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밤에 술을 마시며初冬夜飮/당唐 두목杜牧
淮陽多病偶求歡 급암처럼 병 많아 어쩌다 술 찾으니
客袖侵霜與燭盤 소매 서리에 젖고 등잔과 함께 하네
砌下梨花一堆雪 계단 아래 배꽃처럼 첫눈이 쌓였거니
明年誰此憑闌干 내년에는 누가 예서 난간에 기댈까
첫 구에 회양(淮陽)이라 말한 것은 한나라 때 회양 태수(淮陽太守)를 지낸 급암(汲黯)을 가리킨다. 그리고 뒤에 ‘어쩌다 즐길 것을 찾는다.’는 말은 바로 제목에서 말한 술을 마신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병이 많은 것은 급암에게 해당하고 술 마시는 낙을 찾는 것은 두목 자신의 현재 상황이다. 그럼 이 시에서 두목은 왜 자기 자신을 급암에 비유한 것일까?
두목은 이 당시 목주 자사(睦州刺史)를 하고 있었다. 두목이 44세이던 846년 초겨울의 일이다. 두목은 4년 전에 황주 자사(黃州刺史)를 하다가 2년 전에는 지주 자사(池州刺史)로 옮겼으니 2년 꼴로 호북, 안휘, 절강 일대를 돈 것이다. 848년에 목주 자사를 끝으로 내직으로 옮겨가니 7년을 외직으로 보냈는데, 그 이유는 두목이 감찰어사, 좌보궐, 사관, 이런 언론이나 문한 계통의 벼슬을 하면서 누차 직간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직간을 하다가 외직으로 쫓겨난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한나라 때 급암(汲黯)이다. 급암에게는 두 가지 대표적인 이미지가 역사상에 아로새겨져 있다. 하나는 망설임 없이 간언을 잘한 직신(直臣)이며, 다른 하나는 별 힘도 안 들이고 고을을 잘 다스린 순리(循吏)의 이미지이다. 언젠가 무제가 학술이 있는 유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은 인의의 정치를 펴겠다고 말하였다. 그 때 급암은 여러 사람들의 면전에서 “폐하는 마음속에 욕심이 많아 겉으로만 인의를 베푸는데 어떻게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려 하신단 말입니까?[陛下內多慾, 而外施仁義, 奈何欲效唐虞之治乎?]”라고 말하여 무제가 노하여 얼굴색이 변한 채로 조회를 마쳤다. 이날 무제는 측근들에게 급암은 너무나도 우직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나중에 급암을 사직지신(社稷之臣), 즉 사직을 지키는 신하로 인정하였다.
이렇게 한 건 나중 일이고, 급암이 황제 신변에서 의론을 담당하는 중대부(中大夫)로 있을 때 자주 간하여 무제가 동해 태수(東海太守)로 보낸 일이 있다. 급암은 평소 도교를 신봉하고 있어 청정(淸淨)함을 좋아했다. 청정함을 좋아한다는 말은 많은 말이나 인위적인 것을 삼가고 조용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부분 일을 담당자에게 맡기고는 큰 일만 책임을 묻고 작은 일은 따지지 않았다. 자신은 규합(閨閤), 즉 관저의 내실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잘 다스려졌다. 사실 이렇게 한 것은 급암이 협객 기질이 있고 직간을 잘하기는 하지만 좀 오만하고 병이 많은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급암이 죽기 10년 전이 되었을 때 회양(淮陽) 지역에서 오수전(五銖錢)을 위조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무제는 이곳에 급암을 보내려 하였는데 급암은 자신은 병도 많고 가급적 황제 옆에서 간언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무제가 억지로 보내면서 누워서 다스리라고[臥而治之] 말했다. 결국 급암은 회양에 가서 예전 동해를 다스리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고을을 다스렸는데, 《논형(論衡)》을 참조하면 급암이 주전(鑄錢)하는 용광로 하나 안 부수고, 사람 한 명 죽이지 않고 그냥 누워잤는데도 고을의 정사가 맑아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무제가 급암을 보낸 이유인 위명(威名)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무제는 급암을 재상의 지위로 그대로 회양에 있게 하여 7년 뒤에 임소에서 죽었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문헌에 보면 ‘와합논도(臥閤論道)’, 즉 ‘규합에 누워서 도를 논하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여기서 합(閤)은 관공서가 아니고 자신의 사저를 말하며 도(道)는 바로 국정이나 고을의 정사를 의미한다. 바로 위에서 간추려 소개한 사마천(司馬遷)의 <급암열전(汲黯列傳)>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두목은 목주 자사를 하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직언을 잘하고 고을을 잘 다스린 급암에게 비유하고 있다. 마침 자신이 병이 나자 병이 많았던 급암과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조정에 대한 불만과 지방관을 떠도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우울한 심사를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객의 소매는 고향을 떠나 지방관으로 우거(寓居)하는 두목 자신의 소매이고, 서리 기운이 파고든 것은 바로 초겨울의 객고를 말한 것이며, 촛불을 받치는 접시와 함께 한다는 것은 지금 혼자 앉아 술을 따라 마시며 촛불을 보고 이런저런 회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쓸쓸한 초겨울 밤, 혼자 술을 마시다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첫눈이 흰 배꽃처럼 잔뜩 쌓여 있다. 초겨울 밤 첫눈이 쌓인 설경은 우울하고 쓸쓸한 심정을 더욱 돋우고, 지난 몇 년간 그랬듯이 이제 이곳을 떠나 또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득하고 막막하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내년에 나는 또 어디로 갈까라는 울울하고 허허로운 말을 한 것이다.
이 시는 오랫동안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이 외로운 초겨울 밤 첫눈이 올 때 읽으면 더욱 감회가 깊을 듯하다. 회사일도 안 풀리는데 크리스마스이브나 자신의 생일에 아무도 만나자는 사람은 없고 독감까지 든 상황에서 첫 눈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이 시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만 삼민서국 본 《두목시문집(杜牧詩文集)》에서는 이 시를 49세 때인 작고하기 1년 전 851년에 장안의 번천별서(樊川別墅)에서 지은 시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객을 두목이 아닌 이날 초대된 손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마도 마지막 구절을 ‘첫눈 온 이 경치를 내년에 나는 못 보겠지’라고 이해하여 생의 마지막을 의식한 시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나는 이곳을 떠나 또 어디로 가게 될까?’의 의미로 보인다. 객이 정말로 이날 초대한 사람이라면 왜 객과 마주하지 않고 촛대와 마주하며 혼자 나와 저런 궁상을 떤단 말인가? 그리고 회양(淮陽)은 급암이 그 곳 지방관을 한 것을 상기시키는 말인데 장안에 돌아와 있는 자신을 어떻게 그렇게 비유할 수 있겠는가? 다소 주관적으로 비칠 수 있는 시 전체의 의경이나 심상을 제외하고도 이런 몇 가지 뚜렷한 이유로 나는 이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365일 한시 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