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설古今小說- 양겸지가 배를 타고서 협객승을 만나다楊謙之客舫遇俠僧 4

양겸지가 배를 타고서 협객승을 만나다 4

“하마터면 그대들을 다시는 못 만날 뻔했네 그려. 현령이야 그리 무섭지 않네만 마님은 정말 대단하더군. 마님이 어디서 그런 법술을 배웠는지 모르겠으나 우리하곤 차원이 달라. 며칠 지나고 선물을 준비하여 그대들과 함께 현령 나리를 찾아뵈어야겠어. 현령 나리를 다시는 괴롭히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방노인은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술자리를 파하자 여러 노인들이 일어나면서 방노인에게 말했다.

“언제고 약속이 정해지면 같이 만나서 현령 나리를 찾아뵙시다.”

양겸지가 현청에서 안채로 돌아와 이씨 여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이씨 여인이 양겸지에게 말했다.

“나리 오늘 선위사 설공을 찾아뵈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물이라도 준비하고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소?”

“예물은 걱정 마십시오. 황금색 실로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 무늬를 새긴 갈포 두 필, 명필의 서예 작품 한 점, 골동 벼루 하나 이렇게 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준비한 것을 꺼내놓으니 양겸지가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양겸지가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가마와 마차를 준비하게 하여 밤을 새워 길을 떠났다. 날이 밝을 무렵 마룡지방에 도착하였다.

설선위 선공이 거처하는 현청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 현청의 주변 사방 20여 리를 벽돌로 높이 쌓아 막았고 그 벽 안쪽에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 가운데 현청 건물이 있었고 더불어 연못과 정자가 세워져 있었으니 마치 한 나라의 왕이나 진배없었다. 양겸지는 현청의 정문 앞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자신이 도착하였음을 통기하도록 하였다. 잠시 후 현청 안에서 사람이 나와 양겸지를 모셨다. 선위사 설공은 몸소 대문까지 나와 양겸지를 맞아주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에 올라 다시 예를 차리고 나서 내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설공이 양겸지에게 차를 권하였다. 서로 날씨 이야기며 안부를 묻는 말을 주고 받고난 다음 화원 안의 대청마루에 차려진 술자리로 옮겼다.

설선위가 보니 양겸지가 비록 몸집은 크지 않으나 학문이 깊고 말주변도 제법 빼어나며 시도 잘 짓고 술도 잘 마실 줄 아는 위인이었다.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 순간 설선위는 양겸지의 글재주를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어 사람을 시켜 오래된 거울을 들고 나오게 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거울은 자색 금으로 주조한 것으로 정말 맑고 깨끗하며 빛이 나며 아무리 작은 거라도 다 비춘다오. 이 거울의 뒷면에는 네 개의 괘卦가 있어 그 괘를 누르면 각각 네 방위에 해당하는 소리가 나고 가운데를 누르면 12음계 가운데 한 음계 소리가 난다오. 한나라 성제成帝는 조비연이 화장하는 동안 이 거울을 들어주었다고 하나 미약을 끊지 못하더니 마침내 거울을 들고서 중얼중얼하다가 붕어하였다고 하오.”

양겸지가 그 거울을 들고서 바라보니 과연 기이하고도 오래되었도다. 하여 그 거울에 시를 한수 썼으니:

아름답고도 기이하도다, 이 물건이여,
황제黃帝 때 만들어졌구나.
위대한 대장장이가 틀을 뜨고,
염제炎帝가 도끼로 모양을 잡았구나.
혼돈混沌이 갈라지니,
우주 한가운데 빛이 솟아나도다.
복희伏犧씨가 괘를 만드니,
동서남북이 이제 자리를 잡았네.
이제 바야흐로 음률을 만들고,
사광師曠이 그 음률을 검사하고 바로잡았네.
음률의 높고 낮음과 맑은 것과 탁한 것,
음정이 조화를 이루었네.
모양과 색깔이 다 갖추어지니,
그 쓰임새 역시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더라.
군자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의관을 정제하고.
요조숙녀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더라.
아름답고 추한 것이 그대로 다 드러나니,
조금도 더하거나 빼는 것이 없구나.
즐거워하거나 화내는 것은 그대의 몫이니,
그것이 어찌 비춰주는 나 거울 소관이겠는가?

양겸지는 시를 다 적고 나서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아니하고 처음 적은 그대로 설선위에게 보여주었다. 설선위가 받아서 꼼꼼히 읽어보니 너무도 잘 쓴 작품이라 연신 칭찬해 마지않았다. 한대의 명문이요, 진대의 명필이라, 초당사걸인 왕발(王勃:650-676)·양형(楊炯:650-693?)·노조린(盧照隣:635?-689?)·낙빈왕(駱賓王:640?-684)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작품이라 칭송하였다.

설선위는 작고 오래된 거울 하나를 또 들고 나오게 하였다. 그 거울은 방금 전 그 거울보다 더 오래되고 더 기이하였다. 설선위는 양겸지에게 시 한 수를 더 부탁하였다.

숨기고 싶은 저 깊은 구석까지 비추어냄은,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야.
귀도 없고 눈도 없이,
그저 비추는 자의 형상을 그대로 따를 뿐.
모든 걸 그대로 되비춰주나니,
비춤과 되비춤을 모두 잊었구나.

설선위는 양겸지가 지은 시를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지은 시구는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구려.”

설선위는 마침내 양겸지를 존중하게 되었다. 설선위는 양겸지를 닷새 동안이나 붙잡아두었다. 설선위는 매일 잔치를 열어 양겸지를 환대해 마지않았다. 설선위가 방노인의 일을 물어오기에 양겸지는 그에게 전후사정을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한참을 웃었다. 양겸지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자신이 다스리는 안장현에 돌아가야 함을 고하였다. 설선위는 양겸지를 떠나보내기가 못내 아쉬웠던 듯, 양겸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올해 나이는 어떻게 되시오?”

양겸지가 대답하였다.

“별로 이룬 것도 없이 그저 36년을 살았습니다.”

설선위가 다시 말하였다.

“소인이 올해 스물여섯이니, 저보다 열 살이 위시구려.”

설선위는 양겸지를 형님으로 모시었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서 서로 기뻐하였다. 설선위는 술자리를 파하고 양겸지를 떠나보내며 양겸지에게 2천여 냥에 해당하는 금은 술잔을 선물로 주었다. 양겸지가 거듭 사양하니 설선위가 이렇게 말하였다.

“저와 형님은 이미 의형제가 되었는데 무얼 따지십니까? 저야 이미 살림이 풍족하고 형님은 처음 임지에 오셔서 이곳저곳 쓸 데가 많으실 것이니 제가 자주 형님에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형님은 사양하지 마십시오.”

양겸지는 설선위와 인사를 나누고 안장현으로 돌아왔다. 안장현에 돌아오니 방노인과 몇몇 노인들이 양고기, 술, 비단 그리고 각자 은자 백 냥 도합 2천여 냥을 들고서 현청으로 찾아왔다. 양겸지가 그들에게 입을 열어 고하였다.

“번거롭게 뭘 이런 걸 다 가져왔는가? 받기가 좀 그러하구먼.”

노인들이 일제히 대답하였다.

“이건 그저 소인들의 조그만 성의표시에 불과합니다. 나리는 그 동안 우리 현에 부임해 오셨던 다른 현령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곳이 비록 오랑캐 땅이라 다스리시기에 만만치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한결같이 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희들이 나리를 믿고 따를진대 감히 누가 나리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온 현의백성들이 나리를 믿고 따를 것입니다.”

양겸지는 그들의 신실한 마음을 확인하고서 그들을 관사로 초청하여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가 파하자 그 노인네들은 인사를 올리고 떠나갔다. 이 고을의 오랜 관례에 따르면 고을 주민이 관청에 문서로 뭔가를 아뢰고자 한다면 그 일이 해결되든 말든 우선 종이 값으로 한 장 당 3전을 내야 했다. 임기 동안에 이런 건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수입이 많아질 것이었다. 살인사건을 저지르고서 범인이 선처를 바란다면 이웃사람들이 그 범인의 가산을 조사한 다음 삼등분으로 나눠 하나는 현령에게, 하나는 피해자 측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범인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렇게 하면 관청과 일을 풀어나가기가 훨씬 수월하였다. 더불어 풍습이 하나 더 있었으니 매 명절 때마다 원근각처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현령에게 선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러니 양겸지는 안장현에서 근무하는 3년 동안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양겸지는 매번 선물을 받을 때마다 그걸 설선위에게 맡겨두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양겸지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어느 날 양겸지가 설선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족함을 알면 욕먹을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곳 안장현에 현령으로 부임해 와서 아우님이 사랑으로 베풀어준 많은 선물들과 내 자신의 봉급까지 더하여 생활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같아 벼슬길에서 물러난다는 사직서를 제출하였소이다. 다만 나의 재산을 내 고향으로 옮겨갈 일이 걱정이외다. 하여, 아우님의 도움을 청하는 바이오.”

설선위가 양겸지에게 대답하였다.

“형님께서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였다면 제가 만류할 때는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형님이 여기서 모으신 재산은 제가 사람을 시켜 배에 실어드릴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설선위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설선위는 더불어 황금 천 냥에 달하는 이별의 선물을 먼저 배에 실어놓게 하였다. 양겸지는 설선위를 만나고 현청으로 다시 돌아와 방노인과 여러 노인네들을 불렀다.

“내가 이 안장현에서 3년을 지내면서 그대들에게 참으로 폐를 많이 끼쳤소. 내가 이미 사직을 신청한 바이므로 오늘 그대들과 이별의 정을 나누고자 하오. 내가 그대들에게 약간의 선물을 나누고자 하니 내 성의로 알고 받아주길 바라오. 내가 부임해올 때 가져온 짐 상자 그대로 떠나갈 때 가지고 가는구려. 어디 한번 올라와서 직접 확인해보시구려.”

노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나리에게 제대로 순종하지도 못한 저희들 주제에 어찌 감히 나리께 선물을 받겠나이까?”

노인네들은 양겸지가 준 선물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다. 양겸지가 안장현을 떠나는 날 안장현의 백성들은 모두 향기로운 꽃 모양의 등촉을 밝혀들고 그를 배웅해주었다. 안장현의 백성들은 양겸지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설선위가 양겸지 일행이 탈 배에 미리미리 짐을 실어두었음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양겸지와 이씨 여인은 배에 몸을 싣고 안장현을 찾아오던 그 길을 그대로 다시 밟아 돌아기로 하였다. 별 탈 없이 한 달 정도 배를 저어가니 예전에 양겸지가 배를 정박시켜 놓고 이씨 여인을 처음 만났던 곳에 도착하였다. 그 곳은 이씨 여인의 집에서 멀지 아니하였다. 양겸지가 배를 강둑에 대게 하니 이씨 여인을 양겸지에게 소개해주었던 그 중이 다른 몇 사람을 대동하고서 그곳에 기다리고 있다가 배에 올라 양겸지에게 인사를 하였다. 양겸지와 그 중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씨 여인도 그 중에게 인사를 올렸다.

양겸지는 곧장 술자리를 마련하게하여 그 동안 헤어져 지내면서 쌓인 정을 나누었다. 양겸지는 안정현에서 겪은 일을 그 중에게 일일이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소승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소승이 여기 찾아온 것은 다른 일이아니라 나의 조카 때문입니다. 소승의 조카는 이미 결혼하여 남편이 있는 몸이나 나리 혼자서 안장현에 부임하는 것은 너무 무리인 듯하여 염치불구하고 조카를 시켜 나리를 모시게 하였던 것이외다. 참으로 고맙게도 천지신명이 보살피셔서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소승의 조카는 남편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니 더 이상 나리를 모실 수 없을 듯합니다. 여기 실고온 재물은 나리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시기 바라오.”

양겸지는 이 말을 듣고 나서 두 줄기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더니 이씨 여인과 그중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저를 이렇게 괴롭게 하시다니! 그러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외다.”

양겸지는 작은 칼을 꺼내더니 자기 목에 겨누고 찌르고자 하였다. 이씨 여인은 깜짝 놀라 양겸지를 껴안으며 칼을 빼앗고는 목 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그 중이 달래며 말하였다.

“괴로워할 필요 없소이다. 이별은 피할 수 없는 것. 나는 그녀의 남편에게 이미 약속하였소이다. 출가한 사람으로서 어찌 거짓말할 수 있겠소.”

양겸지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재물은 스님과 이씨 여인이 모두 가지고 가시오. 나는 그저 괴로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을 뿐이외다.”

그 중은 양겸지의 진심을 알아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소승에게 나름 해결책이 있소이다. 일단 오늘 저녁은 배 안에서 묵고 내일 이별을 나누기로 합시다.”

양겸지와 이씨 여인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도 잊은 채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 세수를 마치고 아침을 먹고 나자 그 중은 양겸지가 안장현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모은 재물을 열 등분하자고 제안하였다.

“양공 나리가 그 중 여섯을 갖고, 제 조카가 셋을 갖고, 소승도 하나를 갖겠나이다.”

양겸지와 이씨 여인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씨 여인과 양겸지는 서로 부둥켜안고 있으니 어디 헤어지려 하랴. 진정 이제 헤어지면 죽어도 다시 못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씨 여인은 하는 수 없이 강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겸지 역시 배를 띄웠다. 그 중은 또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물길이 가장 험난하오. 소승이 나리를 임안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리다. 우리가 다른 사람 물건을 빼앗아서도 아니 될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우리 재물을 빼앗겨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중은 양겸지를 임안까지 바래다주었다. 양겸지는 그 중을 억지로 두 달 동안 집에 머물게하고는 후히 사례하고 더불어 편지를 써서 이씨 여인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이때부터 양겸지와 이씨 여인 사이에 편지가 끊일 새가 없었다. 시 한 수를 들어 이를 증거하노라.

낯선 땅, 낮은 벼슬, 외로운 이 몸,
스님 덕에 소식 주고받는 짝이 생겼네.
누구한테도 함부로 대하지 마시라,
이 세상 어딘들 기인이 없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