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 5464킬로미터는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발해만으로 들어가는데 중간에 크게 북류했다가 남으로 돌아오는 구간이 있다. 란저우를 지난 황하는 허란산(賀蘭山) 인산(陰山) 뤼량산(呂粱山)에 막혀 돌아 내려오다가 둥관(潼關)에서 다시 동류를 계속한다. 이 사다리꼴 모양의 지역은 건조한 황토고원이다. 몽골어로는 오르도스(Ordos), 중국어로는 허타오(河套)라고 한다. 흉노가 중원의 사서에 주로 등장하는 지역이 바로 오르도스이다. 흉노와 중원의 관계가 좋으면 호시(互市)에서 교역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흉노는 중원의 추수에 맞춰 약탈전을 벌이곤 했다.
동아시아 역사는 중원과 북방이 격하게 충돌했다가 휴지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흉노는 북방의 첫 번째 강자였다. 그 다음 선비, 돌궐, 거란, 몽골, 여진(만주) 등이 북방의 역사를 이어갔다. 북방의 힘이 결집되면 핵폭발을 일으키며 중원을 삼켜 지배했고, 지배력이 소진되면 중원 속으로 스며들거나 북방의 차가운 하늘로 흩어지곤 했다. 흉노는 약탈과 복속이란 극단을 오가다가 북흉노는 서쪽으로 사라졌고, 중원으로 들어온 남흉노는 5호16국이란 용광로 속에 자신을 불태우고는 사라졌다.
북방의 두 번째 주자로 등장한 선비는 북위(386~534년)를 세워 북중국을 통일하고, 수당에 이르러는 강남까지 통일하여 호한융합이라는 새로운 동아시아 문명을 구축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안한 융합의 쓰나미 속에 당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잠겨들었다. 거란은 선비족의 융합과는 달리 말 위에서 정복왕조를 경영했고,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동아시아를 뛰어넘은 세계사 최초의 세계제국을 만들었다. 동북의 새로운 별로 등장한 여진은 남송과 서하와 함께 삼국체제를 이루었다가 잦아들었고 훗날 다시 굴기하여 청이라는 동아시아 최대 판도의 대청제국을 세웠다.
이에 반해 중원의 주도한 왕조가 중원을 제대로 경영한 것은 한대 이후 송과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원의 식자들은 화이(華夷)란 개념으로 오랑캐를 구분하여 자신들 중심으로 역사를 썼지만, 내가 보기에 독립변수는 북방이었고, 중원은 물산이 풍부한 상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굳이 북방에 견주면 종속변수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북방초원에서 흉노를 연상하고 찾은 곳은 허란산의 암각화였다. 허란산은 동서 20~30킬로미터이고 남북 220킬로미터에 이르는 산맥으로, 닝샤(寧夏) 회족자치구와 네이멍구 자치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허란산은 서쪽으로는 완만하지만 동록은 경사가 급하다. 바로 이 급경사 암석지대에 많은 암각화가 있다. 북으로는 스쮜산(石嘴山), 중간의 허란커우(賀蘭口), 남쪽의 칭둥샤(靑銅峽)와 중웨이 중닝 일대에 분포돼 있다.
닝샤의 수도인 인촨(銀川) 외곽의 <허란커우 암화 경구>에서 계곡 양측 600여 미터 구간에 1천여 개의 암각화가 있다. 사람 머리를 그린 것들이 많다. 머리에 털이나 뿔을 그린 것도 있다. 변발이나 두건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소와 말과 사슴, 새와 늑대 등의 동물화는 무당과 토템, 곧 샤머니즘을 보여준다. 암각화는 단순하지만 질박하고, 소탈하지만 호방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곳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의 것이 많지만 서하의 문자도 있다.
사서나 암각화에 묘사된 유목민의 일상이 흥미롭다. 걸음마와 함께 기마를 배우고, 말을 달리면서도 활을 쏘는 기사법(騎射法)의 달인이란 게 먼저 떠오른다. 활은 반곡궁(反曲弓)으로 사거리가 20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돌려 적을 향해 강력한 화살을 날리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 얼마나 호쾌하고도 정교한 생사의 갈림인가.
이들은 생존환경은 척박했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푸른 하늘 아래 흰 구름이 떠가면 순진한 목동이었지만, 모이면 최강의 군대였다. 달리면 전격전이요 물러서면 매복전이었다. 적장자가 아니라 능력자가 권력을 승계하는 관습은 그들의 개방적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능력자가 목숨 건 경쟁을 거쳐 수장에 오르니 격동의 에너지가 넘치게 된다. 그것은 고대의 정치체제이지만 21세기 글로벌 경쟁시대와 직설적으로 통하는 느낌이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이 그것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흉노가 고대사에서 튀어나와 현대로 이어지는 것은 북방의 맥락이라는 내 임의의 상상력이나 디지털 노마드와 같은 해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미술로도 현대로 이어져 다가왔다.
내가 허란커우 암각화를 처음 찾아간 것은 2010년 추운 겨울이었다. 차가운 북풍 속에서 들여다보는 절벽의 암화에서 흉노 연상을 혼자 즐겼었다. 산양 몇 마리가 바위 직벽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역사의 은밀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느낌이랄까. 몇 년 후에 황하 전체를 답사하면서 다시 찾아갔다. 절벽 위의 암화가 달라졌을 리는 없다. 안내 표지가 좀 개선됐으나 전시관의 설명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7년 전에는 없던 <한메이린(韓美林) 예술관>이 별채 건물로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작가의 성이 한이라는 친근함에 끌렸을 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전시실로 들어서는 순간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작품의 크기와 수량이, 전시공간이 압도적이었다. 서예와 회화, 조형 등 미술의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그 많은 작품들이 전부 한 작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런데 그 모든 작품을 압축하는 나의 한 마디 소감은 다름 아닌 ‘흉노!’였던 것이다.
뒷다리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그의 소는 초원의 거친 소였을 것 같다. 흉노의 소는 이랬을 것 같다. 농경문화의 나긋한 소는 아니다. 작품 속의 말에서는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몸뚱이 한 부분은 생략되고 다른 부분은 힘으로 강조되어 있다. 천리마가 아니라 만리마 정도는 되는 느낌이다. 한메이린의 사슴은 몸뚱이와 뿔에 꽃이 피어난다. 흉노라는 말이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흉노의 이미지, 아니 흉노 그 자체였다.
두 번째 여행의 동반자 가운데 서예가 이경애 박사가 있었다. 당사자도 예정에 없던 예술관을 만났으니 망외의 즐거움이었겠지만, 동반자들도 전문가의 감상평을 라이브로 청취하는 횡재를 누렸다. “한메이린은 서화가 모두 뛰어나서 조화를 이루며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네요. 웅강한 필력감과 꾸미지 않은 질박한 필의도 드러내고 있군요.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운필을 통해 물씬 풍겨나오는 작가의 기상이 강렬합니다. 한국의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이 반구대 암각화, 경주 화랑유적 등의 탁본을 이용해 시도했던 작품과도 상통하네요.”
중국 장시성의 징강산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인 화가 류시호도 여행기를 보고는 짧은 평을 보내주었다. “고대사의 소재를 현대의 작풍으로 그렸네요. 중원의 전통적 사유와 변방의 도발적인 행위가 복합된 느낌입니다. 프리모던과 모던, 포스트 모던이라는 통시적 변화가 중국 개혁개방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서는 공시적으로 혼재하는 미술사를 보여주는 작품들입니다.”
한메이린은 중국의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조형 디자인을 중심으로 회화와 서예, 도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작품과 저술을 남겼다. 보수적인 중국화단에서 보기 힘든 다양성과 포용성을 함께 지닌 작가이다. 디자인에서 출발했지만 서예와 수묵, 추상과 구상 혹은 디자인과 회화의 경계를 또는 조각과 도예를 넘나들면서 광폭으로 체득한 예술 감각은 그의 출생년도를 의심케 할 만큼 독보적이다. 그는 산둥성 출신으로 올해 84세이다. 우리 눈에 익숙한 그의 작품은 베이징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푸왜(福娃)이다.
흉노를 사서가 아닌 ‘흔적’에서 음미하자는 생각으로 허란산 암각화를 찾았다가 현대미술로 되살아난 흉노도 만나게 됐다. 내가 여행한 변방에서 예술의 풍미가 가장 풍성한 곳이다. 올 가을에는 역사책을 잠시 덮고 배낭 하나 메고 인촨으로 향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감수> 류시호 중국 징강산대학 교수, 미술학 박사
윤태옥(중국여행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