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써주다 두 수代贈二首 중 첫째/ [唐] 이상은李商隱
누각 위에서 황혼 무렵
바라보려다 그만 둠은
옥 계단 끊어진데다
고리 같은 달 때문
파초는 잎 못 펴고
라일락은 꽃잎 맺혀
함께 봄바람 향해서
각자 수심에 젖네
樓上黃昏欲望休, 玉梯橫絕月如鉤. 芭蕉不展丁香結, 同向春風各自愁.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현제명, 「그 집 앞」) 사랑은 보고 싶은 마음이다. 포근한 봄날 저녁 파초는 새 순을 뽑아 올리고 라일락은 진한 향기를 발산한다. 임 그리는 마음 참을 수 없어서 ‘그 집 앞’을 서성이지만 오히려 임의 눈에 띌까 부끄러워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보고 싶어 하면서도 회피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의 밀당은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생한다.
황혼이 물드는 누각 위에 올라 임의 모습을 바라보려는 마음도 ‘그 집 앞’을 서성이는 마음과 같다. 하지만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끊어져 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아니라 갈고리 같은 초승달이 떠 있다. 보름달은 흔히 ‘원만(圓滿)’을 상징한다.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 대보름에는 헤어진 가족이나 연인이 만나 둥근 보름달 같은 사랑을 이룬다. 초승달은 이와 다르다. 겨우 빛을 되찾은 달은 아직 가늘고 날카롭고 연약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둥글고 환한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나날을 기다려야 한다.
‘파초’와 ‘라일락’도 애타는 마음과 수심을 상징한다. 중국 시문에서 ‘파초(芭蕉)’의 초(蕉)는 ‘초(焦)’와 발음이 통하여 ‘초조’, ‘애탐’을 비유한다. 특히 파초의 새순이 돋아 펼쳐지지 못한 모양을 ‘파초부전(芭蕉不展)’이라 한다. 이는 애타는 마음이 풀리지 않는 모습이다. 라일락도 이와 유사한 비유로 쓰인다. 라일락을 중국어로는 ‘정향(丁香)’이라 하고 시문에서 흔히 ‘정향결(丁香結)’이란 어휘로 쓰인다. 라일락의 자잘한 꽃을 보면 꽃송이가 이리저리 뒤섞여 엉긴 모습이다. 이 때문에 마음의 시름이나 수심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를 ‘정향결’이라 한다.
한쪽에서는 파초가 애타는 마음을 풀지 못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라일락’이 수심을 펴지 못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봄바람 훈훈한 저녁 라일락 향기는 더욱 짙어지고 청춘남녀의 춘정은 더욱 더 무르익어 간다.
한시, 계절의 노래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