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설도薛濤 노 원외를 전송하며送盧員外

노 원외를 전송하며送盧員外/당唐 설도薛濤

玉壘山前風雪夜 옥루산 앞에서 눈보라 치는 밤에
錦官城外別離魂 금관성 밖에서 송별하는 아픈 정
信陵公子如相問 신릉공자께서 혹 소식을 물으시면
長向夷門感舊恩 늘 이문에서 은혜에 감사한다 하오

옥루산(玉壘山)은 성도 서쪽 도강언(都江堰)에 있는 산이다. 도강언은 중국 최초의 농업용수 조절과 수해 방지를 위한 인공 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혹 성도 여행을 할 기회가 있으면 도강언에 반드시 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치수관(治水官) 이빙(李冰) 부자의 뜻이 참으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산이 바로 옥루산이다. 설도가 노 원외를 이별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나 지금 이 산 앞이라 말하고 있다. 금관성은 성도의 별칭이다. 옥루산 앞과 금관성 밖은 바로 설도가 당시 설도전(薛濤牋)이라 불리던 종이도 만들고 하면서 살고 있던 완화계(浣花溪)를 말하는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그렇다면 노 원외가 성도를 떠나기 전날 밤에 설도의 집을 찾아온 것일까?

신릉공자(新陵孔子)는 춘추 시대에 위나라의 공자 신릉군(信陵君)을 말한다. 당시 명망가로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유명하였는데 신릉군도 이들과 함께 4 공자로 불리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경쟁적으로 재능은 있지만 불우한 사람을 모아 식객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모사나 심복을 양성하고 사병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위나라에는 후영(侯嬴)이라는 은자가 나이 70이 되도록 도성 이문(夷門)의 문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간에 무슨 능력을 감추고 있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신릉군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각별하게 예우하여 상객(上客)으로 모셨다. 그 뒤 진 소왕(秦昭王)이 군대를 보내 조(趙)나라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나라 평원군이 평소 교분이 있던 신릉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후영이 계책을 내어 위나라 왕의 도장을 빼내어 진비(晉鄙)의 군대를 탈취하여 조나라의 포위를 풀고 진나라 군대를 격파한 일이 있었다. 이때 진나라는 위나라에게 조나라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위왕은 대장 진비를 출정은 하게 하되 관망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후영이 출정하는 신릉군을 전송하면서 ‘저도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못 가니 주군이 그곳에 도착할 때쯤 자결하여 전송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신릉군이 진비의 군영에 도착할 때쯤 과연 자결하였다. 《사기》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 나온다.

시에 나오는 신릉공자는 바로 신릉군을 말하고 이문(夷門)은 후영이 등용되기 전에 생계를 위해 문지기를 하던 곳이다. 시인이 이 고사를 시에 쓴 것은 자신을 알아준 신릉군 같은 분에게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겠다는 의미로 쓴 말일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설도(薛濤, 약 768~832)는 본래 장안 사람으로 7세 무렵에 이미 탁월한 시를 지었다. 그런데 가세가 기울어 16세 무렵에 성도의 기생이 되었다. 설도가 지금 이렇게 여류 문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당시 성도의 절도사로 온 관료들이 설도의 시재를 아끼고 또 여러 가지 남녀의 인연으로 엮이면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제목의 노 원외(盧員外)는 노사민(盧士玟, 762~825)이라는 사람으로 설도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은 아니다. 당시 그는 절도사 무원형(武元衡, 758~815)의 막료로 있다가 지금 원외랑으로 승진되어 장안으로 가는 중이다. 이 노사민이라는 사람이 모시고 있던 무원형이라는 인물이 바로 설도에게 큰 은혜를 준 일이 있다.

설도를 기적에 올렸다가 나중에 무슨 일로 기적에서 빼버린 인물이 절도사 위고(韋皐)인데 이 사람이 성도에 오래 머물렀고 막부에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이 때문에 설도는 그들 사이에서 상당히 교분을 나누고 시가 더욱 세련되었다. 무원형은 바로 이 위고의 후임자인데 당시 설도는 36세 정도로 완화계에서 살고 있었다. 무원형은 설도가 상당히 재능이 있다고 보고 조정에 교서랑(校書郞)으로 추천한 일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교서관이란 관청을 두고 주로 책을 찍어 냈다. 이 교서랑은 주로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출판사 교정이나 편집 일을 하는 것이지만 상당한 독서량이 있고 원고를 교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문을 교정하는 것은 한글을 교정하는 것에 비해 전고나 역사 상식이 아주 박식해야 해서 상당히 전문성이 요구된다. 정조 때 박제가, 유득공 이런 사람들이 규장각에서 한 일이 주로 이 교정이다. 무원형의 천거는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설도는 ‘여교서(女校書)’라는 멋진 별명이 붙고 재주 있는 사람으로 널리 소문이 났다. 설도가 노사민을 전송할 때 무원형은 장안으로 돌아가 재상을 하고 있었다.

3번째 구에서 말한 신릉공자는 바로 이 무원형을 지칭한 말이다. 노사민 당신이 장안에 가면 반드시 무원형 대감에게 인사를 갈 것인데 그때 혹 대감이 이 설도의 안부를 물으시거든 이렇게 소식을 전해주세요. 완화계에 있던 저를 교서랑으로 추천해 주신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고요.

그런데 남을 전송하면서 그 당자 이야기를 안 하고 다른 사람 안부를 묻고 하면 혹 실례가 안 될까? 당자와 안부를 묻는 사람의 관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경우에는 노사민이 무원형의 부하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조자룡이 형주에 와서 관우를 만났는데 관우가 성도에 가거든 유비 형님에게 이 아우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지 않은가? 그리고 ‘여상문(如相問)’이라는 말은 주로 제3자가 나의 안부를 물을 때 쓰는 말이다. ‘당신이 물으신다면’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나의 소식을 물으면’이라는 말이다. 왕창령(王昌齡)의 시 <부용루에서 신점을 전송하며(芙蓉樓送辛漸)>에 “낙양의 친우가 만약 묻거든,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호에 있다고 하오.[洛陽親友如相問, 一片氷心在玉壺]”라고 한 시에서도 이런 표현법을 쓰고 있다.

정(情)이나 이런 말을 쓰지 않고 혼(魂) 자를 쓴 것은 운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송별의 정이 깊고 아쉽다는 것을 담고 있다. 여상문(如相問)의 상(相)은 제3자가 나를 지칭하기 위한 문법적 요소로 들어간 것이지 ‘서로’라는 실사의 의미가 있지는 않다. 향이문(向夷門)의 향(向)은 ‘~에서’라는 처소를 의미한다.

이 시는 앞 4글자에 모두 지명이나 고사를 써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명을 사용하여 아는 사람은 그 이별의 장소와 상황을 짐작하게 하였고 또 자신의 상황에 잘 맞는 고사를 동원하여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만 알도록 하고 있다. 김억이 번역한 설도의 시는 대개 고사가 없는 시이지만 이 시만큼은 설도를 정말 교서랑에 추천할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를 굳이 이렇게 어렵게 쓴 것은 아마도 무원형이 설도의 이런 재능을 높이 산 것에 설도가 은연중 부응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도 다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가?

예전에 성도 망강로 공원(望江路公園)에 갔더니 설도의 무덤이 있고 설도정(薛濤井)이 있고 설도의 상이 있었다. 그리고 총생하는 대나무 숲 언저리에서 차를 팔았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薛濤

365일 한시 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