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에 살면서溪居/당唐 유종원柳宗元
久爲簪組累 오랫동안 관직에 묶여 있었는데
幸此南夷謫 이 남쪽으로 좌천 와 다행이네
閑依農圃鄰 한가하게 이웃 농가에 의지하고
偶似山林客 우연히 은자의 흉내를 내 보네
曉耕翻露草 새벽엔 이슬 묻은 풀을 갈아엎고
夜榜響溪石 밤엔 계곡 바위에 노를 부딪치네
來往不逢人 오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 없으니
長歌楚天碧 남쪽하늘 아래 노래를 불러 보네
이 시는 유종원(柳宗元,773~819)이 810년 영주(永州)로 좌천되어 지내고 있을 때 영릉(零陵)을 유람하다가 발견한 염씨(冉氏)가 살던 아름다운 곳을 사서 우계(愚溪)로 이름을 고치고 살 때 지은 시이다. 유종원은 이 우계의 동남쪽에 집을 마련하고 집 앞에 채마전을 가꾸는 한편 부근에 밭을 조금 경작하였다.
유종원은 805년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어 815년에 장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10년을 보냈다. 돌아가신 청람(靑嵐) 김도련(金都鍊) 선생님은 유종원의 산수기를 좋아하였는데 유종원의 문장 중에 저명한 것은 대개 바로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유종원이 쓴 영주팔기(永州八記)와 <우계시서(愚溪詩序)>에 그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잠조(簪組)는 관모를 쓸 때 꽂는 비녀와 장식으로 다는 끈을 말하니 잠영(簪纓)과 같다. 이 말로 관인의 복식을 대유하고 있으므로 관직이라는 뜻이 나온다. 남이(南夷)는 남쪽 이적이라는 뜻으로 유종원이 좌천된 영주가 장사(長沙)와 광동(廣東) 사이에 있는 남쪽 오령(五嶺)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 3구의 말을 4, 5구가 그대로 받는 구조이다. 좌천되어 지내면서 약간의 농사와 채소를 가꾸는데 이를 이웃 농부들 하는 것 보고 따라 하거나 도움을 받고 있다. 새벽에 쟁기로 이슬이 흠씬 묻은 풀을 갈아엎어 곡식에 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이웃 농부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낮에는 쉬다가 날이 다소 선선해지는 시간에는 산림에 사는 은자처럼 주변을 유람해 본다. 그러다 보니 저물어서야 돌아오느라 배를 젓는 노가 계곡의 바위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 소리가 아무도 없는 계곡을 울린다.
우사산림객(偶似山林客)에서 ‘사(似)’는 본래 ‘같다’는 형용사이지만, 여기서는 앞의 ‘의(依)’ 자와 대구가 되어 동사로 전성되어 쓰이고 있다. ‘같아졌다’라거나 ‘닮아가네’, ‘흉내내본다’는 의미가 된다. 이곳 영주(永州)로 좌천될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 곳에 와 보니 산수가 좋아 나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 은자 흉내를 내고 있다는 말이다. 야방향계석(夜榜響溪石)의 방(榜)자 역시 본래 ‘노’나 ‘배’의 의미지만 여기서는 앞의 ‘경(耕)’ 자와 대구가 되어 동사로 전성되어 ‘배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시의 대구는 어휘의 전성을 가능하게 하여 다양한 표현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구절은 오가는 길에 좋아하는 시나 글을 크게 외면서 가는 즐거움을 표현하였다. 이는 처음 2구에서 관직 생활은 자신을 얽매고 옥죄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좌천을 와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말과 잘 조응된다. 우리나라의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은 이 시의 3, 4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 두 구 10자를 차례로 운자로 사용해 10편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난과 좌절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유종원은 좌천을 이렇게 자신의 산수유람 취미로 승화하고 있다.
가끔 보면 무슨 글쓰기 강연이나 관련 책을 접하게 되는데 대개 글을 쓰는 기교와 관련되어 있다. 글쓰기의 본질은 기교나 형식이 아니다. 재능도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정당한 삶을, 혼탁한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순수한 삶을 지향하는 의지가 글쓰기의 제일 기초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기초도 없이 무슨 글쓰기를 논하는가? 한유나 유종원이 큰 고문가가 된 것은 이런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365일 한시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