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요적주는 수치를 면하려다 도리어 수치를 야기하고
정월아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잘못을 저지르다
姚滴珠避羞惹羞 鄭月娥將錯就錯 1
먼저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자고로 사람의 마음이란 서로 같지 않은 것. 그 얼굴이 같다 하여도, 생김새가 똑같다 할지라도 필경 그 마음만은 바뀌기 어렵네.
사람이 태어남에 그 생김새만은 모두 다른 것이다. 각자의 부모로부터 태어나 천차만별이거늘 그 모양이 한결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부모의 형제면서 쌍둥이이고 그 생김새가 매우 닮았다 하더라도 결국 자세히 보면 조금은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각자 길이 다르고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어 진짜를 가장하기도 한다. 옛날 정서(正書)1에서 말하기를 공자의 모습이 양호(陽虎)와 비슷하여 광(匡) 지역 사람들에게 감금되었다고 하는데2,이는 악인이 성인을 닮은 경우이다. 또 전기(傳奇)에서 말하기를 주견(周堅)이 조삭(趙朔)을 대신해 죽음으로써 큰 화를 면하게 했다고 한다.3 이는 천인(賤人)이 귀인을 닮은 경우인데,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서호지여(西湖志餘)》에 따르면 송(宋)나라 때에도 생김새가 비슷하여 일시의 부귀를 사취하여 십여 년 동안 마음껏 누리다가 나중에 들통 난 일이 있었다. 북송(北宋) 정강(靖康) 연간에 금(金)나라 사람들이 변량(汴梁)을 포위하여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포로가 되면서 한동안 후비(后妃)와 공주들이 납치되는 일이 많았다. 그 중에 유복(柔福)이란 이름을 가진 공주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흠종의 딸이었고 그녀 또한 이 당시에 납치되었다. 후에 고종(高宗)이 남하하여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바꾸었다. 건염 4년에 한 여인이 입궐하여 유복 공주라 자칭하고 오랑캐로부터 스스로 도망쳐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고종은 속으로 이렇게 의심했다.
‘상황(上皇)과 함께 갔던 수많은 신하들도 일찍이 도망쳐 올 수 없었거늘, 아녀자의 전족한 작은 발로 어찌 탈출해 돌아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 당시 궁녀들로 하여금 확인해보게 하니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맞사옵니다.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또 그 여인에게 궁중의 옛 일을 물었더니 모두 옳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인은 옛날에 일하던 몇몇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말해 내는 것이었다. 다만 사람들은 그녀의 두 발이 이상하게도 큰 것을 보고는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공주님의 발이 얼마나 작았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이만 하니 이것만큼은 다릅니다.”
이런 사실을 황제께 아뢰니, 고종이 친히 와서 보고 그것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힐문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발이 이렇게 되었더냐?”
여인은 그 말을 듣고는 울기 시작하였다.
“그 노린내 나는 오랑캐 놈들이 사람을 마치 마소처럼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틈을 타 탈출하여 만 리 길을 맨발로 뛰어 여기까지 왔사옵니다. 그러니 어찌 지금까지 옛날처럼 고운 발을 간직할 수 있겠사옵니까?”
고종은 그 말을 듣고 무척 마음이 아파 조서를 내려 특별히 복국장공주(福國長公主)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고세계(高世綮)에게 시집을 보내 그를 부마(駙馬)로 삼았다. 이때 한림학사 왕룡계(汪龍溪)가 황제의 명령을 초안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팽성(彭城)이 바야흐로 위기에 처하여 노원(魯元)이 곤란을 당하였고, 강좌(江左)가 중흥하자 익수(益壽)가 금련(禁臠)4을 취할 수 있었다.
노원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공주로, 팽성에서 실종되었다가 후에 되돌아온 일이 있다. 익수는 진(晉)나라의 부마였던 사혼(謝混)의 아명(兒名)으로, 강남 지역이 중흥하자 원제(元帝)의 공주가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과 비교해 보면 딱 들어맞는 것이다. 이로부터 두 부부는 영화롭고 부귀하게 되었고, 하사받은 물건은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이 때 고종은 오랑캐 땅에 있는 어머니 위현비(韋賢妃)를 위해 해마다 막대한 보화를 써서 되돌려 보내줄 것을 요구하면서, 멀리서나마 현인태후(賢仁太后)로 존대하였다. 이후 화의가 성립되고 태후는 마침내 소흥(紹興) 12년에 오랑캐 땅으로부터 귀환하게 되었다. 돌아와 보니 ‘유복 공주님께서 만나러 오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태후는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유복은 오랑캐 땅에서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고 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어떻게 또 다른 유복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냐? 누가 거짓 행세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고는 분부를 내렸다.
“법사(法司)를 시켜 엄형으로 진상을 규명하도록 해라!”
법사는 분부를 받들어 피고를 끌어와서 고문을 가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고통을 참지 못해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소인은 본래 변량(汴梁)의 무당이옵니다. 정강(靖康)의 난 때 한 궁중의 하녀가 민간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소인을 보고는 유복 공주로 오인하여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소인이 놀라 그 여인에게 물으니, 소인이 정말로 공주님의 모습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소인은 딴 마음이 생겨 매일 궁중의 지난 일을 물었고, 그 여인도 상세히 이야기를 해주어서 속으로 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크게 먹고 이름을 사칭하여 요 얼마 동안 탐욕스럽게 부귀를 누리면서 영원히 탄로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태후께서 돌아오셔서 소인은 이제 복은 다하고 화가 닥치게 되었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사옵니다.”
죄명이 정해지자 고종은 조서를 보고는
“임금을 속이는 요사한 계집 같으니!”
하며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를 저자 거리로 끌고 가 처형시켰다. 가산은 몰수하여 국고에 귀납케 했는데, 그동안 하사받은 돈이 모두 47만 관(貫)에 달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십여 년간 충분히 누린 셈이었다. 단지 얼굴 생김이 비슷하여 한동안 일가친지조차 알아내지 못했으니, 만약 태후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결국 그 여인에게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고 그 누가 더 이상 의심이나 했겠는가? 태후가 돌아오기 전에 죽었다면 그 여인에게는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리에 용납될 수 없다면 자연히 폭로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제 용모가 서로 비슷하여 일어난 간교하고도 괴상한 소송을 또 하나 이야기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얘기다.
자고로 오직 형제간에 닮는 것만이 가능하다 전하거늘, 서로 다른 곳에 교묘히 안배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똑같이 생긴 적주의 얼굴 보시라. 다만 마음만은 같지 않구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면, 명대(明代) 만력(萬曆) 연간에 휘주부(徽州府) 휴녕현(休寧縣) 손전향(蓀田鄕)의 요씨(姚氏)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적주(滴珠)였다. 나이 갓 열여섯에 꽃처럼 아리따워 그 고을에서 으뜸가는 미인이었다. 양친이 다 살아있고 집안도 넉넉했는데, 집에서 그녀를 너무 애지중지한 탓에 응석받이로 자랐다. 매파를 통해 혼담이 성사되어 둔계(屯溪)의 반갑(潘甲)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매파의 말인지라, 만약 가난하다는 것을 말할라치면 석숭(石崇)5이라 하더라도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땅이 없고, 부자라는 것을 말하면 범단(范丹)6조차도 엄청난 재산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재산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정해지고, 생김새는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식이니 한 마디도 제대로 된 말이 없다는 것이다.
반씨의 가문은 세족이었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밖으로는 남자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고, 안으로는 여자가 몸소 집안일을 해야 했으므로 공밥을 먹으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 반갑이란 사람은 비록 인물도 어느 정도 괜찮았지만 이미 공부는 포기하고 장삿길로 들어섰고, 게다가 그 부모는 매우 악독해서 걸핏하면 욕을 해대는데 완전히 막무가내였다. 요적주의 부모는 매파가 ‘그쪽은 아주 좋은 집안이에요’라고 하는 말을 곧이듣고 제 몸처럼 아끼던 딸을 시집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젊은 부부는 그래도 서로 사랑하며 지냈는데, 단지 안 좋은 꼴을 많이 보게 되어 속이 많이 상해 늘상 남몰래 눈물을 감춰야 했다. 반갑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좋은 말로 그녀를 달래가며 살아갔다. 그런데 결혼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반갑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역정을 냈다.
“너희 부부가 그렇게 사랑 놀음이나 하면서 허송세월해서야 되겠느냐? 어째 장사하러 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느냐?”
반갑은 하는 수 없이 이런 사실을 적주에게 말해 주었고, 두 사람은 그칠 줄 모르고 울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이튿날 반갑의 아버지는 아들을 다그쳐 길을 떠나게 하였다. 요적주는 홀로 남아 있으려니 더욱 슬프고 두려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응석받이로 자란 딸이고 갓 들어온 며느리이다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제대로 하는 구석도 없어 종일 걱정만 하며 지냈다. 시부모는 며느리의 그런 모습을 보면 언제나 소리를 질러대며 욕을 했다.
“야 이년아! 무슨 애인이라도 생각하냐? 아주 상사병에 걸렸구만.”
요적주는 나서부터 늘 부모 곁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랐으니 이런 말을 들어보기나 했겠나. 그러나 감히 말대꾸는 하지 못하고 그저 화를 참으며 몰래 소리 없이 한 바탕 울고 말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요적주가 좀 늦게 일어나 시부모 조반 차려드리는 일이 다급해졌는데, 갑자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반갑의 아버지는 욕을 해댔다.
“이런 처먹기만 좋아하고 게을러터진 못된 년!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다가 이제사 일어나가지고 제멋대로 하는 이 꼬락서니 좀 봐. 문가에 기대서 아양 떨며 오입쟁이나 꼬시는 창녀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제 맘대로 할 수가 있겠어? 남의 아내가 되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돼!”
요적주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귀한 집 딸인데 조금 잘못을 했기로 이처럼 저를 모욕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는 한바탕 크게 울었지만 아무데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밤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고 생각할수록 화가나 이렇게 말했다.
“늙다리 무지렁이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이건 도를 넘었어. 도저히 참을 수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알려야겠다. 그래서 그 작자에게 그 말이 해야 될 말인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분명하게 따져 봐야지. 그리고 그걸 빌미로 해서 친정에서 얼마간 더 편히 머무르면 화딱지 날 일도 많이 줄겠지.”
계획이 서자 동틀 무렵 머리도 안 빗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수건으로 머리를 싸 묶고는 단숨에 나루터까지 달려갔다.
이야기꾼이 만약 그 당시 태어나고 나이도 많아 그녀가 이렇게 떠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서 허리를 부둥켜안고 가슴을 치며 끌고 돌아갔더라면 이후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는 날이 일러서 이미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인적이 드물어 나루터는 고요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오로지 나쁜 짓만 하는 무뢰한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왕석(汪錫)이고 별명은 ‘눈 속의 구더기’인데, 춥고 배고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요적주에게 후회할 일이 생기려니까 그가 혼자 강에서 뗏목을 타고 나루터로 오고 있는 것을 마주친 것이다. 그자는 꽃 같은 젊은 부인이 홀로 강기슭에 서있는데 머리는 빗지도 않은 채 싸매고 얼굴은 온통 눈물 자욱인 것을 보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뗏목 위에서 이렇게 물었다.
“낭자께선 강을 건너려고 하시오?”
“예 그러려고 해요.”
“그러시다면 제 뗏목을 타시지요.”
왕석은 이렇게 말하고 조심하라고 하며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해 뗏목에 태우고는 삿대를 저어나갔다. 한적한 곳에 이르자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낭자는 어떤 분이시죠? 혼자서 어딜 가려는 거요?”
“저는 손전에 있는 친정에 가려고 해요. 그쪽은 그저 저를 나루터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길을 아는데 다른 건 물어서 뭘 하려고요?”
“내가 보기에 낭자는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눈물이 글썽글썽해 가지고 혼자서 가시니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 말해줘야 강을 건너게 해드리죠.”
왕석이 이렇게 말하자 요적주는 강 한가운데 있는 데다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하는 수 없이 남편이 집에 없는 동안 수모를 당했던 일들을 울면서 모두 말해 주었다. 왕석은 듣고 나서 잠시 속으로 생각하고는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건너게 해줄 수 없지. 당신은 나쁜 생각을 품고 있으니 당신을 건너게 해주면 당신은 도망가거나 자살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납치될 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중에 조사를 통해 내가 당신을 건너게 해주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나는 당신 때문에 공연히 송사를 치르게 될 것 아뇨?”
“무슨 소리예요! 나는 그저 친정에 가는 건데 무슨 도망을 간다는 거예요? 만약 내가 죽으려 한다면 왜 물에 뛰어들지 않고 강을 건너고 나서 자살을 하겠어요? 또 나는 친정 가는 길을 잘 알아서 누가 날 납치해갈 걱정도 없다고요.”
“그래도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정말로 친정에 가려고 한다면 우리 집이 아주 가까우니 당신은 잠시 우리 집에 가서 있다가 내가 가서 당신 집에다 말을 해서 사람을 시켜 당신을 데려가게 한다면 양쪽이 다 안심할 수 있잖소?”
“그러는 것도 괜찮겠네요.”
요적주가 대답했다. 여자이다 보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데다 당시로선 어쩔 수 없어 그에게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요적주는 그저 선의에서 그러는 것이라고만 알고 그를 따라갔다. 강기슭에 올라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어느 집에 이르러 몇 겹의 문을 거쳐 집 안으로 들어가니 방안은 매우 고요하고 청아했다. 그 집의 모습은 이러했다.
밝은 창과 정갈한 서안(書案), 비단 휘장과 수놓은 방석. 뜰 앞엔 몇 종의 화분, 방안엔 소박한 의자 몇 개. 벽 위엔 주지면(周之冕)7의 그림, 탁자 위엔 시대빈(時大彬)8의 오지 주전자. 달팽이집처럼 작아 부귀한 왕후(王侯)의 저택은 아닐지라도 한가롭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흔한 여염집과는 다르네.
원래 이곳은 왕석의 거점으로, 갖은 방법으로 양가의 부녀를 이리 데리고 와서 친척이라고 해서는 한량이나 호색한들을 꾀어들여 사통하게 하였다. 잠시 즐기는 사람이든 완전히 빠지게 되는 사람이든 바깥채를 만들어 머물게 하면서 그들의 돈을 무수히 뜯어냈다. 만약 그 부녀자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일 경우 인신매매상이 큰돈을 주겠다고 하면 창기로 팔아버렸는데, 그런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요적주의 거동을 보고는 엉큼한 마음이 동해 그녀를 속여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요적주는 양가의 규수라 마음속으로 그저 한가로운 분위기가 좋을 뿐이었다. 시부모의 악독함 때문에 날마다 불 때고 밥 짓고, 요리하고 물 긷는 일은 말할 나위도 없고, 기름이나 소금, 간장, 식초 같은 것들도 헷갈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깨끗하고 멋진 곳을 보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고 속으로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왕석은 그녀에게 당황해 하는 기색은 없고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흥분을 느껴 앞으로 다가가 두 무릎을 꿇고 구애를 했다. 그러자 적주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는 양가집 규수예요. 당신이 처음에 내가 여기 머물고 있으면 우리 집에 알려준다고 해놓고는, 벌건 대낮에 어째서 사람을 자기 집에 유괴해다가 사기를 치려고 해? 만약 나를 괴롭힌다면 난 지금 정말로 죽어버리겠어.”
말을 마치고 탁자 위에 등잔불 붙이는 쇠꼬챙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집어다가 목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자 왕석은 당황하여 이렇게 말했다.
“진정하고 다시 얘기해봅시다. 제가 감히 그러지 않겠습니다.”
원래 왕석은 그저 사람을 유괴해다가 재물을 가로채기만 하는 재물욕이 많은 사람이지 여색은 그다지 밝히지 않았는데, 정말로 사건이 터지면 장사도 못해 먹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놀라게 되자 조금 전 끓어올랐던 음욕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뒤쪽으로 가서 한참 있더니 한 할멈을 불러내서 이렇게 말했다.
“왕할멈 여기서 낭자를 모시고 좀 앉아 계슈. 나는 낭자 집에 가서 알려주고 곧 올 테니.”
요적주는 그를 불러 집의 위치와 부모의 이름을 자세히 말해주고는 이렇게 당부했다.
“제발 그분들에게 빨리 좀 오시라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왕석이 떠나자 그 할멈은 세숫물을 떠오고 머리 빗는 도구들을 가져와서 적주에게 씻고 머리를 빗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낭자는 뉘 댁 분이신데 어떻게 여길 오셨수?”
요적주는 자초지종을 죄다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 할멈은 일부러 발을 동동 구르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죽일 놈이 있나! 사람 볼 줄도 모르고. 이렇게 고운 낭자를 며느리로 삼아서 고생시키는 걸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되려 욕을 퍼부어!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하고 어떻게 하루라도 같이 지낼 수 있겠어?”
요적주는 심사를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자 할멈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려고 하슈?”
“지금 친정으로 가서 부모님께 알려드리고 나서 일단 집에서 얼마간 피해 있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다시 생각해야지요.”
“남편이 언제 돌아오는데?”
할멈이 묻자 요적주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욕을 먹고 억지로 길을 떠났는데, 언제 돌아올 지 알 수가 있겠어요? 아무 기약도 없어요.”
“세상에나! 꽃 같은 낭자를 독수공방하게 해놓고는 또 욕까지 하다니. 낭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슈. 낭자가 지금 친정에 가서 얼마간 있을 수는 있지만, 틀림없이 다시 시댁으로 돌아가야지 친정에서 평생 숨어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잖우? 그러면 또 그렇게 짜증나고 걱정되는 나날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텐데, 그래서야 되겠어요?”
“팔자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이 늙은이의 소견대로만 한다면 낭자를 평생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해줄 텐데.”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요?”
“내가 드나드는 집들이 모두 부잣집에 문벌세족들이라 점잖고 준수하게 생긴 젊은 자제 분들이 많아요. 낭자가 직접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저 마음에 딱 드는 사람 하나만 고르세요. 내가 그 사람에게 말해서 성사되면, 그는 낭자를 금덩이처럼 대하면서 엄청 아껴 줄 거유.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고 입는 것도 마음대로 입으면서 손 하나 까딱 안하고 하인들을 부리게 된다면, 이 꽃 같은 미모로 억울하게 독수공방에 거친 일 하면서 공연히 화만 삭히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요적주는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인 데다 아직 젊은 나이라 바람기가 있었고, 또 시댁의 나쁜 점들이 머릿속에 가득한 상황에서 왕할멈의 이런 말을 듣자 마음이 동했다.
“안돼요! 누가 알면 어쩌라고요?”
“이곳은 외갓 사람은 감히 들어오지도 못한다우. 귀신도 모르는 아주 비밀스런 곳이거든. 낭자가 한 이틀만 있어보면 천국도 부럽지 않을 거유.”
“하지만 좀 전에 그 뗏목 태워줬던 사람이 이미 집에 알리러 갔는걸요?”
“그 애는 내 수양아들인데, 그렇게 뭘 모르고 그런 안 좋은 소식을 전하러 갔네 그랴.”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한 사람이 밖에서 뛰어 들어와 왕할멈을 덥석 붙잡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알 한다! 벌건 대낮에 사람을 속여 서방질을 시키려고? 내 고발하러 가겠어.”
적주가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다름 아닌 바로 뗏목을 젓던 그 왕석이었다. 요적주가 그를 보고
“우리 집엔 가서 알렸나요?”
하고 묻자 왕석은
“알리긴 뭘 알려! 내가 한참 듣고 있었는데, 왕할멈의 말인즉슨 낭자가 남은 반평생 동안 잘 살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니까 마음대로 해.”
요적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곤경에 빠진 내가 술책에 걸려들었으니 어쩔 수가 없게 됐군요. 그래도 내 신세만은 망치지 마세요.”
그러자 할멈은 이렇게 말했다.
“방금 말했듯이 낭자가 직접 고르는 거고 양쪽이 모두 원해야 하는 건데, 어떻게 낭자한테 해가 돼?”
요적주는 당장 별다른 생각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감언이설을 들은 데다, 방도 좋고 침상과 휘장 등도 깔끔하여 흡사 ‘대나무 정원을 지나다 우연히 스님의 말을 듣게 되니, 덧없는 인생에 잠시나마 한가로움을 얻는구나’ 하는 격이었기에, 안심하고 몰래 머물게 되었다. 왕할멈과 왕석 두 사람은 정성스럽게 번갈아가며 시중을 들었는데, 뭐든지 원하는 대로 재깍 대령하며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1 정서(正書):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말.
2 《사기(史記)》 <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하다가 광(匡) 땅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에게 감금을 당했던 일이 전해진다. 노(魯)나라 양호(陽虎)의 폭정을 당한 바 있던 그 지역 사람들이 외모가 닮은 공자를 양호로 오인해 벌어진 일이다.
3 여기서 ‘전기(傳奇)’는 명대(明代)에 간행된 희곡 총집 ‘육십종곡(六十種曲)’ 중 《팔의기(八義記)》 제21착(齣) <주견체사(周堅替死)>를 가리킨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삭(趙朔)의 문객(門客) 주견이 조삭이 간신 도안가(屠岸賈)의 모함으로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용모가 조삭과 비슷한 것을 이용해 옷을 바꿔 입고 조삭으로 가장하여 목을 베어 자결함으로써 조삭이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4 금련(禁臠): 진원제(晉元帝)는 건강(建康) 지역에서 처음 나라를 세울 때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다. 그리하여 돼지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진기한 음식으로 여겼는데, 목살은 특히 맛이 있어 즉시 황제에게 바쳤으므로 아랫사람들은 감히 먹지 못하여 당시에는 ‘금련’이라고 불렀다. 후에는 ‘독점’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진무제(晉武帝)가 진릉공주(晉陵公主)를 사혼과 결혼시키려고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황제가 세상을 뜨자 원산송(袁山松)이 또 딸을 사혼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이에 왕순(王洵)은 “경(卿)은 금련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진서(晉書)》 <사혼전(謝混傳) >에도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이 고사를 가리킨다.
5 석숭(石崇): 서진(西晉) 때의 부호로 매우 사치스런 생활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6 범단(范丹): 매우 빈한한 삶을 살았던 동한(東漢) 때의 고사(高士).
7 주지면(周之冕) : 명대의 화가로 화조(花鳥)를 잘 그렸다.
8 시대빈(時大彬) : 명대의 유명한 도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