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겸지가 배를 타고서 협객승을 만나다 2
9일째 되는 날 그 중이 7,8명의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담은 상자를 어깨에 메게 하고, 사람을 태운 가마를 메게 하고서 돌아왔다. 가마의 발을 들어 올리고는 그 안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부축하여 선실 쪽으로 데려오는데 나이가 스물너덧 살 먹어보였다. 그 여인이 어떻게 생겼던고? 시에 이르기를:
봄날의 온갖 아름다움을 그녀 혼자 다 가져갔나,
석류빛 치마는 하늘에 붉게 물든 구름과도 같구나.
맑은 눈은 가을날 맑은 물빛처럼 깊고 그윽하고,
양왕襄王 자옥군紫玉君보다 더 빼어난 미모.
또 시에 이르기를:
해당화 가지에 달이 걸린 깊은 밤 삼경,
술에 취한 양귀비인가, 당할 자 없는 미모로다.
말 잔등에서 연주하는 비파소리는 어서 가라 재촉하는데,
아만阿蠻1은 공연히 농염한 봄을 원망하는구나.
그 중과 가마에서 내린 여인이 양겸지에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그 중이 가족의 남녀노소 그리고 양녀, 하인 둘을 모두 불러 인사를 시켰다. 그 중이 가마에서 내린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인은 제 오촌 조카로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 살고 있기에 제가 특별히 데리고 와서 나리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법술을 잘 부릴 줄 아니 나리의 앞길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의 말대로만 하시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을 시켜 짊어지고 온 짐들을 배에다 싣도록 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날이 이미 저물어 그 중 일행은 그냥 배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그 여인과 계집종은 화덕이 있는 선실로 가서 차와 먹을 것을 준비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여인은 뱃사공에게 은자 5전을 팁으로 주었다. 양겸지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아름다운 여인도 얻고 여러 물건도 얻었으니 그 중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렸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어떻게 갚아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 중이 대답하였다.
“이게 다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죠.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술자리가 파하자 그 중과 다른 일행은 다른 선실로 가버리고 양겸지와 그 중의 과부 조카 이씨만 남아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의 사연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다음 날 아침 그 중은 일어나 다른 일행과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양겸지 그리고 이씨와 작별하였다. 그러면서 이씨에게 특별히 당부하였다.
“내가 이미 당부한 것처럼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고 잘난 척하지 말지라. 나리가 좋은 곳으로 영전할 때다시 만나자꾸나.”
그 중은 양겸지와 이씨가 타고 있는 배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발걸음을 돌렸다. 이씨 여인은 미모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온유하고 손재주도 빼어나고 영리하기조차 하였다. 이씨 여인과 양겸지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함이 마치 부부사이나 진배없었다. 열흘하고도 며칠 더 배를 타고 가니 장가강牂牁江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이 장가강은 동쪽으로는 사천의 천강川江과 닿아있고, 서쪽으론 야랑夜郞현 전지滇池에 닿아있으며, 물살이 세고 여러 강줄기가 모였다 갈라지며 여울지는 곳으로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절로 파도가 굽이쳐 배를 타고건너는 것 자체가 위험하였다. 장가강 어귀에 이르니 뱃사공들은 먼저 밥을 두둑이 먹고서야 다시 배를 젓기 시작하였다. 배를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람과 강 물결이 너무 세찬지라 맘대로 멈출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강물 사이사이에는 뾰족한 바위들이 마치 돌기둥처럼 솟아 있어 강물을 따라 항해하다가 그 뾰족한 바위에 잘못하여 부딪히기라도 하면 배는 바로 산산조각이 나버리곤 했다. 뱃사공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막 배를 출발시키려고 하는 그 때 이씨 여인이 황망히 양겸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배를 출발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흘 동안 바람을 비끼었다가 배를 띄우도록 하십시오.”
“지금은 이렇게 바람도 없이 잠잠한데 어찌하여 배를 띄우지 말라는 것이오?”
이씨 여인이 말을 받았다.
“지금은 바람이 없으나 순식간에 불어올 것입니다. 제 말을 들으시고 지금 잠시 배를 포구 안으로 들여 큰바람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양겸지는 이씨 여인의 능력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뱃사공들에게 물었다.
“여기 가까운 곳에 포구가 있는가?”
뱃사공이 아뢰었다.
“저기 앞쪽에 석이포石圯浦라는 곳이 있습니다. 포구의 서북 모퉁이에 라시라는 곳이 있는데 사람도 많고 물산도 풍부하여 배를 대고 쉬기에 딱 알맞습니다.”
양겸지가 그 말을 듣고 대답하였다.
“그럼 어서 배를 거기에 대거라.”
뱃사공들은 일제히 배를 저었다. 배가 석이포에 거의 다다를 무렵 서북쪽에서 큰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흙먼지가 일어나더니 조금 지나서는 나무뿌리를 뽑히고 마침내 퍼렇던 강물이 온통 시커멓게 요동쳤다. 강 물결이 하늘에 닿고 땅을 후벼 파는 듯하고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는 마치 귀곡성과 같은지라 사람이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이 큰 바람이 배를 몇 척이나 잡아먹었는지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미친 듯한 바람과 물결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겨우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이씨 여인은 하녀에게 밥을 차려오게 하여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에도 여전히 바람이 불었다. 오후에 들어야 바람이 자고 시장에서 물건을 싣고 온 배들이 물건을 팔았다. 양겸지가 보니 이씨 여인은 법술을 부릴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천문에도 통달하였는지라. 양겸지는 이씨의 재주에 탄복하여 물건을 팔러 온 배에서 신선한 과일과 토산품을 사서 이씨 여인에게 선물하였다. 한편 후추를 파는 배가 있었으니 그 후추의 맛이 어떠하던고? 시 한 수로 증거하노라:
백옥 쟁반위의 진홍색 후추 이파리 몇 떨기,
밝게 빛나는 황금 삼족정에선 신묘한 기운이 발하네.
오디가 가지 끝에서 익어가는 8월엔,
사람 사는 이 세상의 신비한 영약.
양겸지는 후추 파는 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후추가 운남과 사천의 진미라는 말을 들어보긴 하였으나 직접 맛보지는 못하였구나. 내가 그대에게 한 번 사주고 싶구나.”
뱃사공을 시켜 후추 파는 자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후추 한 병에 얼마요?”
후추 장수가 대답하였다.
“오백 관이외다.”
“그래, 하인 녀석을 마님께 보내서 돈을 받아오게 하여라.”
하인 녀석이 선실 안으로 들어가 이씨 여인에게 후추를 사게 돈을 달라 하니 이씨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한테는 후추를 사지 말라고 말리더라고 전하여라. 저 사람한테 후추를 샀다간 구설에 오르게 될것이다.”
하인 녀석이 이씨 여인의 말을 양겸지에게 전하니 그 말을 들은 양겸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후추 한 병 사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구설에 오르고 말고 한단 말이냐. 마님이 아마도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돈이 아까워 그리 말하는 모양이다.”
양겸지는 자신 갖고 있던 은자를 그 후추 장수에게 주고 후추를 한 병 산 다음 선실 안으로갖고 들어갔다. 병마개를 여니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 색깔은 마치 빨간 마노처럼 예뻤다. 입안에 넣어보니 그 맛은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이씨 여인이 황망히 그 후추 병뚜껑을 막더니 말했다.
“나리, 그 후추를 드시지 마소서. 그 후추를 먹는 순간 바로 구설수에 오를 것입니다. 이 후추는 이 지방에서는 나지 아니하고 베트남에서 납니다. 그 나무는 뽕나무와 비슷하고 그 이파리는 오디와 비슷하며 2,3촌정도이며,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 9월이 지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익기 시작합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그것을 따서 숙성시켜 장을 만들어 먼저 왕실에 바친다 합니다. 지금 그것은 훔쳐 파는 것이니 그 전후 사정이야 빤한 것이지요.”
이 후추는 도당都堂이 현령에게 의뢰하고, 현령이 또 부자를 베트남에 보내어 비싼 값에 사들인 것이다. 도당 역시 그걸 받으면 자기가 감히 어쩌지는 못하고 조정에 특산물로 바치고자하였다. 부자는 천신만고 끝에 가산을 거의 다 들여서 겨우 후추를 구하고 은으로 만든 병에 옮겨 담아 현령에게 보내어 도당에 전달하라고 할 찰나 남만 사람들에게 도둑맞은 것이다. 후추를 도둑맞은 부자의 집안 식구들은 놀라고 당황하였다. 그 부자의 식구들은 마치 살인범이라도 찾는 양 사방을 뒤졌다. 이 때 그 후추를 훔쳐간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자 있어 부자는 관군들을 안내하고 빠른 배 한 척을 몰고서 도합 스물세 명이 칼과 창을 들고서 징소리와 북소리를 내면서 양겸지가 타고 있는 배 코 앞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 병선은 양겸지의 배와 너무도 가까워 화살을 쏘면 닿고도 남을 것 같았다.
양겸지는 이런 상황을 보고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선실 안으로 들어가 이씨 여인에게말하였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겠소?”
“그러기에 제가 나리에게 그 후추를 사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제 말을 듣지 않으셔서 이런 큰일이 생겼습니다. 남만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찌 예법을 따지겠습니까?”
이씨 여인은 이어서 또 이렇게 말했다.
“나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씨 여인은 황급히 하인 하나를 시켜 물 한 대야를 떠서 선실로 가져오게 하였다. 이씨 여인은 주문을 외우면서 그 대야 물위에 손으로 줄을 하나 그었다. 그랬더니 그 배는 마치 물위에 못을 박아 걸어놓은 것처럼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였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은 모두 당황하여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배가 요술에 걸린 게 틀림없으니 어서 도술이 더 센 사람을 불러와서 그 요술을 풀어달라고 하자.”
이 때 이씨 여인이 뱃사공을 보내어 그 지방 사투리로 설명하게 하였다.
“여보시오, 나리들 너무 화내지 좀 마시오! 우리 나리의 배가 바람을 피하고자 여러분들 고을에 며칠 정박하게 되었소이다. 한데 누군가가 후추를 팔러왔지 뭐요. 우리 나리야 후추 파는 사람의 속사정은 모르고 그저 별 뜻 없이 산 거고 아직 손도 대지 않았소이다. 그러니 그 후추를 그대로 돌려드리면 되지 않겠소. 우린 그 후추 값을 돌려받지 않아도 상관없소이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양겸지 일행이 그 후추에 손도대지 않았다고 하는 걸 알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후추를 돌려주기만 하면 그 후추 값은 우리가 보상해주겠노라.”
후추를 찾으러 온 자들을 만나고 온 뱃사공은 양겸지에게 다녀온 이야기를 아뢰고는 후추를 들고 다시 돌아갔다. 후추를 찾으러 온 자들은 양겸지에게 후추 값을 보상해주니 양쪽이 다 부딪칠 일이 없었다. 이씨 여인은 대야위의 물에다 대고 손으로 몇 번 줄을 그으니 후추를 찾으러온 배는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은 후추를 훔친 자를 붙잡아 현청으로 데리고 갔다. 양겸지가 이씨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 덕에 죽을 고비를 넘겼소이다.”
이씨 여인이 대답하였다.
“앞으로도 제 말만 들으신다면 아무런 탈도 없을 것입니다.”
다음 날에는 바람도 멈추었다. 이는 정말로:
파도가 움직이지 아니하니 물고기와 용 역시 조용하고,
나무가 흔들리지 아니하니 까치와 새들이 깃드는구나.
1 사아만謝阿蠻(717-757), 당 현종 때의 뛰어난 무희. 당 현종이 직접 작곡하였다는 <능파무凌波舞>를 특히 잘 추었다고 한다. 아만이 이춤을 출 때면 양귀비가 비파를 연주하고, 이헌李憲이 피리를 불고 이구년李龜年이 필률로 반주를 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