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정사에 놀러가서遊開元精舍/당唐 위응물韋應物
夏衣始輕體 여름 옷 입어 몸 가벼운데
遊步愛僧居 사찰이 좋아 거닐어 보네
果園新雨後 과수원에는 금방 비 그쳤고
香臺照日初 향탁에는 아침 해가 비치네
綠陰生晝靜 녹음 져서 한낮 고요 감돌고
孤花表春餘 드문 꽃은 봄의 끝을 알리네
符竹方爲累 현재 자사로 재직하고 있어
形跡一來疏 여기 한 번 찾아오지 못했네
이 시는 위응물(韋應物, 737~792)이 소주 자사로 재임하던 790년에 지은 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에 보이는 개원정사는 바로 개원사(開元寺)인데, 종래 섬서의 봉상(鳳翔)에 있던 개원사로 알려졌으나 2000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위응물시집계년교전(韋應物詩集繫年校箋)》에서 당시 소주에 있던 개원사로 고증하였다.
이 시에 보이는 부죽(符竹)이란 지방 장관들이 군대를 동원할 때 신표로 차던 병부(兵符)를 말한다. 이 병부는 지방 장관의 상징인 도끼와 함께 흔히 부절(符節)로 불린다. 병부는 금속, 옥, 나무 등을 재료로 만드는데 반쪽을 쪼개 휴대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절반은 군사를 동원하는 최고 책임자인 황제나 임금이 가지고 있다가 유사시에 지방에 내려 보내면 지방 장관이 가지고 있던 것과 합쳐 보고 그 진위를 확인한 뒤에 군대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부죽방위루(符竹方爲累)’, 즉 ‘부죽이 현재 누가 된다’는 말은 바로 ‘자사의 신분에 제약을 받아’라는 말로, ‘자사로서의 공무가 바빠’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형적일래소(形跡一來疏)’, 즉 ‘형적이 한 번 오기 성기었다.’는 말은 ‘이 곳으로 한 번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형적이라 표현한 것은 반대로 마음, 즉 심적(心跡)은 여러 번 왔을 것을 상상하게 한다. 결국 이 두 구절은 ‘소주 자사로서 공무에 바빠 이 곳 개원사에 한 번 오지 못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구절을 쉽게 뒤집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개원사에 이제 드디어 와 보니 참 좋다.’는 뜻이 된다. 이 구절만 보아도 봉상에 있던 개원사가 아닌 것이 명백하다. 즉 위응물이 자사로 근무하던 치소(治所)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가장 정채를 띠는 곳은 ‘녹음생주정(綠陰生晝靜)’과 ‘고화표춘여(孤花表春餘)’가 될 것이다. 녹음을 드리운 곳은 초여름 한가한 낮의 적막감이 감돌고 한 두 송이 겨우 남은 꽃은 이제 완전히 저물어 가는 봄의 여운을 드러낸다. 대구도 좋고 봄과 초여름의 교차를 드러낸 것도 절묘하다. 농암 김창협(金昌協)은 이 구절 10자를 각각 운자로 삼아 시 10수를 지었는데 이 중 둘 째 시만 제외하고 모두 《농암집(聾巖集)》에 전한다.
기온이 올라가 여름옷을 입고 마음 가는 대로 걸어보기에 좋은 절집으로 간다. 과실수들이 심어져 있는 밭에는 금방 비가 그쳐 싱그럽기 그지없고 불상을 모신 사원의 향불을 피우는 탁자에는 아침 햇살이 비쳐들고 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사찰 여기저기를 돌며 돌아보는 시인의 즐거운 마음이 엿보이는데 이런 연장선에서 위의 멋진 대구가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곳을 그동안 자사 직임에 얽매여 한 번 와 보지 못했구나.이 시에 표현된 글자들은 매우 운치가 있어 번역으로 옮기기 참으로 어렵다. 위응물이 매우 운치 있는 시를 쓰는 시인임을 절로 알게 된다.
이 연재를 시작하던 때가 북풍한설 몰아치던 한겨울인데 그간 수 없이 많은 꽃과 봄의 새싹을 노래하는 시를 지나 다시 또 쉼 없이 시간은 흘러 이제 초여름의 녹음을 예찬하는 시로 접어들고 있다. 1년이 3개월씩 딱딱 나누어지는 아니라 4~5개월의 각 계절이 1달 남짓 교차하면서 마치 태극의 음양처럼 계절이 교차하여 변해가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초여름은 고적을 찾아 거닐어 보기에 참으로 좋은 계절인 듯하다.
365일 한시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