대화하라고 권했다.
절대 수요의 한계에 대한 공자의 태도와 대응을 더 확실히 알고자 한다면 그 자신보다 그의 두 제자, 제일 가난했던 안연顏淵과 제일 효성스러웠던 자로子路를 살펴봐야 한다.
자로 자신의 생존 수요는 사소하고 일시적이었다(이렇게 말하면 조금 불경하게 들릴까?). 왜냐하면 연로한 부모를 봉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하길, 이럴 때는 두말없이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고 일도 고르거나 가리지 말며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먼저 참고 미뤄두라고 했다. 자로는 과장하지도 투덜대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으며 화를 낼지언정 삶이 왜 계속 이 모양이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일들이 꼬여 성가시게 돼도 더 참고 신중을 기해 원만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도 핑곗거리를 만드는 법이 없었다.
안연은 그 생존의 한계선에 겨우 걸쳐 있던 인물이었다. “한 소쿠리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살면 남들은 그 걱정을 이겨내지 못할 텐데 안회顏回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一簞食一瓢飲,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라는 공자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더 이상 열악하기 힘든 생활의 한계선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한계선은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 수요에 가깝다. 그런데 이 말을 통해 또 그런 생활은 안연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에게는 걱정이 불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낭비였음이 드러난다. 『논어』를 보면 안연은 결코 사람만 좋고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고(아마도 증삼 曾參이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 서투른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도 아니었다. 그는 매우 똑똑해서 기지가 번뜩였고 자주 날카로움을 드러내기도 했으므로(무심코 옆의 자로와 자공에게 손해를 입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난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능력이 없었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공자는 그의 집중력을 높이 평가하고 거의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늘과 잡티 없이 맑고 고요한 그의 거울 같은 마음의 상태는 늘 한결같았다. 공자는 이 점에서는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걱정이 많은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이상적이거나 독단적으로) 이른바 그 절대 수요의 선을 쭉 긋고 누군가 그 선 위쪽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한다면, 그런 사람에 가장 가까운 이는 아마도 안연일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허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연의 요절이다. 안연의 요절이 꼭 그의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는(영양실조 같은 것) 말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의심을 하곤 한다. 스스로 조금 선망하거나, 또 자기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특히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