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탕아
수 양제는 죽기 전, 세 가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는 먼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느냐?”
쿠데타를 일으킨 쪽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 양제가 입을 다물게 했다. 하지만 양제는 여전히 이해 안 가는 점이 있었다.
“확실히 나는 백성들을 볼 낯이 없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나를 핍박하느냐?”
이 질문에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양제는 또 물었다.
“오늘의 일은 누가 앞장을 섰느냐?”
사마덕극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천하에 원성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는데 당신을 죽이려는 자가 어디 한둘이겠소!”21
이 사람이 한 말은 사실이었을까?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수 양제의 통치 후기에 발생한 반정부 무장세력이 사료에서 확인 가능한 것만 헤아려도 2백 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귀족 출신의 이밀李密도 있고 농민 출신의 두건덕도 있었다. 당나라의 명신 위징 등이 편찬한 당서·식화지食貨志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도적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자가 천하 백성의 8, 9할에 이르렀다고 한다.22
위징이 언급한 수치는 당연히 과장이겠지만 그 절반만 되더라도 대단히 공포스럽다. 따라서 죽기 전의 양제는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의 죽음을 온 천하가 다 경축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반대로 그를 반대하던 이들까지 포함해 온 천하가 다 입을 모아 애도했고 우문화급의 무리는 지탄과 배척을 받았다. 그들은 먼저 이밀에게 필사적인 공격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두건덕에 의해 일거에 섬멸을 당했다. 이밀은 비록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끝까지 후회하지 않았으며 두건덕은 더 분명한 태도로 수 양제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23
이것은 곱씹어볼 만한 일이다.
물론 그 안의 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예를 들어 이연은 거짓으로 애도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밀과 두건덕은 정치적 도의를 위해 기치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진나라 말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진나라 이세 황제가 죽은 뒤, 유방과 항우가 그를 위해 슬퍼하고 진승과 오광이 그의 원수를 갚아주었던가? 그러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확실히 천하는 진나라 때는 오래 고통을 겪었지만 수나라 때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 문제 때는 진시황 때보다는 살기 좋았다. 예를 들어 수 문제 양견은 건국 초에 명을 내려, 성인 남자들에게 3년간 조세와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이런 면세 정책은 진나라 때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다.24
수나라는 결코 진나라가 아니었다.
문제 본인도 포악하거나 어리석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하고 근면한 나이든 농민과 더 흡사했다. 매일 조정에서 정무를 봐도 지칠 줄 몰랐고 평상시 밥을 먹을 때 고기반찬은 하나뿐이었으며 옷도 해지면 기워입었다. 그는 백성의 고통에 관심이 많았고 관리의 부패를 미워했다. 심지어 일부러 덫을 놓으면서까지 관리들을 단속했는데, 예를 들어 측근을 보내 거짓으로 관리에게 뇌물을 주게 했다. 덫에 걸린 자는 당연히 죽음을 면치 못했다.25
하지만 공신과 오랜 친구에 대해서는 결코 인색하지 않아서 상을 줘야 하면 꼭 상을 주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방비해야 하면 꼭 방비했다. 가장 어이없었던 일은 민간에서는 10미터 이상의 배를 못 갖게 규정한 것이었다. 적을 은닉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26
보아하니 그는 무슨 보살 같은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 문제는 이런 사람이었다. 진시황처럼 열심히 정무를 보고 양 무제처럼 근검절약했으며 한 고조처럼 통이 크고 진 효공처럼 형법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래서 분열된 국토를 신속히 회복하고 번영으로 이끌어 수나라를 역사상 가장 부유한 왕조로 만들었다. 수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역사상 가장 짧았다.27
이런 왕조가 망하는 것은 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여론이 일제히 수 양제에게 창끝을 겨누고 그를 한창 흥성하던 왕조의 탕아로 간주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그 ‘재벌 이세’의 성격과 스타일은 창업자이자 자린고비였던 부친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큰 성과와 큰 업적을 추구하여 뭔가 있어 보이는 대규모 사업을 좋아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똑똑하고 정력적이면서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일에 시동을 걸면 누구도 멈추지 못했다.
그 첫 번째 일은 낙양 건설이었다.
인수仁壽 4년(604) 11일 3일, 막 부친상을 치른 수 양제는 친히 낙양에 가서 지형을 조사했다. 망산邙山에 올라가 멀리 이궐(伊闕.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 남쪽의 룽먼산龍門山)을 보았을 때, 그는 산봉우리 두 개가 마주해 있고 그 가운데로 물줄기가 길게 흐르는 것을 보고서 흥분해 말했다.
“저것은 용문龍門이 아닌가? 왜 저기에 도읍을 지은 사람이 없는 게지?”
재상 소위蘇威가 말했다.
“바로 폐하를 위해 남겨진 겁니다.”28
수 양제는 매우 기뻐했다. 이듬해(대업 원년) 3월 17일, 그는 양소楊素, 양달楊達과 우문개宇文愷 등에게 책임지고 새 도읍을 건설하라고 명했다. 양소는 수 양제가 정권을 탈취할 때 옆에서 그를 도왔고 우문개는 수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겸 설계사였다. 그리고 양달은 측천무후의 외조부였다. 그는 낙양을 건설할 때 태원에서 온 목재상 무사확武士彟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냈다.
역사에도 역시 인연이 존재한다.
나흘 뒤(3월 21일), 수 양제는 또 조서를 내려, 황하와 회하淮河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를 파서 낙양과 강도를 잇는 운하를 개통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동시에(3월 30일) 운하에서 쓸 제국의 함대를 건조하라고 명하기도 했다. 함대의 규모는 크고 작은 배의 숫자만 무려 5천 척이 넘었다. 그중 양제가 타게 될 용주龍舟의 건조는 오늘날 항공모함의 건조와 맞먹었다.29
그래서 그 프로젝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동도(東都. 낙양), 운하, 함대, 이 3가지 대규모 사업을 동시에 추진할 만한 사람은 역시 수 양제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그 거대한 프로젝트는 의외로 짧은 기간에 신속하게 완성되었다. 5개월 뒤, 함대가 완공됐고 낙양에서 강도까지의 물길도 전 구간 개통되었다. 모든 것이 자기 계획대로 되어 의기양양해진 그는, 그해 8월 15일에 제1차 남방 순행을 떠났다.
곧이어 이듬해 1월 6일에는 동도 낙양이 준공되었다. 앞뒤로 걸린 시간이 겨우 10달이었으니 역시 불가사의한 속도였다. 그래서 이미 강도에서 반년을 머무른 수 양제는 다시 함대를 거느리고 호호탕탕 낙양으로 가서 4월 31일, 으리으리하게 입성식을 거행했다.
제국의 조정과 백성은 모두 수 양제의 업적을 칭송했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과거에는 없었던 대사업이었다. 단지 그 위대한 업적의 배후에 일반 백성의 희생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화근의 씨앗이 뿌려졌다.
하지만 수 양제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제국의 국고가 넘쳐나고 황제의 권력이 쓰기에 편하다는 것만 알았다. 이 세상에는 그가 생각 못하는 일만 있을 뿐, 할 수 없는 일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만 하면 이뤄졌다.
그래서 그는 또 북방 순행에 나섰다.
대업 3년 4월 18일에 출발해 9월 23일 낙양으로 돌아오기까지 거의 반년 가까이 오늘날의 산시성陝西省, 내몽골, 산시성山西省, 허난성을 돌았는데 그 위풍과 기세가 남방 순행 못지않게 성대했다.30
천재 발명가 우문개는 이 순행을 위해 접이식 천인대장千人大帳과 관풍행전觀風行殿이란 것을 설계, 제작했다. 전자는 거대한 천막인데 대규모 연회를 열 수 있었고 후자는 이동식 궁전으로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행전은 언제든 해체하고 설치할 수 있으며 밑에 바퀴만 달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했다.
수행하는 군신들은 행성行城 안에 묵었는데 그것은 당연히 바퀴 달린 거대한 방이었다. 행전의 외곽이 행성이고 행성의 외곽은 철제 의자였다. 그것은 제국의 수도를 초원 위에 옮기고 길을 따라 운반하는 것과 같았다. 돌궐의 유목민들은 그 신기한 물건을 보고 앞 다퉈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31
그 일로 수 양제는 더 기가 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대업 6년 1월 15일에는 또 장안과 낙양, 두 곳에서 성대한 정월 대보름 연회를 열었다. 낙양의 연회 장소는 둘레 길이가 5천 걸음이었고 참가자는 관현악단만 1만 8천 명이었다. 거리와 골목마다 초롱이 달리고 오색천이 걸렸으며 춤과 노래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투자를 유치한다면서 양제는 그때 외국인에게는 일절 식사비를 못 받게 하고 그것이 중국의 관례라고 선전했다.
그런데 어느 이민족 상인이 물었다.
“당신들 중국인도 사정이 꽤 어려워 보이는데 왜 무료 식당을 운영하고 또 비단을 나무에 걸어놓은 겁니까?”
질문을 받은 중국 상인은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수 양제는 그래도 괘념치 않고 계속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남방 순행과 북방 순행 외에 고구려 원정도 감행했다. 그 결과, 첫 번째 고구려 원정을 했을 때는 산동의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고 두 번째 고구려 원정을 했을 때는 양소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세 번째 고구려 원정과 세 번째 돌궐 순방을 했을 때는 전국이 다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세 번째로 강도에 내려간 것은 순방을 간 것이 아니라 도망을 친 것이었다.
남은 문제는 그 좋은 목을 누가 베느냐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