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17일, 구졔강 선생이 ‘중국’과 ‘중화민족’의 연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샹산(香山)은 비록 한겨울이었지만, 아침해가 산에서 막 떠올라 수풀 속의 엷은 안개를 비추는 겨울 아침의 산경(山景)에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찬바람도 없고 공기도 맑아서 마치 소나무 숲의 은은한 향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산기슭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구 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나는 선생님께 천천히 걸어가 또 역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중국’이라고 부르며, ‘중화민족’이라 부르는가, 또 왜 ‘염황자손(炎黄子孙)’․‘황제자손(黄帝子孙)’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침 식사 후, 이제까지의 관례와 약속대로 그의 병실로 갔다. 구 선생은 계속 이 화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실내에서 하는 말을 나는 한 마디씩 써내려갔다. 아침에 산길을 산보할 때 이야기한 것들은 기억에 의존하여 추기(追记)했다.
먼저 ‘중국’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국(国)’자의 옛 뜻은 성(城), 즉 방형의 성이다. 성의 주변은 사각형이고 중앙에는 왕이 있다. 고대의 성의 의미는 왕의 도성, 경도(京都)다. 성 밖에는 들과 영역, 토지 그리고 백성들이 있었다.
고대 ‘중국’의 영토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대(夏代)에는 단지 허난(河南) 서부, 산시(山西) 남부만 있었다. 그 뒤로 점차 허난․허베이․산시(陕西)․산시(山西)․산둥 등의 황허 중하류 유역이 속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원(中塬)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중국 이외의 사방을 동이(东夷)․서강(西羌)․남만(南蛮)․북적(北狄)이라 했다. 사방은 모두 ‘만이(蛮夷)’의 땅이고, 자신들은 그 가운데 산다고 해서 ‘중국’이라 부른 것이다.
4000~5000년 전 선사 시대의 중국은 원시사회에 속했다. 씨족․부락․연맹에 이어 국가가 생겨났다. 하(夏)는 아마도 중국 최초의 ‘국가’일 것이다.
황허 중하류 일대는 토질이 좋고 강우량도 알맞은 데다 기후도 좋아 농․목축업에 적합했다. 그러므로 옛날의 씨족 부락은 서쪽으로부터 황허를 따라 동부로 진출했고 산시(山西)․허난(河南)․허베이(河北)․산둥(山东) 지구에 이르렀다. 각 씨족․부락․연맹 사이의 전쟁, 겸병(兼倂), 그리고 정치․문화․습속․언어의 융합을 거쳐 씨족․부락․연맹․소국은 점차 훨씬 큰 국가가 되어 갔다. 옛 중국은 아주 작은 지역에 소수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중국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커졌다. 처음에 중국은 단지 허난과 산시의 지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서주 때에 이르러 북으로는 옌산(燕山), 남으로는 화이허(淮河), 서쪽으로는 룽산(陇山),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러 그 영토가 상당히 넓어졌다.
춘추와 전국시기에 이르러 각 소 민족․소 국가 사이의 전쟁과 합병은 더욱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때 연(燕)은 지금의 허베이성 북부의 각 소 민족․소 국가를 모두 겸병(兼倂)했다. 연은 북과 동북으로 힘을 뻗쳐 발전했으며, 후에는 산융족(山戎族)을 멸망시키고 동호(东胡)를 패배시켜 동부․남부로 확장하여 랴오둥(遼东)․조선과 인접하게 되었다.
진(晋)은 지금의 산시 일대에 위치하여 당시의 적적(赤狄)․백적(白狄)․장적(长狄) 등의 소 민족․소 국가를 합병했다.
조(赵)는 진(晋)의 기초 위에서 중산국(中山国)을 멸망시키고 임호(林胡)를 패배시킴으로써 영토를 지금의 내몽골(内蒙古)에까지 넓혔다.
진(秦)은 의거(义渠)․기융(冀戎)․규융(邽戎)의 산시(陕西)와 서북 지방에 있던 소수 민족과 소국을 멸망시키고 파(巴)와 촉(蜀)을 병합하면서 서쪽으로 확장했다.
초(楚)․오(吴)․월(越)은 창쟝(长江)에서 화이수이(淮水)에 이르는 영역과 창쟝에서 한수이(汉水)에 이르는 영역의 소 민족과 소 국가, 즉 ‘형만(荆蛮)’ ‘늠군만(廪君蛮)’ 등의 만족과 만국을 하나씩 항복시키고 합병했다. 초는 전국 시대에는 매우 커서 둥팅호(洞庭湖) 유역에 그치지 않고 후베이․후난․안후이, 그리고 ‘창우(苍梧)’지대, 즉 광둥(广东)과 광시(广西)를 포함하고 있었다.
제(齐)도 오늘날의 산둥에 있는 각 소 민족과 소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그 영역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진(秦)이 제․초․연․월․한(韩)․위를 하나 하나씩 합병하여 통일을 이루었다. 진의 국토는 매우 넓었다. 이 시기에 진은 북으로는 흉노(匈奴)를, 남으로는 남월(南越)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몽골 대사막, 남으로는 대해, 서로는 간쑤․쓰촨․윈난에까지, 그리고 동으로는 대해에 이르렀다. 진은 통치하기 편하게 광대한 영토 곳곳에 관부(官府)를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은 통일국이 되었고 이 영역 안에 있던 각 민족은 끊임없이 교류를 하여 언어․문자․풍속이 갈수록 비슷해졌다.
앞에서 말한 각 민족․국가의 점진적인 병합 과정은 진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았고 한대에도 계속 진행되었다.
한(汉)은 우쑨(乌孙)․러우란(樓兰) 등과 같은 신쟝, 서북 지역의 36개국을 그 영역에 병합시켰다. 지금의 쓰촨․티벳 일부 지역의 바이랑(白狼)․판무(槃木)․탕촨(唐菆) 등 백여 개의 소 민족․소국뿐만 아니라 둥후(东胡)․웨즈(月氏) 모두가 한에 병합되었다.
삼국(三国)시대 때에는 오가 당시 이저우(夷州)라 불리던 타이완에까지 이르렀다. 서진(西晋) 때에는 또 지금 동북 지역의 오환인(乌桓人)과 선비인(鲜卑人)들을 병합했고 이어서 흉노, 갈(羯)․저(氐)․강(羌)․고거(高車) 등의 종족과 영역을 병합했다.
수대(隋代)에는 양진(兩晋) 때의 각 지구와 민족을 관할했다. 타이완에는 병사를 파견했고, 지금의 몽골과 신쟝의 동돌궐(东突厥)․서돌궐, 지금의 칭하이(靑海)에 있던 토곡혼(吐谷浑), 그리고 동북의 말갈(靺鞨) 등을 겸병하여 대일통(大一统)의 대국으로 나아갔다.
당대에는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의 대당(大唐)은 동으로는 대해(大海), 북으로는 바이칼 호 이북, 서로는 중앙아시아 함해(咸海)와 남으로는 월남과 이웃했다. 이토록 광대한 영토에 다시 수많은 소 민족이 새로 포함된 것이었다.
원대에는 다시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명대를 거치고 청에 이르러서 중국의 판도가 진일보하게 고정되었다. 청의 통치자 자신이 만주족이었으므로 먼저 동북 전 지구의 각각의 소 민족과 몽골의 적지 않은 지역을 통일하고자 했다.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북방의 각 지역, 중원의 각 지역, 황허 유역의 각 성(省), 창쟝 유역의 각 성을 차지하고 타이완과 티벳도 점령하여 강대한 청을 건설했다. 중국은 조대를 거듭하면서 그 영역이 작은 것으로부터 부단히 커져왔던 것이다.
이제 ‘중화민족’을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서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중화민족’은 옛부터 많은 소 민족들이 서로 가까이 다가가 융합한 정체(整体)임을 알 수 있다. ‘중화’는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크고 작은 많은 민족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중화민족’은 가장 오랜 시대로부터 근고(近古)를 거쳐 당대(当代)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영역 안에서 공동으로 생활을 영위해 온 각 민족의 총칭이다.
그러면 ‘중화’라는 말의 원류는 무엇인가? ‘중화’는 처음에는 ‘화(华)’족 혹은 ‘하(夏)’족이라 불렸다. 고대 서적에 기록된 고대의 전설에 따르면, 상고(上古) 시기의 사람들은 수초를 따라다니며 거주했다. 즉 세 개의 큰 씨족부락이 황허의 중․하류 유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나는 ‘염제(炎帝)’를 우두머리로 하여 서쪽으로부터 온 씨족 부락이고, 둘째는 ‘치우(蚩尤)’를 우두머리로 하여 동쪽에서 온 이인(夷人) 씨족 부락이며, 셋째는 ‘황제(黄帝)’를 영수로 하여 서북쪽에서 온 씨족 부락이다.
염제의 대부락은 산시(陕西)로부터 황허를 따라 동으로 이동하여 허난․산둥에 이르렀다. 전하는 말로는, 염제의 성은 강(姜)이며, 신농씨(神农氏)라고 한다.
황제(黄帝) 대부락은 산시(陕西) 북부로부터 황허를 건너 산시(山西)에 이르렀고 다시 타이항산(太行山)을 따라 황허 주변의 각 지역으로 나아가 허베이와 줘루(涿鹿) 지구에 이르렀다. 전하는 말로 황제는 성이 희(姬)이고, 호는 헌원씨(轩辕氏)라 한다.
치우(蚩尤)는 이인(夷人)으로 후에는 ‘구려족(九黎族)’이라고 칭했다 한다. 그는 이 대 부락의 우두머리로서 원래는 산둥 및 동부 지역에 거주했는데,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처음에는 서에서 동으로 이동해 오던 염제 대부락과 충돌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수년의 전쟁 끝에 염제는 패했고, 그 염제 부락의 무리들은 허베이로 물러가 황제 대부락과 연합했다. 황제와 염제는 함께 치우와 전쟁을 일으켰고, 치우는 이 전쟁에서 패하여 일부의 부락민과 함께 남방의 형초(荆楚)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로부터 구려인(九黎人)은 남방의 묘족(苗族)․만족(蛮族)과 함께 거주하면서 생활해 나갔다.
북방의 황제와 염제의 두 부락은 또 수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허베이 지역에서 세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른 결과 염제가 패했고, 이 두 부락은 결합해서 황허 유역을 공동으로 개발하여 찬란한 고대 문화를 창조했다.
춘추 시대에는 황허 양쪽의 사람들이 자칭 ‘제하(诸夏)’또는 ‘화하(华夏)’라고 했다. 때로는 한 글자로 ‘화’또는 ‘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화하’는 한족의 선조다. 한족은 자신들의 선조를 ‘황제 자손’또는 ‘염황 자손’, ‘염황세주(炎黄世冑)’라고 말했다. ‘화’ 또는 ‘중화’란 바로 이 고대 전설이 변하여 생긴 명칭이다.
중화민족은 다시 북방․중원 지역에서 남천(南迁)했던 구려족과 묘족 그리고 만족과 결합했다. 또 동부로 향하여 연안 지역의 이인(夷人)들과 결합했다. 서쪽으로는 서방의 강족(羌族) 등과, 북으로는 북방의 적적(赤狄) 및 기타 종족과 합했다. 각 조대와 각 시기를 거치면서 각 민족은 연합해서 융화했고 가까워졌다. 나중에는 현재의 다민족의 정체(整体)를 이루어 그것을 ‘중화민족’이라고 총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수천 년을 거치면서 변화,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인류는 파미르고원에서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여기에서 나뉘어져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유럽으로 간 사람들은 또 아리안인과 앵글로색슨인으로 나뉘었다. 아리안인은 프랑스인, 벨기에인, 독일인 등으로서 그 중의 한 일파는 인도로 들어갔다.
세계 인류 가운데 중화민족의 인구가 가장 많고 가장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또 고대 중국과 중화민족의 사적(史的)인 역정은 아래와 같이 나열할 수 있다.
하(夏)는 고대 중국의 서부에 거주했던 강인(羌人)으로 산시(陕西)에서 허난․산시(山西)로 왔다.
상(商)은 고대 중국의 동방, 즉 지금의 산둥 동부와 허난 동부에 거주했다.
주(周)는 원래 강인(羌人)으로서 산시(陕西)에서 지금의 허난․산시(山西)․산둥․후베이․허베이로 이주했다.
진(秦)은 원래 조이인(鸟夷人)으로 산둥에서 간쑤로, 또 지금의 산시(陕西)로 왔고 후에는 6국(한․위․초․연․조․제)을 통일하여 중국 본토를 획득했다.
한(汉)은 원래 동방의, 쟝쑤 북부의 페이현(沛县)에서 일어나 산난(陕南)의 한중(汉中)에 봉해졌다. 뒤에는 진의 영토를 획득했고 다시 동쪽으로는 조선과 이웃했으며 서쪽으로는 지금의 신쟝에 이르렀다. 한은 진에 비해 방대했다.
삼국(三国)은 한의 영토가 위․오․촉으로 나뉘어진 것을 말한다. 이때 서역은 포함되지 않는다. 서역에는 다수의 작은 독립국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진(晋)은 삼국을 통일했다.
남북조(南北朝)에는 오호(五胡)가 들어왔다. 말하자면 북방은 오호, 남방은 한인이었다. 이 시기에 북방인들이 남하했으며, 남하한 사람들은 북방인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남하한 사람들은 한의 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방의 인구에는 변화가 매우 컸다. 다시 말하면 오호인들이 대거 북방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대월지(大月氏)인들은 원래 간쑤에 거주했는데 뒤에는 중앙아시아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에는 ‘하’의 유족(遗族)으로 생각되는 대하인(大夏人)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대하인과 대월지인이 병합하게 되었다. 간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소월지인이라고 부른다. 또 서하인은 후대의 티벳인이다.
이때 북방인들이 대이동을 했으므로 서로 섞이고 교류하며 합해졌다.
중국 인구는 옛부터 서에서 동으로 왔다. 이는 하천이 동쪽을 향해 흘렀기 때문이며, 그 후에야 비로소 조금씩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옛 사람들은 먼저 황허 유역에 도착했으며 그 뒤 황허 유역의 북방인들이 남으로 이동하여 창쟝 유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래 창쟝 유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또 광둥(广东)․광시(广西)․구이저우(贵州)․윈난(云南) 일대의 남쪽으로 옮겨갔다. 광둥과 광시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동남아시아로 갔다. 중국 인구의 이동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것으로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남북조 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송대에 있었다.
우리가 얘기하려던 중국 고대 사회, 고 중국, 고 중화는 이렇게 간단히 매듭을 짓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