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5

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5

5. 뒤쪽 40회의 작자와 작자의 분류 기능

《홍루몽》 작자 문제의 복잡성은 그것이 ‘조설근의 저작인지 여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조설근이 논쟁의 초점이 된 까닭은 주로 후스가 그를 다시 ‘발굴’해 냄으로써 중화민국 초기의 색은파 학자들이 주장한 ‘명나라 유민의 저작설’에 조설근의 이름이 가려지지 않게 (또는 묽게 희석되지 않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스의 〈《홍루몽》 고증〉(개정판)은 조설근을 발굴한 것 외에 또 다른 저작권 문제를 갖고 있었다. 즉 “뒤쪽 40회의 작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후스는 뒤쪽 40회를 고악(高鶚)이 썼다고 단정했다. (위뤠이[裕瑞]는 이미 정고본[程高本]의 뒤쪽 40회가 속서[續書]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후스의 영향력은 위뤠이의 주장보다 훨씬 컸다.)

후스가 ‘고악 속작설’을 주장한 논거가 성립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후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고악 속작설’은 나오자마자 즉시 120회 전체에 대한 학자들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텍스트의 안정성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논자들이 ‘고악 속작설’에 입각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본 장에서는 우선 《홍루몽》 해석 역사에서 고악의 역할을 고찰하고, 텍스트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집중적으로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판중궤이(潘重規)와 같이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고악이 뒤를 이어 썼다는 주장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후스 계열의 신홍학 연구자들은 고악을 속작자(續作者)로 간주한다. 고악의 상황은 조설근과 달라서, 어느 학파든 고악의 ‘종족’을 놓고 논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뒤쪽 40회의 저작권 논쟁은 여전히 두 가지 층면과 관련이 있다. 첫째는 뒤쪽 40회의 해석 문제이고, 둘째는 뒤쪽 40회에 대한 평가 문제이다.

평가의 문제는 ‘원작자’ 조설근과 ‘속서자’ 고악에 대한 연구자들의 느낌과 아주 미묘한 관계가 있다. ‘조설근의 저작’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부분에서 각 연구자들은 각기 극단을 치닫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뒤쪽 40회의 많은 부분은 원고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거기에 “조설근이 쓴 단어는 한 자도 없다”고 주장한다. 신홍학 연구자들의 저작을 보면 한 가지 뚜렷한 인상을 받는다. 즉, 그들은 여전히 ‘작자 결정론’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위핑보는 그런 경향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1) 위핑보의 ‘성정설(性情說)’

후스의 〈고증〉이 발표된 뒤, 신홍학 연구자들 가운데도 각자의 연구 범위는 어느 한 부분에 치중되어 있었다. 저우루창은 비교적으로 조설근의 생애와 가계에 집중했고, (1954년 이전의) 위핑보는 고악의 이어 쓰기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위핑보는 뒤쪽 40회를 평하면서 이어 쓴 사람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1. 고악이 가교저(賈巧姐)의 생애를 보충할 때에는 제목 외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문장이 졸렬하고 서술은 우습기 짝이 없다.
2. 그러나 그의 큰 병폐는 근거 없이 허구적으로 지어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졸렬하고 사건이 황당하다는 두 가지 점에 있다. 이 병폐는 40회의 거의 곳곳에서 드러나니 이 2, 3회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완전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졸렬한 글 솜씨는 여전히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위핑보는 ‘문장의 결점[敗筆]’은 모두 이어 쓴 사람인 고악의 능력 부족 때문에 나타났다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문장의 결점’이 나타난 원인을 단순히 속서자의 재능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심지어 “겉으로는 소원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뜻이 맞는[貌離神合]” 부분이 생긴 것을 속서자의 재능이 모자란 탓으로 돌리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원작과 속서 사이에 이렇게 겉으로는 소원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뜻이 맞는 현상이 생겨난 이유에 대해서 그는 작자의 개성을 가지고 해석한다.

무릇 좋은 문장이란 반드시 개성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속작에서는 가장 기피해야 할 것은 바로 개성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속작 안에 속작자의 개성이 들어 있게 되면 원작자의 본래 의도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자기의 개성을 완전히 버리고 모든 것을 작자의 마음에 따르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거의 죽은 몸에 남은 희미한 숨[尸居餘氣]’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주장은 1921년 6월 30일 위핑보가 구졔깡(顧頡剛)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데, 나중에 보충하여 《홍루몽변(紅樓夢辨)》의 제1장 〈이어 쓰기의 불가능성을 논함[論續書底不可能]〉이 되었다. 이 글은 우선 《홍루몽》 제35회 말미에서 빠진 내용 즉, 임대옥이 이홍원(怡紅院)에 가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이어 쓰기의 어려움을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이론적인 측면에서 이어 쓰기의 곤란함을 논의”한 것이다. 위핑보의 논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속서자에게 (원작자와) 유사한 환경이 없다면 성정이 아무리 총명하고 아무리 진중하다 하더라도 이어 쓰기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의외로 그는 중요한 문제 즉, “조설근과 고악은 성정이 다른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 사실 유심히 살펴보면 위핑보는 이미 구졔깡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감히 고악의 재능이 모자라다고 할 수 없지만, 고악과 조설근의 성격이 너무 차이가 커서 《홍루몽》을 이어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견은 실제 비평문에서도 다시 제기되었다.

1. 우리는 또 고악과 조설근의 신세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설근은 벼슬을 하지 못한 가난한 선비여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을 몹시 미워했기 때문에 가보옥을 묘사할 때에도 그렇게 했다. 고악은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진사가 되고 어사(御史)를 지낸 인물(후스의 고증에 따르면)이기 때문에 가보옥을 거인(擧人)이 되게 하지 않으면 어쨌든 조금 개운하지 못한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그러나 고악이 왜 이리 어리석은 짓(가보옥을 거인이 되게 한 것)을 했는가? 이것은 사실 그의 성격이 조설근과 달랐기 때문이니, 절대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설근은 기인(奇人)이니 그 둘은 영원히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하필 함께 하나의 책을 만들려 한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위핑보가 이 글을 쓸 무렵에는 조설근과 고악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위핑보는 조설근이 기인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 “고악도 한군기인(漢軍旗人)이어서 조설근과 신분적으로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두 사람의 배경에 비슷한 부분도 있다고 했다. 당시 파악한 자료로 보면 조설근과 고악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 조설근이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던 데에 비해 고악은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한 적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물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한다는 지인논세(知人論世)의 측면에서 위핑보가 이 점을 계속 강조한 것은 사실 이상할 게 없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위핑보는 고악의 실패가 그의 역량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성격과 재능 면에서 원작자인 조설근과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라는 점을 재삼 강조했다. 심지어 그는 “고악의 재능과 식견은 나도 무척 숭배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비평에서는 고악의 힘이 조설근에 미치지 못한다고 수시로 지적했다. 위핑보가 고악을 비판한 말은 무척 많은데,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악이 《홍루몽》을 보충한 것은 그 일만 놓고 보면 당연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문장이 고명하지 못해서……
2. 결국 고악이 비애를 훌륭하게 서술하지 못한다는 이 병폐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3. 이처럼 귀신과 요괴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요사한 꽃을 감상하고, 왕희봉이 귀신을 만나고, 가정의 첩 조씨가 귀신에 홀리는 등의 이야기: 인용자)이 40회 가운데 가득 퍼져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읽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문장이 우스울 정도로 졸렬한 점은 더욱 견디기 어렵다. 제116회의 문장은 더욱 역겹다. 게다가 앞에서 거론한 것들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부분들일 뿐이고, 이 외에도 이런 기괴한 문장은 훨씬 많다. ……고악의 오류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부분은 실제로 지적할 수 있다. 가장 큰 병폐는 ‘문장이 졸렬하고 생각이 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졸렬한 부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속된 것은 고칠 수동 없다.
4. 고악의 무딘 문장[笨筆]으로 모든 부분에서 영롱한 아름다움을 품은 임대옥을 묘사하니 실패하지 않는 부분이 없게 되었다. 책의 내용을 보충해 쓰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고, 직접 보고 들은 《홍루몽》을 보충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고악은 어려움을 알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지로 그 어려운 일을 해 내려 했으니 정말 자신의 역량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였다.

“문장이 고명하지 못하고”, “비애를 훌륭하게 서술하지 못했고”, 문장이 “우스울 정도로 졸렬”하고, “무딘 문장[笨筆]”이었다는 등등의 평가는 사실 작자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작자의 재능과 문장력에 관련된 문제이다. 이것은 사실상 위핑보의 ‘작자관’이 결코 자신이 말한 성격 차이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보기에 앞뒤 부분의 작자는 사실 재능의 높낮이에서 차이가 있다. ‘성격의 차이’는 그저 하나의 이론일 뿐, 실제 비평을 할 때에는 ‘재능의 고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에 위핑보는 ‘고악 속작설’에 대해 굳건히 믿었다. 〈원본의 회목은 80회뿐이었음을 판별함[辨原本回目只有八十]〉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홍루몽》의 원작은 80회뿐으로서 이는 조설근이 쓴 것이고, 뒤쪽 40회는 고악이 이어 쓴 것이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판단이라서 흔들릴 수 없다.

하지만 1950년대 중엽에 쓴 《홍루몽 80회 교본》의 서문에서는 뒤쪽 40회의 내력이 불분명하다고 고쳐 썼다. 이 때문에 그의 논저에는 뒤쪽 40회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못된 문장이랄지 ‘원작자’의 본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장절(章節)을 거의 모두 고악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보인다.

훗날 ‘고악 속작설’이 동요하자 또 어떤 학자는 뒤쪽 40회에 사실은 조설근의 원고 가운데 일부 남은 것들이 섞여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뒤쪽 40회를 모두 고악이 썼다.”라는 믿음보다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다. 저우사오량(周紹良: 1917~2005)는 1953년 10월에 쓴 〈《홍루몽》 뒤쪽 40회와 고악의 속작설을 논함〉이라는 글에서 정위원과 고악은 그저 120회본을 편집하고 다듬었을 뿐, 뒤를 이어 쓴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그들의 작자관이 사실상 분류 기능(classificatory function)을 하고 있다고는 것을 알 수 있다. 푸코(M. Foucault)의 말처럼, “저자의 이름은 ……어떤 텍스트들을 분류하여 정의하고 다른 텍스트와 차별화하거나 대조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우리는 작자 분류의 기능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내포 저자(implied author)와 작자의 분류 기능

위핑보가 〈《홍루몽》 뒤쪽 40회와 고악의 속작설을 논함〉을 쓴 것은 80회의 회목(回目)에서 출발해서 뒤쪽 40회의 회목을 부정함으로써 뒤쪽 40회 안의 문장을 모조리 뒤집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저우사오량은 오히려 반대의 길을 택했다. 즉 “우리는 뒤쪽 40회 회목은 조설근이 초안을 잡았다는 점을 긍정하는데, 말하자면 뒤쪽 40회는 필연적으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원고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위핑보보다 하나의 임무를 더 맡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홍루몽》 뒤쪽 40회의 어느 부분이 조설근의 원고에 들어 있던 것인지를 나누어 판별하는 것이다.

작자의 분류 기능도 이와 마찬가지로 비평가가 구축한 작자관에 따라 달라진다. 원작자와 속서자의 성격 차이를 주장하는 위핑보의 방법은 나중에 거의 맥이 끊기게 된다. 이후의 비평가들은 원작자와 속서자의 재능의 고하를 강조하는 것 외에도 경험과 사상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원고’와 ‘보충’을 선별했다. 이에 대해서는 저우사오량과 송하오칭(宋浩慶)이 아주 좋은 예를 제공한다.

저우사오량의 작자론에서 작자의 경험은 창작의 중요한 원소이다. 그의 논리에서 작자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진위를 판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가 뒤쪽 40회에서 조설근의 원고가 아닌 글을 어떻게 판별해 내는지 보자. 《홍루몽》 제85회에서 가보옥이 북정왕(北靜王)의 생신을 축하하는 장면에 대해 저우사오량은 “왕부(王府)에서 생신 축하를 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고” “묘사한 것이 우스우리만치 황당무계하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보충해 엮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왕부에서 생일 축하를 어떻게 하고 또 왕야(王爺)는 자신이 아끼는 귀족 가문의 아들을 어떻게 접대하는지 근본적으로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건대 작자 경험의 결핍이 가짜 문장[僞筆]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작자의 ‘경험 결핍’은 같은 방식으로 학자들이 ‘조설근의 필적’을 구별해 내는 데에도 이용된다. 《홍루몽》 제83회에서는 태부인[賈母]과 가정(賈政) 등이 궁에 들어가 귀비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조정의 의례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에 대해 저우사오량은 고악이 그런 의례를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제83회는 조설근의 원고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비(元妃)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특별히 뛰어난 묘사가 없지만 조정의 의례에 대한 서술은 직접 보고 듣지 않았다면 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고악은 황실 친척이나 인척이 아닌데 어디서 그런 것을 경험했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조설근의 원고라고 단정한다.”고 했다. 뒤쪽 40회에 묘사된 가씨 집안의 재산 몰수 장면은 이제껏 《홍루몽》 연구자들의 중시를 받았지만 그걸 누가 썼는지에 대해 저우사오량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렇게 묘사가 상세하고 분위기가 생동적이고 진실하니, 스스로 그런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나 경험자에게 자주 얘기를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서술해 낼 수 없다. 그런데 고악은 재산 몰수를 당해 본 적이 없고 재산 몰수를 당한 사람의 집에 가 볼 기회도 없었으니 어떻게 이걸 써 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이 부분은 조설근의 원고로 단정할 수 있다.

송하오칭 역시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설근과 같은 가정의 처지와 개인적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 회(제105회)의 문장을 써 낼 수 없다.”고 했다.

작가가 어떤 경험이 없으면 그런 일을 써 낼 수 없다는 논리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의 저명한 소설가 바이셴용(白先勇)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이 묘사하는 것은 사람이고, 내가 묘사하려는 것은 사람의 감정, 인류 공통의 오욕칠정이지 내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서 내 개인적 배경과는 무관하니, 반드시 자신이 고통을 겪어야 남의 고난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물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에 관한 내용을 쓸 수 있었소?” 바이셴용의 대답은 이러했다. “프랑스 《르몽드》와 인터뷰할 때 나는 내 작품에서 인류 심령의 아픔을 문장으로 전환하고 싶었다고 했다. 인류의 마음속에 담긴 상상을 써 낼 수 있는 것이 소설가의 기본적인 기능이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하고 호기심을 가진 채 남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왕궈웨이(王國維)도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만약 책에 담긴 갖가지 상황과 각종 인물에 대해 그 상황에 처해 본 사람이 아니면 얘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수호전(水滸傳)》의 작자는 반드시 큰 도적이었어야 하고,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작자는 반드시 병가(兵家)였어야 하니, 이 또한 그다지 옳지 않은 주장이다.

현대의 《홍루몽》 연구자 차이이쟝(蔡義江)이 일깨워 주었듯이, 《금분세가(金粉世家)》를 쓴 장헌쉐이(張恨水)도 대단히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작자 경험론’의 영향은 아주 커서 《홍루몽》 뒤쪽 40회에 대한 판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설근과 앞쪽 80회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작자 경험론’의 작용을 간파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조설근의 생애를 추정할 때 후스는 조설근이 옹정 2년(1724)에 태어났다는 견해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설근이 너무 늦게 태어났다면 조씨 가문의 전성기를 직접 목격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써 낼 수 없다”는 논리와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후스와 대화했던 저우루창은 이렇게 이해했다. “그렇다면 조설근은 《홍루몽》처럼 번화한 내용을 가진 이야기를 써 낼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속에서 조설근은 “번화한 것을 볼 수 있는 때에 태어났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론’은 후스의 마음속에 줄곧 잠복해 있었는데, 1959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조설근)가 왕희봉 같이 분명 실제 있었던 인물을 묘사했을 때, 만약 그가 왕희봉이 대단한 여자라는 것을 관찰한 적이 없다면 틀림없이 그녀를 묘사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묘사한 설보차나 임대옥, 진가경 같은 인물들에게 대해서도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니……

후스의 주장은 작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나타내고 있다.

저우루창은 ‘조설근 선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후스와 견해가 어긋나지만, 그 역시 ‘경험론’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조씨 가문의 ‘중흥설(中興說)’을 추측했으니, 즉 조씨 가문이 건륭 초기에 집안이 다시 일어났는데 당시 조설근은 12살이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조설근이 “번화한 것을 볼 수 있는 때에 태어났어야” 했다는 주장의 변형처럼 보이며, ‘작자 경험론’이 복잡하게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신 자서전설’의 성패와 관련되어 있다. (궈위원[郭玉雯] 같은 논자는 저우루창의 이 주장을 ‘날조’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저우루창의 설명에 따르면, ‘후스 신홍학’의 또 다른 추종자인 위핑보는 “분명히 후스 선생의 ‘번화한 것을 볼 수 있는 때에 태어났어야’ 했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결국 이런 관념은 대단히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으며, 다만 차이라면 강남에서의 번영이냐 아니면 북경에서의 번영이냐는 것뿐이다. 차이이쟝은 어쨌든 연구자들이 조설근이 태어난 해를 앞으로 추산하는 주요 원인은 그렇게 해야만 조설근이 ‘번화한 것을 볼 수 있는 때에 태어났어야’ 했다는 주장이 상대적으로 합리적으로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또한 “억지로 작자를 만들어 자기의 주장에 맞추는” 또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신홍학의 ‘자서전설’은 특히 ‘번화한 것을 볼 수 있는 때에 태어났어야’ 했다는 논리의 뒷받침이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저서전설에서는 조설근이 ‘직접 번영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론’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조설근을 향해 내리칠 수도 있고, 자서전설 자체를 내리칠 수도 있다.

어떤 논자들은 조설근이 강남의 번화한 삶을 경험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류로 내세워 조설근의 저작권(원작자)을 부정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쉬나이웨이(徐乃爲)는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서전이 될 수 없고, 그 책의 원래 저자는 조안(曹顔)이라고 주장했고, 원윈잉(溫雲英)은 《석두기》의 작자가 태자 윤잉(胤礽)과 태자비 석(石)씨 등이라고 주장했으며, 피수민(皮述民)은 조설근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홍루몽》을 써 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경험론’을 가지고 ‘자서전설’을 부정한 예들이다. 피수민은 집안의 번영과 재산 몰수를 겪은 이정(李鼎)이 바로 이 책의 원작자(앞쪽 4회와 그 뒤쪽의 몇 부분을 쓴 사람)인데, 문장이 별로 훌륭하지 않아서 외삼촌인 조설근에게 대신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조안과 이정이 번영을 경험하긴 했다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홍루몽》을 썼다는 명확한 기록을 역사에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뒤쪽 40회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저우사오량은 ‘작자 경험론’으로 진위를 구분했고, 송하오칭도 “그 일을 경험하지 못한 고악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진실한 글을 써 낼 수 있었겠는가?” 라는 등의 주장을 했다. 그러나 송하오칭은 ‘작자 경험론’ 외에도 원작자와 속서자의 ‘사상적 경계’에 대한 구별을 중시했다. 그의 분석 논리에서 이 점도 마찬가지로 분류 작용을 한다. 그는 〈《홍루몽》 뒤쪽 40회의 구별[《紅樓夢》後四十回辨]〉에서 종종 이 원칙을 응용하여 진위를 판별했다. 예를 들어서 《홍루몽》 제104회에는 가정이 궁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송하오칭은 이 부분에서 황제는 흐리멍덩한 사람으로, 가정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으니 “감히 이렇게 황제와 대신을 풍자한 것은 천고의 빼어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악이 어떻게 이런 사상적 경계에 이르렀겠는가?” 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115회에서 가석춘(賈惜春)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에 대해 송하오칭은 “가씨 집안의 참을 수 없는 추악함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나중에 가보옥의 출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구상과 묘사에는 사상적 경향이 분명하니 의심할 여지없이 조설근이 쓴 문장이다.”라고 주장했다. 제110회에서 가씨 집안이 몰락하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 내용이나 제120회 끝부분의 시 등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모두 송하오칭은 작자의 ‘사상적 경계’로 진위를 판별한다.

‘작자 경험론’과 ‘작자 사상론’이 모두 분류 작용을 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런데 사실 그 두 항목은 모두 하나의 큰 개념에 포괄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설근의 재능은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저우사오량과 송하오칭의 ‘작자관’에서 서로 상통하는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저우사오량의 진술을 보자.

1. (제82회에서 가보옥이 악몽에서 깨어나는 장면은) 단연코 다른 누구도 보충해 쓸 수 없는 것이다.
2. (제89회의) 임대옥이 단식을 결행하는 부분은 당연이 다른 사람이 이어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3. (제91회에서 가보옥과 임대옥이 선[禪]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제22회의 제목 에 들어 있는 “노래 가사를 듣고 가보옥은 선기를 말하고[聽曲文寶玉話禪機]”라는 구절과 멀리서 짝을 이루고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 묻고 답하는 부분은 더욱 훌륭해서 기봉(機鋒)을 빌려 각자의 심사(心事)를 얘기하게 하니, 이것은 오직 조설근만이 써 낼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모방할 수 없다.
4. (제94회에서 가보옥이 옥을 잃어버리는 것은) 이어지는 26회 전체의 내용과 관련된 안배이니, 조설근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구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5. (제104회에서는) 예이(倪二)라는 자잘한 일에서 장화(張華)를 이끌어냄으로써 과거에 이미 끝난 듯한 일에서 장차 가씨 집안의 재산이 몰수되는 사건의 이유를 끌어들였으니, 이런 안배는 당연히 조설근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다.
6. (제119회에서 가보옥이 집을 떠나며 한 말은) 더욱 놀라워서 글자 하나의 무게가 한없이 크니, 조설근이 아니면 써 낼 수 없다.
7. (제120회에서 가보옥이 속세를 떠나는 부분은) 확실히 일반적인 묘사와는 달리 구상이 맑고 빼어나니 오직 조설근만이 이런 글을 써 낼 수 있을 뿐, 결코 정위원이나 고악 같은 이들이 상상해서 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송하오칭의 관점에서 논증까지 수사법은 거의 저우사오량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듯하다. 즉 “조설근이 아니면 누구의 마음속에 이런 골짜기가 들어 있겠는가?”라든지 “조설근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그들은 모두 서로 비교해 보면 고악의 경지가 조설근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고악이 어찌 이런 담력과 식견을 갖고 있었겠는가?” “고악이 어찌 이런 사상적 경계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라는 식이다. 송하오칭은 심지어 조설근의 재능과 성취가 고악은 말할 것도 없고 청나라 때의 모든 백화소설에서도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단언한다.

이상의 이런 주장들은 객관적 기초가 상당히 박약하다. 왜냐하면 스토리의 우열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저마다 느낌이 아주 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구위훤(邱煒萲)은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앞쪽 80회가 옛날 청나라 초기의 인물이 쓴 것이고 뒤쪽 40회는 조설근이 덧붙인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 기운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맥락이 관통한다는 점에서 작품 전체의 문장을 조설근이 썼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구위훤의 이런 견해는 오히려 뒤쪽 40회가 바로 ‘조설근’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후원웨이(胡文煒)와 같은 현대의 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주장하기도 한다. 즉 “현재의 《홍루몽》 뒤쪽 40회는 조설근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이처럼 빼어나게 써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평론가 웨인 부스(Wayne C. Booth: 1912~ )는 《소설의 수사학(The Rhetoric of Fiction)》에서 ‘내포 작자(the implied author)’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얻은 작자의 형상이라고 했다. 저우사오량과 송하오칭은 주로 《홍루몽》 앞쪽 80회의 문장을 근거로 조설근의 ‘사상적 경계’와 ‘재능’을 구상했는데, 사실 그들이 얘기하는 작자 형상(‘조설근’)이 반드시 역사에 실존했던 혹은 진짜 작자(historical, real author)라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부스가 말한 ‘내포 작자’에 더 가깝다.

‘작자 경험론’과 ‘내포 작자’에 의거해 추리하고 연역하여 해석하자면 《서유기》의 작자는 오직 신선이나 부처, 또는 요괴나 마귀밖에 될 수 없다.

‘고하가 분명한’ 작자관을 토대로 삼았기 때문에 저우사오량과 송하오칭은 이를 근거로 진위를 감별해 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사실 그들 역시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런 작자관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말할 필요 없이 그 뛰어난 부분은 당연히 조설근의 원고이며 투박한 문장은 고악이 ‘보충’한 것이다.

사실 조설근의 문장이 좋다는 인상은 대개 《홍루몽》 앞쪽 80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좋고 나쁘다는 것을 판단하는 데에는 공인된 기준이 전혀 없다. 게다가 조설근의 문장에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고 확정하기도 어렵고, 고악의 문장이 반드시 졸렬하다는 것은 더욱 극단적이 추리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저우사오량과 송하오칭의 주장은 여전히 두 가지 가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째 뒤쪽 40회에 조설근의 원고가 들어 있고, 둘째는 첫 번째 가설을 바탕으로 그저 고악이 어떤 부분을 써 낼 수 없었으니 그것은 조설근이 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상 뒤쪽 40회에 조설근의 원고가 들어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정론이 나올 수 있는지 여부도 미지수이다. 이 때문에 첫 번째 가설은 결코 견실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없다. 다음으로 고악이 어떤 부분은 쓸 도리가 없었다는 것도 추측일 뿐이다. 그들의 논술은 종종 “고악이 아니면 조설근”이라는 이분법적 전략을 채택하는데, 이는 그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뒤쪽 40회를 쓸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작자관이 기본적으로 갖가지 가설 위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작자 관념 아래 파생된 작자의 분류 기능은 그 효력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종합하자면 “고악이 아니면 조설근”이라는 관점은 제자리걸음을 피할 수 없으며, 적어도 이론적 사유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협소하다. 자오깡(趙岡)과 천종이(陳鍾毅)는 《홍루몽 연구 신편》에서 이 작품을 이어 쓴 사람은 고악이 아니고, 뒤쪽 40회도 예전에 조설근이 남긴 원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53년에 《홍루몽》 갑진본(甲辰本)이 산시(山西)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판본의 서문은 정고본이 간행되기 이전에 이미 120회 판본이 있었다는 견해를 잘 보여준다. 주춘(周春)의 《홍루몽 독서 수필[閱紅樓夢隨筆]》에서는 건륭 55년 경술(庚戌, 1790)에 누군가 《홍루몽》 120회본을 샀다는 사실을 제기했다. 이를 근거로 “고악이 뒤쪽 40회를 지었다”는 견해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작자 경험론’과 ‘작자 사상론’, ‘원작자 천재론’은 모두 해석 활동에서 대국(大局)을 좌우하는 요소였으며, 또한 몇몇 사람들의 저술 전략이었다. 어쩌면 일부 해석자들은 갖가지 기정의 ‘작자관’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상태에서 현존하는 텍스트에 대해 다양한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6. 결론

결국 《홍루몽》의 작자 문제는 결코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단순한 작자 저작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작자의 형상이 해석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우리는 1921년 이래 여러 연구자들이 모두들 저작권(authorship)과 ‘작자의 사상’에 힘을 쏟으면서 자신의 해석에 ‘작자로부터 권한을 부여받게(authorized) 만드는 효과를 보았는데, 실제로 논자들은 종종 스스로 권위를 부여했다. 그들의 목적은 해서의 권위(authority)를 약탈하면서, 아울러 “작자는 분명 어떠어떠했을 것”이라는 점(작자의 권위)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구축한 ’작자‘는 자신의 해석을 더 합법적으로 만드는 데에 이용되었다.

일부 《홍루몽》 연구사에 관한 저작에서는 순전히 저작권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바람에 작자들이 《홍루몽》 연구에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바이둔(白盾)이 주편(主編)한 《홍루몽 연구사론》에서는 이렇게 밝혔다.

《홍루몽》 (연구) 영역에서 왜 연달아 이렇게 새로운 자료의 발굴도 없고 또 충분한 이유도 없이 조설근의 저작권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기 전까지는 그런 시도를 멈추려 하지 않는 추세가 나타나는가?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무얼 위해 이러는 것인가?

이 문제는 주로 1970년 이래의 저작권 논쟁을 겨냥하여 제기된 것이었다.

이상의 고찰에서는 어쩌면 한 가지 계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홍루몽》의 저작권(authorship)이 일단 바뀌게 되면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의 어투도 따라서 크게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원윈잉(溫雲英)이 《석두기》의 작자가 태자 윤잉과 태자비 석씨 등이라고 주장하고, 투모러(土默熱)가 그 작품의 작자가 홍승(洪昇)이라고 주장한 것이 그런 예이다. 어쩌면 이것이 “대체 무얼 위해 이러는 것인가?”라는 바이둔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작자 문제는 단순한 저작권의 문제가 아니라 중대한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사실상 ‘조설근이 작자’라는 큰 전제 아래 조설근에 대한 연구와 조씨 가문의 전기라는 주장이 큰소리를 내며 활개를 칠 수 있었다. 이것은 저작권 문제를 ‘정복’하는 것이 해석의 권위를 획득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음을 설명해 준다. 이후로 그와 비슷한 해석 전략은 드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 아주 자주 발견되지만, ‘조설근’은 여러 번 개조되었고 지위도 불안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의 마지막 장에서 더 깊이 분석해 볼 것이다.

清 孙温 <绘全本红楼梦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