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색의 커다란 노트를 뒤적일 때마다 한편으로는 페이지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문장을 읽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로한 근면한 학자―구졔강(顾颉刚 선생―를 회상하게 된다. 말하자면 중국 학술계와 역사학계와 저명한 대스승이 일찍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중화민족의 연원․조상․문화 및 철리(哲理)에 대해 얼마나 열렬히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는가에 생각이 미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1965년 겨울의 막바지에서 1966년 초봄까지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병 때문에 베이징의 서쪽 교외에 있는 샹산(香山) 요양원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산림 속을 거닐며 단풍잎을 줍거나 유명한 이의 무덤 가에 서서 조의를 표하곤 했으나 나중에는 차차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가운데 자오푸추(赵朴初) 선생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서 종교 방면의 지식을 청해 들었다. 또한 미술계의 대 스승이며 대화가인 우쭤런(吴作人) 선생도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미술 방면에 관한 지식을 청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분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구졔강 선생으로 나는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청했다.
때로는 산 속의 오솔길을 걸으며 나는 그에게 중화 민족의 유구한 역사에 관해 공손하게 질문했다. 내가 물어본 것은 대부분 아주 보편적이긴 해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제목들이었다. 이를테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중화(中华)라고 부르게 되었는가?’라든가 ‘서강(西羌)이란 무엇이며 동이(东夷)란 무엇인가? 남만(南蛮), 북적(北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화하(华夏)라고 부르는 것인가?’, ‘염제(炎帝)․황제(黄帝)의 자손에 대해’ 등이 그러했다. 노 선생의 흥미 있는 담론은 도도하게 끊이지 않았다. 화제는 모두 작은 제목에서 큰 제목으로, 평범한 상식에서 비교적 전문적이고 깊은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며칠이 지나 아마도 이 노인은 내 지식욕의 불꽃이 갈수록 왕성하게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그의 담론 역시 더욱 더 고조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물리 치료 삼아 하고 있던 산림 산보를 실내의 역사 담론으로 바꾸었다. 매일 오전, 나는 그의 병실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강의하는 사람 하나에 청강생 하나인 셈이었다.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당시로서는 가장 좋은 노트를 한 권 마련해 구 선생의 강좌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고담준론(高谈峻论)을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결국에는 두터운 노트 한 권이 모두 메워졌다. 그 노트의 표지가 청색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파란 노트’라고 불렀다.
한 20 여 일 동안 계속된 담론을 끝낸 뒤, 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그 노트에 기록한 것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펴내는 것도 괜찮을 게야.”
그러나 처음에는 작은 북소리처럼 울리던 것이 갈수록 천지를 울리듯 커지더니 끝내는 대포 소리가 되어버렸다. ‘문화대혁명’은 그와 나를 갈라놓았다. 이 ‘청색 노트’ 역시 조반파(造反派)의 친구들에게 몰수되어 ‘범죄의 증거’ 재료가 되었다. 1966년에서 1972년까지 압류되었다가 결국은 다른 노트와 함께 내게 반환되었다. 나는 이들 노트의 행간에서 다른 사람의 붉은 색 필적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여기가 큰 문제가 있으니 조사할 만하다’고 여겼던 듯하다.
최근 들어 어떤 동지가 내게 “그것 참 정리가 잘 되었군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라고 권하는 바람에, 나는 그것을 한 페이지씩 뒤적여 가며 새롭게 적어 보았다.
구 선생의 강의는 중국의 사서(史书)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이십사사(二十四史)
1966년 1 월 4 일 오전, 구졔강 선생이 중국의 사서(史书)에 관해 이야기했다.
문자로 기록된 중국의 역사는 지금까지 4200여 년으로 산출해 낼 수 있다. 곧 하(夏) 왕조 400년, 상(商) 왕조 600년, 주(周) 왕조 800년이며, 그 이후 누대에 걸쳐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세계 역사상 오래 된 다른 나라들을 꼽아 보면, 고대 이집트가 지금까지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나라이고, 두 번째가 바빌론이며, 세 번째가 중국이고, 네 번째가 인도 및 그리스로서 3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에는 중국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이 상당히 많다. 우선 ‘이십사사(二十四史)’를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정사(正史)로서 국가가 승인한 사서(史书)다.
먼저 ‘이십사사에’는 어떤 사서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말해보자. 첫 번째는 《사기(史记)》요, 두 번째는 《汉书(한서)》로 이것은 실제로는 전한서(前汉书)다. 세 번째는 《후한서(后汉书)》, 곧 동한(东汉)의 사서다. 네 번째는 《삼국지(三国志)》로 진대(晋代) 사람인 천서우(陈寿)가 쓴 것이고 다섯 번째는 《진서(晋书)》로서 당(唐)의 팡쉬안링(房玄龄) 등이 지은 것이다. 여섯 번째는 《송서(宋书)》로 이것은 남조(南朝)의 송(宋)을 말하며, 남량(南梁) 때의 선웨(沈约)가 지었다. 일곱 번째는 《제서(齐书)》로 이것 역시 남조의 제를 말하며, 양(梁)의 샤오쯔셴(萧子显)이 지었다. 여덟 번째는 《양서(梁书)》로 마찬가지로 남조의 양을 말하며, 당조(唐朝)의 야오쓰롄(姚思廉)이 썼다. 아홉 번째는 《진서(陈书)》로 남조의 진을 말하며, 역시 당조의 야오쓰롄이 썼다. 열 번째는 《위서(魏书)》로 북조(北朝)의 위를 말하며, 북제(北齐) 사람인 웨이서우(魏收)가 지었다. 열한 번째는 《북제서(北齐书)》로 북조의 제를 말하며, 당대(唐代) 사람인 리바이야오(李百药)가 지었다. 열두 번째는 《주서(周书)》로 북조의 주(周)를 말하며, 당대의 링후더펀(令狐德棻) 등이 썼다. 열세 번째는 《수서(隋书)》로 당대의 웨이정(魏徵) 등이 썼다. 열네 번째는 《남사(南史)》로 당대의 리옌서우(李延寿)가 썼다. 열다섯 번째는 《북사(北史)》로 역시 당대의 리옌서우가 썼다. 열여섯 번째는 《당서(唐书)》로 오대(五代) 때 후진(后晋) 사람인 류쉬(刘昫) 등이 썼다. 열일곱 번째는 《신당서(新唐书)》로 송대(宋代)의 어우양슈(欧阳修) 등이 썼다. 열여덟 번째는 《오대사(五代史)》로 송대의 쉐쥐정(薛居正)이 지었다. 열아홉 번째는 《신오대사(新五代史)》로 송대의 어우양슈가 지었다. 스무 번째는 《송사(宋史)》로 원대(元代)의 퉈퉈(脱脱) 등이 지었다. 스물 한 번째는 《요사(遼史)》로 역시 원대의 퉈퉈 등이 지었다. 스물 두 번째는 《금사(金史)》로 이것 역시 원대의 퉈퉈 등이 지었다. 스물 세 번째는 《원사(元史)》로 명대의 쑹롄(宋濂) 등이 지었다. 스물 네 번째는 《명사(明史)》로 청대의 장팅위(张廷玉) 등이 지었다.
‘이십사사’는 모두 3249권이다.
‘이십사사’는 관방(官方)의 사서이고, 국가의 공식적인 사서이다. 여기에는 《춘추(春秋)》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신원사(新元史)》 역시 포함되지 않는다. 《신원사》는 명대 사람이 쓴 《원사》가 단지 8개월만에 지나치게 간단하고 건성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청대에 커사오민(柯劭忞)이라는 사람이 원대의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북양군벌(北洋军阀) 쉬스창(徐世昌)은 이 새로운 《원사》를 ‘이십사사’ 안에 집어넣어 ‘이십오사’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이십오사’에도 《청사고(淸史稿)》는 들어가지 않는다. 《청사고》는 본래 미완성이었지만 뒤에 책으로 각인되어 나왔다. ‘이십오사’는 개명서점(开明书店)에서 출판되었다.
‘이십사사’ 중의 《구오대사(旧五代史》는 이미 빠진 부분이 있어 온전하지 않다. 사람들이 어우양슈의 《신오대사》만을 보았기 때문에, 《구오대사》는 거의 없어질 뻔했던 것이다. 청 건륭(乾隆) 연간에 《사고전서(四库全书)》를 펴낼 때 비로소 《구오대사》가 편입되었다.
현재 마오 주석이 중화서국(中华书局)에 명해 새롭게 표점을 찍은 ‘이십사사’가 1970년에 출판되어 나올 예정이다. 이러한 사서는 원래 읽기가 어렵다. 그것은 인명이나 지명․외국인명․소수 민족의 인명 등에 주해를 달아 놓지 않으면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십사사’는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에서 펴낸 백납본(百衲本)이 가장 좋은데, 그것은 현재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최고(最古)의 사서들을 모두 모아 펴냈기 때문이다. 우잉뎬(武英殿)의 ‘이십사사’는 청조 때 펴낸 것으로, 읽기가 제일 힘들다. 뒤에 나온 개명서점의 ‘이십오사’는 특별히 주조한 아연판으로 인쇄한 것이라 글자가 제일 뚜렷하다.
고문(古文) ‘이십사사’는 모두 3249권으로, 전후 19가(家)가 편찬했다.
고문 ‘이십오사(古文二十五史)’는 모두 3506권으로, 전후 20가(家)가 편찬했다.
《사기(史記)》
1966년 1월 4일, 구졔강 선생이 《사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국의 사서는 정사(正史)나 ‘이십사사’의 경우, 각각의 조대(朝代)의 관청이나 조정에서 쓴 것이 많은데, 쓰마쳰만은 황실의 장서와 제사 및 천문(天文)을 맡아보는 태사령(太史令)이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사기》라는 사서를 써냈다. 그것은 무슨 까닭에서였는가? 그와 그의 아버지인 쓰마탄(司马谈)은 모두 당시 황제의 장서를 대량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좀처럼 얻기 힘든 조건이었다. 이를테면 《좌전(左传)》과 같은 사서는 그 당시 황실에서만 보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쓰마쳰의 아버지 쓰마탄은 한대(汉代) 초기의 사람이다. 그는 초한지제(楚汉之际)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며 초와 한의 전쟁 및 당시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묻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쓰마탄의 공로다. 하지만 쓰마탄은 종교인이기도 해서, 태사령이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제사 지낼 때 제단을 설치한다든지 제문 읽는 일을 겸임해 미신적인 일을 행하기도 했다. 어느 해 한 무제(汉武帝)가 타이산(泰山)에서 봉선(封禅)을 올릴 때 쓰마탄을 동반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울화병으로 죽었다. 그때 그는 통사를 쓰고자 하는 생전에 못 다한 염원을 아들에게 남겼다.
쓰마쳰은 산시성(陕西省) 한청(韩城) 사람이다. 그는 20세가 되던 해부터 사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해, 쟝쑤성(江苏省)․저쟝성(浙江省)․후난성(湖南省)․쟝시성(江西省)․산둥성(山东省) 등 각지를 유람했다. 그러면서 직접 보고 들은 일들이 많았던 까닭에 그의 사상은 아버지와 사뭇 달랐다. 그는 민간인들의 생활에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목도했다. 또한 그는 미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태사령이 된 뒤에는 자기가 맡은 일들을 적당히 해치울 따름이었다. 쓰마쳰이 평생 동안 이룬 업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법(历法)을 수정한 것이다.
그는 당시 통행되던 옛 역법이 달을 보고 만든 것이므로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갑골문 가운데에는 14월과 15월이 기재된 것도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옛날에 사용하던 역법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생활 주체인 농업이 태양에 따라 춘․하․추․동이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秦)나라 때에는 ‘전욱력(颛顼历)’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역법에 의하면 매달 초에는 달을 볼 수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달이 시작돼도 달을 볼 수가 없었다. 또 이 역법에서 정한 매달 중순, 곧 ‘보름’에는 하늘의 달이 둥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지러져 있었다. 이렇듯 진대의 역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한대, 곧 쓰마쳰의 시대에 이르러 그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을 떠맡고자 했다. 그는 노력을 기울여 음양합력(阴阳合历)으로 고쳤는데, 곧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하력(夏历)’이다. ‘하력’은 한대에 쓰마쳰이 바로잡은 뒤 지금까지도 큰 변동 없이 쓰이고 있다. 그때 그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으나, 태양과 대지의 관계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은 적지 않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1년을 365일과 열두 달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쓰마쳰은 과학자이기도 한 것이다.
쓰마쳰은 《사기》를 지을 때 《세본(世本)》을 골간으로 삼았으며 기타 사료들도 대량으로 집어넣었다. 《세본》에서는 이미 각 왕조의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있었다. 그는 아버지 쓰마탄이 쓴 《사기》의 초고를 유고로 물려받은 뒤 자신이 보고들은 수많은 사실(史实)들을 재료로 해 써넣고자 했다. 그는 10년의 시간을 들여 《사기》를 완성했다. 이 사서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한 무제 때의 사실(史实)이다. 《사기》의 가치는 특히 쓰마탄이 쓴 초와 한이 서로 쟁패하던 시기의 사적과 쓰마쳰이 쓴 한 무제 때의 사적에 있다.
이들 부자가 역사를 쓰던 시기에는 조금도 꺼릴 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사기》의 「봉선서(封禅书)〉에는 쓰마쳰이 한 무제의 미신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 또 이 책의 「평준서(平準书)」 속에는 한 무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한 돈이 없어 어떤 식으로 상인들을 착취했는가에 대한 사실도 묘사되어 있다. 그 뒤로는 역사 기록자들이 사서를 쓸 때 당시의 일들을 감히 직언하지 못했다. 《사기》에는 「혹리열전(酷吏列传)」이 있는데, 여기에는 무제 때의 혹리(酷吏)들이 하나하나 묘사되어 있다.
《사기》는 문장이 훌륭해서 문학적인 가치도 높은 데다, 사실(史实)도 잘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걸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모두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본기(本纪)」는 제왕이 세습된 상황과 각각의 조대의 제왕의 사적 가운데 큰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모두 12편이다.
2) 표(表)는 각각의 조대의 제왕의 세습 표 및 각 제후의 표가 있고 왕, 곧 황제의 아들들의 표와 후(侯), 곧 황제의 손자들의 군현(郡县) 표, 그리고 천하를 얻는 데 공이 컸던 공신들의 표도 들어 있으며 모두 10편이다. 3) 서(书)는 제도만을 논한 것으로 모두 8편이다. 이것은 고대 정치 제도사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다. 그 이전의 기록들은 모두 산만했다. 그 8편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예(禮)」와 「악(乐)」, 「율(律)」과 「역(曆)」이 있다. 그 중에서 「율」의 내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병법(兵法)을 논한 것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논한 것이라는 설이다. 이 네 편은 모두 실전되었고 현재 전해 오는 것은 후대 사람이 보완한 것인데, 보완해 쓴 사람 역시 한대 사람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다음으로 「천관서(天官书)」와 「봉선서(封禅书)」, 「하거서(河渠书)」와 「평준서(平準书)」가 있다. 그 중에서 「천관서」는 온전히 천상의 관직을 기술한 것으로 별 하나 하나마다 인간 세상의 관명(官名)으로 이름을 달아 놓았으며, 「하거서」에서는 수리(水利)를 논하고 있다.
4) 세가(世家)는 본기와 마찬가지로 각 제후와 왕들에게 매년 발생하는 큰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편년체의 기사(记事)다.
5) 열전(列传)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기록해 놓았다. 각 편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테면 「순리열전(循吏列传)」에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한 관리가 기록되어 있고, 「자객열전(刺客列传)」에는 자객을 업으로 삼고 있던 인물들이 기술되어 있다. 이 밖에도 「유림열전(儒林列传)」․「혹리열전(酷吏列传)」․「유협열전(游侠列传)」이 있다. 「구책열전(龟策列传)」에는 점을 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있고, 「편작창공열전(扁鹊仓公列传)」에는 대의사(大医师)들의 기사가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화식열전(货殖列传)」으로 쓰마쳰이 직접 보고 들은 각 지역의 경제 및 산물에 대한 상황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사이열전(四夷列传)」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는데, 여기에는 「흉노열전(匈奴列传)」 「동월열전(东越列传)」 「남월열전(南越列传)」 「서남이열전(西南夷列传)」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 「서남이열전」은 구이저우(贵州) 지역을, 「대완열전(大宛列传)」은 신쟝(新疆)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한대에는 신쟝을 대완국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의 말은 키가 크고 덩치가 컸다.
상술한 열전들이 있음으로써 중국의 고대사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열전 속의 기록은 모두가 쓰마쳰이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이다.
쓰마쳰은 골방 샌님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사서를 썼기 때문에 그가 쓴 《사기》가 불후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는 중국 역사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사기》 이전, 곧 쓰마쳰 이전의 사서들, 말하자면 《춘추(春秋)》, 《좌전(左传)》 등은 모두 산만하고 계통 없이 씌어진 것들이다.
애석한 것은 쓰마쳰이 10년 밖에 저술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리링(李陵)의 일로 감옥살이를 하고 궁형(宫刑)을 당했다. 그 이후에는 다시 한 무제의 중서령(中书令)이 되어 궁중에서 문서를 관리하느라고 바빴기 때문에 책을 저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는 미완의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밀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조잡한 부분도 있다. 쓰마쳰은 40 여 세에 죽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도 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기》는 통사(通史)로서 오제(五帝)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전후 3000년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한서(汉书)》 이후의 사서는 모두 단대사(断代史)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