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젊은 중국 소설가들의 문학적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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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 11일, 중국 최대의 포털사이트시나닷컴 계열의 시나독서채널은 베이징에서 ‘실력파 중국작가 순위’를 발표해 독서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순위의 선정은 주다커朱大可, 세여우순謝有順, 바이화白烨, 장훙張闳, 리젠쥔李建軍 등 저명 문학평론가 열 명이 심사위원단을 꾸려, 각기 자신들이 꼽는 현역 최고의 실력파 작가 열 명의 명단을 제출해 집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심사위원단 대표인 주다커는 선정 기준에 관하여, 작가들의 현재 중국 독서계와 출판계에 대한 영향력과 부, 명성은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58명의 작가들이 물망에 올랐고 1위(9표)는 모옌莫言, 2위(6표)는 위화余華, 스티에성史鐵生, 아라이阿來, 왕안이王安憶, 3위(5표)는 베이춘北村, 쑤퉁蘇童, 옌롄커閻連科, 쟈핑아오賈平凹, 베이다오北島, 4위(4표)는 거페이格非, 티에닝鐵凝, 둬둬多多, 5위(3표)는 한둥韓東, 왕숴王朔, 린바이林白, 천중스陳忠實, 장웨이張炜, 한사오궁韓少功, 위젠于堅, 6위(2표)는 찬쉬에殘雪, 판원范穩, 리루이李銳, 장청즈張承志, 류량청劉亮程, 자오융밍翟永明, 7위(1표)는 주원朱文, 예자오옌葉兆言, 아청阿城 등 31명이었다.

무소불위의 언론권력으로 성장한 대형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임의로 현 문단의 지형을 논단한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월권일 수 있으며 아울러 출판계와 연계한 어떤 상업적 목적이 있다거나 심사위원단의 주관적 기호가 과하게 반영되었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실제로 시나닷컴은 2003년 ‘돈벌이’가 될 만한 두 문단 중진[왕멍王蒙과 장제張潔]을 ‘문학선생’, ‘문학여사’로 선정, 발표해 독자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실제로 위 순위의 발표장에서 기자들은 “작가의 실력을 수치로 객관화할 수 있는가?”,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주다커가 58명 중 31위로 선정된 것이 순위의 공신력을 떨어뜨린다.” 등의 의문과 비판을 표시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실력파 중국작가 순위’가 전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심사위원단에 속한 평론가들은 확실히 현 중국 비평계의 대표적 논자들이다. 또한 그중주다커와리젠쥔이 비평적 입장에서 진보와 보수, 양 극단을 대표하며 공공연히 대립한 바 있음을 감안하면 애초에 심사위원단 성원들의 다양성과 객관성도 어느 정도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모옌, 위화, 쑤퉁 등 다수의 표를 얻은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공인된 그들의 작품 수준과 활동 이력을 볼 때, 어느 정도 그 선정의 합리성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더욱이 현재 출판시장에서 절대적 지명도를 가진 궈징밍郭敬明, 한한韓寒 등 ‘80후後 작가’(80년대 이후 출생한 대중 작가들)들은 단 한 명도 순위에 들지 못한 반면, 상대적으로 시장 호응도가 떨어지는 모더니스트 작가 찬쉬에, 망명 시인 베이다오, 이미 영화계로 근거지를 옮긴 주원 등이 순위에 올랐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비교적 엄정하게 실력 일변도의 심사 기준을 적용했음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필자가 큰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비평계가 손을 잡고 이상과 같은 대형 문학이벤트를 시도한다는 사실이다. 이 이벤트는 인기작가의 대중 선호도에 대한 평범하고 일회적인 조사 발표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거대한 여론 장악력을 가진 포털사이트가 권위 있는 대표 평론가들과 합작해 당대의 실력파 작가 58명을 선정하고 그 결과를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개 발표하였다. 나아가 이 58명의 작가 명단을 놓고 대대적인 네티즌 투표를 유도하여 연말에 명실공히 실력과 인기를 종합한 최종 순위를 확정, 발표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독자-평론가로 이뤄진 삼각 회로의 커뮤니케이션은 크게 활성화될 것이며 중국 출판계에서 이미 완비된 대표작가 선집, 전집류의 판매 증가와 순문학적 성격의 문학적 아비투스 형성이 시도될 것이다. 그 결과의 성패는 차치하고라도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중국 비평계의 과감한 대중 접근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혹자는 이를 선정주의, 상업주의와의 결탁이라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번역문학과 대중문학에 밀려 급격한 영토의 축소를 경험하고 있는 순문학은 더 이상 엄숙주의에 머물러 시장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몸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현재 한국 문단은 중국보다 더 열악한 출판 상황에서도 작가 인지도 확대의 어려움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세대 교체가 이뤄지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처럼 새로운 발상으로 기존 작가들의 문학적 성취를 독자들에게 재인식시키려는 중국 문단의 노력은 본받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현재 전세계적인 문학의 위기 상황에서 다양한 문학적 모색을 감행하는 중국의 젊은 소설가들을 선택, 소개하는 데 앞서 필자는 주관적 기호의 관여를 피하기 위해 먼저 위의 ‘실력파 중국작가 순위’를 참고하려 한다. 아울러 ‘60년대 중후반 이후 출생’이라는 한국의 ‘젊은 작가’ 분류 기준과 관련해 그 기준의 상한선을 ‘60년대 출생’으로 끌어올릴까 한다. 중국의 최근 문학사에서 ‘신생대新生代 작가’라고 불리는 젊은 작가들의 조류는 주로 ‘60년대 출생’을 가리키며 통념상 중국 문단에서도 ‘청년 작가’의 경계선을 ‘45세 미만’으로 잡는다. 또한 한국적 기준을 적용할 경우 위의 순위에서 뽑아낼 수 있는 소설가는 겨우 한두 명에 불과하다. 그 원인은 평론가 주다커가 순위 선정의 총평에서 “중진 작가들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반면 후배 작가들의 실력은 아직 모자라다”고 한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60년대 출생’으로 범위를 한정할 때 시인, 소설가, 수필가가 총망라된 위의 순위에서 대상이 되는 소설가는 대략 위화(1960년 생), 한둥(1961년 생), 쑤퉁(1963년 생), 거페이(1964년 생), 주원(1967년 생)이다. 필자는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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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의 중편「나는 달러가 좋아」(1997)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버지는 침대가에 앉아 콧등에 돋보기를 얹고 스탠드 불빛 밑에서 내 원고 뭉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무척 감동했다. 아버지가 수여하는 문학상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그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짐작할 만했다. “삶에서 성性 말고 다른 건 없냐? 나는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구나.” 아버지는 원고 뭉치를 옆에 내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성에 화가 난 것이다. “내 소설에 성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작가라면 사람들에게 뭔가 진취적인 것을 줘야 하지 않니? 이상, 목표, 민주주의, 자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버지, 아버지가 말한 그런 것들은 내 성 안에 다 있어요.”

문단에 거센 논쟁을 불러 일으킨 위 문제작은 도시에 사는 독신의 무명 소설가가 고향에서 올라온 아버지에게 여자를 선사하고픈 효심에 하루 동안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전체가 정치, 사회적인 알레고리이며 자기욕망에 솔직하지 못하고 전통적 가치에 연연하는 아버지는 중국의 구세대를 가리키는 총체적 상징인 동시에 아들(작가)의 극복 대상이다. 주원은 이 작품 외에도 중편「가난뱅이는 죄다 때려눕혀야 한다」에서는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우중愚衆에게 온몸으로 도전하는 한 기계공을 묘사하였고, 중편「재교육」에서는 80년대 후반 학번(천안문 사태 세대)을 10년만에 대학에 소환, 재교육시키는 상황을 가상 설정하여 국가이데올로기의 상존하는 위협을 경고하였다. 또한 단편「난징의두안리」에서는 문인들을 동경해 난징 문단의 ‘꽃’으로 살아왔던 한 여자가 난징을 떠나기 앞서 자신과 동침했던 문인들을 한 자리에 불러 차례로 범하는 광경을 연출한다. 그녀는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어쩔 줄 모르는 문인들에게 “너희는 지금껏 한 번도 내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주지 못했다!”라고 외친다. 지식인 작가들의 온갖 허위와 우유부단함에 대한 자기반성이 은유적이면서도 즉물적으로 수행된다.

기존 세대를 향한 주원의 반역 정신은 유난히 치열하지만 어찌 보면 ‘반역 정신’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시작된 중국 ‘당대문학’의 출발점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공산당에 의해 작가들에게 강제되었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 기간에 와서는 세계문학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용문학이 되었다. 기존 작가들의 작품 창작과 발표가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 “정치를 돌출시키고, 계급성을 돌출시키고, 당성黨性 을 돌출시키는” ‘삼돌출三突出’의 문예만이 장려됨으로써 소설 영역에서는 소위 영웅적 프롤레타리아 인물의 모범화, 신화화가 판을 쳤다. 이데올로기의 장에 예술의 장이 복속되고 문학의 예술성, 내면성이 정치적 기능주의에 희생되는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니 그 국면이 막을 내리자마자 반역의 정신들이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든 문학의 조류들이 70년대 말~80년대 중반까지 차례로 이어진 상흔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 등이다. 하지만 위 세 조류는 달라진 이데올로기 환경에서 구시대를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문학의 지위와 자율성을 복권하는 역할에 그쳤다. 실질적으로 중국 현대문학의 반역정신이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후반에 출현한 ‘선봉先鋒문학’이다.
‘선봉’이란 아방가르드 혹은 전위주의의 중국식 명칭이다. 따라서 선봉문학이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선봉문학은 그 대표자인 거페이가 “우리는 한 번도 유파의 결집을 꾀한 적이 없었다. ‘선봉’이란 말은 평단에 의해 붙여진 꼬리표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듯이 자각적인 문학운동은 아니었다. 그것은 60년대에 출생한 작가들과 소수의 선각자들이 황폐화된 중국문학의 토양에 갑자기 주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서구 모더니즘 문학의 양분을 흡수해 실험, 발전시켜 나간 산물이었다. 이에 대해 선봉소설의 선구자 마위엔馬原이「소설과 우리의 시대」라는 글에서 흥미로운 술회를 한 바 있다.

“80년대에 나의 동시대 작가들은 함께 분발하여 대략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십 년 동안 유럽과 세계소설사에서 백 년간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연습하였다. 그것은 격동의 시대였다. 모든 유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고 우리가 해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실험해 보았다.”

마위엔의 말대로 그 시대에는 메타소설, 가상역사소설, 마술적 리얼리즘을 표방한 소설 등 온갖 실험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갈색의 세때」로 유명한 거페이가 선봉소설의 대명사로 통하긴 하지만 우리의 귀에 익숙한 위화, 쑤퉁도 ‘선봉작가’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이들이 등장하기 전, 중국 소설은 전통적 리얼리즘소설 일색이었다. 정치의 자장에서 문학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과거 30년 넘는 중국의 지식통제로 인해 기존 작가들은 고작 소비에트리얼리즘이나 19세기 유럽문학의 전통밖에 알지 못했다. 60년대 출신 작가들이 대학에 입학한 80년대 초 이후에야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20세기 초 유럽문학의 대출이 허용되고 동시대 세계문학의 흐름이 일반에 개방되었다. 그래서 위화조차 1984년「18세에 집을 나가 먼 길을 가다」로 데뷔한 이후에도 ‘배우면서’ 써야했다. 그는 어느 대중강연에서 자신이 카와바타야스나리에게서 사물 묘사를, 윌리엄 포크너에게서 심리 묘사를 배웠으며 그밖에도 카프카, 마르케스 등에게서 계속적인 수혈을 받으며 문학 실험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가 비로소 소설 형식의 수련과 실험에서 해방된 것은 1992년 작『살아간다는 것』부터이다.

따라서 60년대에 출생한 젊은 작가들의 반역정신은 태생적인 동시에 운명적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마오쩌둥의 눈으로만 세계를 인식하고 글을 써야 했던 시대를 벗어나 빈약한 문학사적 전통의 토대 위에서 새로이 중국소설의 에피스테메를 형성해야 했던 첫 세대였다. 위화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서술로 인간 욕망의 원형을 체현해내는 것을 초기 글쓰기의 목표로 삼았고(「어떤 현실」,「옛사랑 이야기」등) 쑤퉁은 주류 역사의 시각에서 소외된 주변인들의 비극과 운명을 그려내고자 힘썼다(「처첩성군」,「등불 세 개」등). 그리고 거페이는 현실의 실재성에 대한 의문을 환상과 분열적인 플롯으로 표현하였다(「갈색의 새떼」,「금슬」등). 여기에 기존 평단의 어리숙함이 그들의 반역정신을 부각시키는 데 일조했다. 세계문학과 동시대성을 갖추지 못한 평론가들이 젊은 작가들의 새 흐름을 낯설게 받아들여 ‘몽롱시’, ‘선봉문학’ 같은 이름표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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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문학의 전성기는 고작 90년대 초반까지였다. ‘실험’이 오래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심화됨에 따라 순문학의 영토가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선봉문학의 전위주의와 형식주의가 극단화되어 독자들의 외면을 받은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마위엔은 “(선봉소설의) 실험 이후 무엇이 남았는가? 소설에서 가장 질 낮은 것이 르포소설이다. 소설의 생명인 허구가 결여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 르포소설만 살아남았다. 르포소설이 무엇을 담고 있는가? 비밀스러운 사생활과 음모이다.”라고 개탄했다. 대중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나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극적인 플롯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사실 르포소설의 속성은 일부 역사소설과 일명 팩션에까지 연결된다고 본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중국 소설독자들의 상당수는 고대의 황제나 현대사의 위인들, 현재 뉴스의 초점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중역사소설과 실화소설에 눈길이 쏠려 있다.

선봉소설가 진영 내부에서도 살 길을 찾아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마위엔과거페이는 교수로서 대학 사회에 안착했고 왕강王剛, 리펑李馮은 극작가로 변신했으며 베이춘은 기독교에 귀의해 종교적 심성을 일깨우는 대중소설을 쓰고 있다. 한편 위화와 쑤퉁도 작품세계의 변화를 통해 혹독해진 외부환경에 대응했다. 두 사람은 이른바 ‘신역사주의소설’이라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중국의 신역사주의소설은 80년대 후반에 처음 출현했다. 기존의 역사소설이 주로 고대 역사와 현대 혁명사의 영웅적 인물들을 제제로 삼아 주류 역사관을 고취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었던 것과 달리 개인의 경험과 운명을 중시하여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또한 역사철학면에서도 총체적 발전관 및 역사 발전의 객관적 법칙성을 폐기하고 역사순환론의 입장을 보였다. 우선 류전윈劉震雲의『고향 하늘 아래 노란꽃』, 모옌莫言의「붉은 수수밭」등이 이 조류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위화의『살아간다는 것』과 『허삼관매혈기』, 쑤퉁의「처첩성군」,「홍분」,『나, 제왕의 생애』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화된 역사소설 전통의 극복, 역사의 진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회의, 영웅신화의 전복, 역사적 사실성의 탈피 등과 같은 중국 신역사주의소설의 특징은 위화, 쑤퉁에 이르러 크게 뚜렷해진다. 우선 그들의 위 소설들에서는 어떠한 이념적 가치도 절대선이나 절대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허삼관매혈기』에서 피를 뽑아 가족을 지키는 허삼관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환경은 배경으로 존재할 뿐이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가는 개인의 비극적 운명과 달관의 자세다. 또한 그 개인들은 주로 주류 사회와 이념에서 소외된 주변부 인물들이다. 특히 쑤퉁은 구사회의 대갓집 첩, 건국 이후 노동개조를 받는 화류계 여성 등 수난 받는 여성들을 즐겨 인물로 다뤘다. 더욱이『나, 제왕의 생애』에서는 ‘섭국’이라는 가상의 고대 왕국을 설정하고 그 나라의 왕이었다가 줄타기 광대로 변신하는 단백의 운명을 그림으로써 역사적 사실성의 족쇄에서 벗어나 권력게임과 시간의 보편적 무상함이라는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위화와 쑤퉁은 현재 중국 문단에서 손꼽히는 대표작가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정통문학 작가로서의 평가와 함께 폭넓은 대중성까지 확보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최근작인『형제』,『측천무후』,『눈물』등을 보면서 그들의 시선이 너무 과거에 쏠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역사소설은 장편소설이 주 출판 양식이며 드라마나 영화로의 각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상업주의와의 관계가 긴밀하다. 특히 쑤퉁의『측천무후』는 전반부에서 각 장마다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을 동원해 동일한 사건 연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묘미가 있는 반면, 후반부에서는 마치 역사서를 그대로 베낀 듯한 태만함을 노출한다. 그 이유가, 이 작품의 영화화가 집필 중 중도 무산되었기 때문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위화의『형제』도 상, 하권의 상이한 품격과 완성도 로인해 구설수에 오른 바 있는 작품이다. 역시 출판시장의 메커니즘과 창작 과정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빚어졌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선봉소설가들의 주류사회 편입과 상업화를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순문학의 주변부화라는 전지구적 현상에 대한 작가들의 어쩔 수 없는 제한적 선택들 중 하나일 뿐이다. 마위엔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더없이 냉철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나는 소설가에게 세 가지 길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첫 번째 길은 영상물을 지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발레처럼 변해야 한다. 어릴 적 발레를 배운 아이가 마지막에는 인기가수의 백댄서로 전락하는 것과 같다. 소설가는 최종적으로 (영상물의) 각본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가의 중심적 위치에서 종속적 위치로의 전락이다. 두 번째 길은 세속에 영합해, 잘 팔리는 책을 쓰는 것이다. 독자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쓰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 길을 준비하고 있다. 타락하여 베스트셀러를 쓸 것이다. 아마 나는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 길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처럼, 연극처럼, 다른 예술처럼. 많은 예술들이 이미 박물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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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한 단락은 80년대 중국 순문학의 뜨거운 에너지가 90년대 자본주의와 속물주의의 파고에 매몰된 후 그 자리에 남은 젊은 작가를 은유하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 시절 들끓는 청춘의 에너지를 온갖 기행과 연애, 시쓰기에 바친 후 졸업과 함께 들어간 직장에서 40대 여상사와의 불륜에 남은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사표를 던진다.

나는 절뚝거리며 기차역에 가서 현장표를 끊어 지체없이귀향길에 올랐다. 기차가 요동을 멈춘 뒤에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배를 탔다. 육지에 오른 뒤에는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집에 닿았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너무 오랜만의 귀향이라 조금 흥분되었다. 문을 연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나의 아버지였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돋보기 안경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 오늘 임포가 됐어요, 임포가 됐다고요.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었다. 내가 드디어 임포가 되었노라고, 드디어 담담히 내 현실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노라고.
– 주원,『동생의 연주』(1995)

순문학의 시대는 갔다.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몸부림쳤던 젊은 시절도 가버렸다. 이제 ‘임포’의 상태에서 현재의 문학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불확실한 전경을 향해 걸어나가야 한다. 전경에는 여러 길이 있으며 그중에는 확실히 마위엔이 말한 세 가지 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본을 쓰고, 대중서를 쓰고, 박물관에 들어가는 것 말고 네 번째 길은 없을까?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한둥의 아래 소회에서 그 길을 찾아보자.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책들, 그토록 많은 양서들이 있는데 나는 왜 계속 글을 써야 하는가? 이것은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인생과 운명이 있는데 나는 왜 계속 활기차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과 같다.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든 없든 그만이라는 허무하고 실제적인 감정이 쭉 내 삶과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내 글쓰기와 삶을 연계시키지 않으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진실하게, 가능한 한 진실하게 내 자신(삶, 운명, 감정, 사유, 관점, 방식)에게 접근하느냐는 것이 내게 있어 무의미 속의 의미이다. 자신에게 배우거나 자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내가 아는, 문학의 범위 안에서의 유일한 길이다.”
– 한둥,「『뿌리내리기』와 나의 글쓰기」(2003)

한둥은 현재 중국문단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존재이다. 80년대에는 시인이자 시론가로 활약하며 중국 아방가르드 시문학의 선구자로 우뚝 섰으며 90년대 들어 소설 창작으로 전향해 현재까지「장애」,「나의 플라톤」,「애정역학」같은 반사회, 반정치, 일상 지향의 중편소설과『뿌리내리기』같은 문혁시대의 풍자적 축도로서의 장편소설을 창작했다. 특히 지식인의 허위와 굴절된 욕망의 아이러니를 파헤치는 그의 시각은 예리하기 그지없으며 그의 문혁 관찰은 당시의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권력관계와 그 폐해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그것의 끈질긴 영향력을 간결하고 시니컬한 문체로 묘파한다.

하지만 중국문단에서의 그의 독특한 위치는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주원과 함께 1998년 일명 ‘단절斷裂’ 사건을 일으켜 기존 문단에 반역의 깃발을 든 장본인이다. 그해, 그와 주원 등은 ‘단열: 한 설문지’라는 조사 설문지를 일부 작가들에게 발송했다. 그들은 본래 그 설문조사의 결과에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설문지에 적힌 우상파괴적 조사문항이 일으킬 파장으로 자신들과 기존 문단을 상호 단절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항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1. 루쉰은 당신에게 영향을 준 적이 있는가? 2. 중국의 양대 문학상인 마오둔문학상과루쉰문학상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3. 유명 문학지들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4. 현재의 평론이 당신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가 등이다. 한마디로 기존 중국문단의 모든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설문이었고 한둥과 주원은 각 문항에 대한 자신들의 대답을 일시에 공개했다. 한둥의 경우, 그 대답은 1. 루쉰은 늙은 돌덩어리이며 그의 권위는 증명되지 않았다. 또한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내가 영향 받은 중국 작가는 단 한 명도 없다. 2. 두 문학상을 가장 형편없는 작품에 주는 상이라고 한다면 그 공정성을 세상이 다 알아줄 것이다. 3. 유명 문학지들은 지식인과 성공한 작가들의 속된 영혼을 가려주는 이상적인 엄폐물이다. 또한 각 지역의 작가협회는 정부를 대신해 작가를 관리하는, 은밀하고 예의바른 기관일 뿐이다. 4. 현재 문학평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젊은 작가들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등으로 요약된다.

위 설문항목과 그의 대답의 객관성이나 과격성에 대해서는 굳이 서술하지 않겠다. 상업문학의 위세에 순문학 진영이 나날이 위축되고 이에 반해 기존 문단은 나날이 보수화되는 당시 상황에서 이 설문이 일으킨 파장이 중국의 모든 작가들에게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싶다. 어쨌든 그는 미리 “현존하는 문학질서에 참여해 그중 한 고리가 될 것이냐, 스스로 퇴로를 막고 기꺼이 영원히 영락한 작가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한 다음 설문지를 고안했다고 밝혔으며 자신의 말대로 사후에 ‘영락했다’. 어떤 대학 강단에도 서지 않았고 어떤 출판사나 문화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았으며 자신이 사는 난징의 문단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었다. 물론 독자와의 관계는 예외다. 그의 첫 장편소설『뿌리내리기』는 모 신문사가 제정한 ‘중국어매체문학상’을 수상했고 2005년 작『나와 너』는 7만 부라는 준수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한둥과 주원은 ‘단절’ 사건으로 청춘의 발칙한 에너지를 다 소진한 후 임포 상태에서 마위엔이 말한 세 가지 길 외의 네 번째 길로 들어섰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작가의 길이다. 주원은 1999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창작의 기본 입장에 대해 “그것은 자유정신입니다. 예술가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작품에서 ‘자유정신’이라는 말을 반복해 말하라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둥은 같은 인터뷰에서 “나의 전제는 곧 나 자신입니다. 이 전제가 곧 내가 나일 수 있고 내 생명 깊은 곳에 파고들 수 있는 이유이지요.”라고 말했다.

현재 주원은 더 많은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해 영화로 주무대를 옮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소설보다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더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서『윈난』(우리나라에는 ‘구름의 남쪽’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됨),『해산물』같은 예술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한둥은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 난징에 은거하며 2년에 한 권꼴로 장편소설을 펴내고 있다. 한참 창작에 몰두할 때는 거의 ‘폐관’ 수준으로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끊고 지낸다. 문학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모든 관계를 제거하고 오직 “어떻게 진실하게, 가능한 한 진실하게 내 자신에게 접근하느냐는 것”을 ‘무의미 속의 의미’로 삼은 채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하고 고루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것이 마위엔이 놓쳤거나 일부러 거론하지 않은, 이 시대를 사는 중국 소설가의 네 번째 길일지도 모른다.

(계간 실천문학 제 88호 2013.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