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이융기李隆基 추로鄒魯 지역을 경유하여 공자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탄식하며經鄒魯祭孔子而嘆之

추로鄒魯 지역을 경유하여 공자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탄식하며經鄒魯祭孔子而嘆之/당唐 이융기李隆基

夫子何爲者 공부자는 어떤 분이신가
棲棲一代中 세상을 구하려 방황했지
地猶鄹氏邑 태어난 곳은 창평향 추읍
宅即魯王宮 살던 옛집은 노나라 왕궁
歎鳳嗟身否 봉황 탄식은 신세의 한탄
傷麟怨道窮 기린 상심은 도리의 걱정
今看兩楹奠 두 기둥 사이 제상 보니
當與夢時同 그때 님이 꾼 꿈과 같네

이 시는 당 현종(唐玄宗, 685~762)이 725년에 태산에 봉선(封禪)을 하고 곡부의 공묘(孔廟), 즉 공자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지은 시이다. 이융기(李隆基)는 당 현종의 이름이다. 성현을 대상으로 지은 시라 그런지 시가 엄숙하고 근엄하다. 매 구마다 경전의 고사를 인용하여 말의 근원을 밝히면서 공자의 일생을 구성하였는데 자신의 평가도 아울러 담고 있어 짜임새가 정교하다.

보통 고대에 상대에 대한 존칭으로 자(子)를 성의 뒤에 붙였다. 부자(夫子)는 이보다 더 높여 부르는 존칭인데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칭할 때 이 말을 많이 쓴 것이 파생하여 후세에는 부자라는 보통 명사가 공자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변모하였다.

서서(棲棲)는 《논어》 <헌문(憲問)>에 나오는 말이다.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에 인용된 공영달의 《정의(正義)》에서는 ‘동서남북으로 방황하며 허둥지둥한다.’는 의미로 풀었고, 나중에 주자는 ‘연연하다.’는 의미로 풀었다. 이때는 공영달의 학설이 영향을 미치던 시대이므로, 당 현종은 세상을 걱정해 이를 구제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것에 뜻을 두고 이 첩어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사마천의 《사기》에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이라 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 곡부(曲阜)의 이구산(尼丘山) 근처에 해당한다. 이 이구산에 부자동(夫子洞)이라 하는 공자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굴이 있고 그 옆에 서원이 있다. 내가 예전에 곡부에서 버스로 간 다음, 다시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여기에 가 보니 나의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얕은 야산인 데다 염소 떼가 풀을 뜯고 있었지만 여기저기 바위가 있고 측백나무가 가득한 산은 과연 신령스러웠다.

또 인근 동네를 돌아보니 집집마다 춘련이 많이 붙어 있고 연자방아도 있으며, 내가 길을 묻는 데 잘 알려주어 고맙다며 어떤 집 아이에게 월병을 주니 사양하여 바로 받지 않고, 그집 노인이 며느리에게 급히 물을 떠 와 손님을 대접하라고 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또 길을 가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수박을 사 먹었는데 그 노인이 내가 곡부에서 사 먹은 점심값이 비싼 것을 지적하고 마침 놀러온 친구가 권하는 수박을 사양하던 모습도 남아 있다.

공자는 편모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자신의 실천을 통해 가르치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자를 교육하여 큰 성과를 냈다. 이런 소문이 크게 퍼져 마침내 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는데 당시 노나라 권세를 쥐고 있던 소정묘(少正卯)를 과감하게 공개 처형하여 노나라 정사를 일신하였다. 노나라의 강성을 두려워한 제나라에서 미인 악단을 보내 노나라 정공(定公)이 공자를 소홀히 대하자 공자가 자신의 포부를 펴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공자가 살던 집이 노나라 왕궁’이란 말은 한나라 때 노나라 공왕(恭王)의 고사를 쓴 것이다. 노나라 왕족인 공왕이 왕궁을 넓히려고 공자가 살던 옛집을 허물었는데 여기서 분서갱유를 하여 사라졌던 논어가 나오고 음악 소리가 들려와 마침내 궁궐 확장 공사를 중단하고 공자의 옛집을 크게 개수한 일이 있다. 이때부터 역대로 그 규모를 늘리고 정비하고 하여 지금 곡부에 있는 웅장한 공부(孔府)가 된 것이다. 곡부에는 공자의 후손이 사는 공부 외에도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와 후손들의 묘소가 있는 공림(孔林)이 있는데 이를 합쳐 삼공(三孔)이라 한다. 이것만 해도 하루에 다 보기 쉽지 않다.

순임금 때 봉황이 와서 춤을 추고 문왕 때는 기산(歧山)에서 운 일이 있다. 그런데 공자가 봉황이 오지 않는다고 탄식한 일이 《논어》 <자한(子罕)> 편에 있는데 이 말은 자신이 구현하려고 하는 예악과 제도가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탄식을 의미한다. 신비(身否)는 일신의 운명이 비색(否塞)한 것을 의미한다.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를 기르고 있는데 BC41년에 노나라 사람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은 일이 있었다. 이에 공자는 ‘나의 도가 궁해졌다.[吾道窮矣]]’라고 탄식하고 《춘추》를 지었다. 그러면서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춘추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내용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춘추》를 지었다는 말이 후대에 논란이 되었다. 《춘추》를 이 때부터 지었다는 말인지, 《춘추》를 이때 중단했다는 말인지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지금 통행되는 《춘추》는 보통 공자의 경문이 있고 그 경문 뒤에 좌씨전이 나오며 좌씨전의 사이에 소주가 붙어 있는 책이다. 이런 형태로 편집을 하고 소주를 단 사람이 바로 진나라의 두예(杜預)라는 사람으로 두보의 조상인데 이 사람이 쓴 <춘추좌씨전서>에는 ‘이때 공자가 느낀 점이 있어 《춘추》를 저술하기 시작했고 이 일을 《춘추》의 마지막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춘추를 인경(麟經)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공자가 죽기 직전에 꿈을 꾼 일이 있다. 큰 기둥 두 개 사이에서 전(奠)을 받아먹는 꿈이었다. 전은 제사상을 말하므로 죽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공자가 철인이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자 제자 자공이 모셨으나 병이 나서 7일 만에 돌아갔다. 《예기》 <단궁(檀弓)>에 나오는 내용이다.

차례로 고사를 살펴보면 공자의 포부를 가장 먼저 서술하고, 이어 공자의 출생과 공자에 대한 후세의 대접, 공자의 탄식과 중요 저술, 죽음 등의 사연과 관련하여 매우 거룩하면서도 침울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해설을 보면 지루하게 느낄 정도로 고사의 사용은 시의 내용을 풍부하고 함축성 있게 해 준다. 천하의 제왕으로서 유학의 최고 스승인 공자에 대한 예우와 경모를 이렇게 언어의 선택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시가 가지는 인물에 대한 찬미와 함축, 사회 교화의 기능 등을 잘 보여준다.

曲阜 孔廟

365일 한시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