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짇날上巳/당唐 최호崔顥
巳日帝城春 도성의 봄 삼월 삼일
傾都祓禊晨 온 황도 불제하는 날
停車須傍水 수레는 물가에 멈추고
奏樂要驚塵 풍악은 먼지도 놀라네
弱柳障行騎 약한 버들은 기마행렬 병풍
浮橋擁看人 강의 부교엔 둘러싼 구경꾼
猶言日尚早 아직도 날이 이른가 봐
更向九龍津 다시 구룡진으로 향하네
때는 8세기 당나라 현종 시절, 3월 3일 삼짇날 국경일을 맞아 온 황도가 동쪽 물가로 목욕하러 가기 위해 들썩이는 가운데 황제 형렬은 거리로 나선다. 풍악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황제의 수레는 물가에 멈춘다. 행렬 좌우에는 가녀린 버드나무가 병풍처럼 늘어섰고 강에 놓은 부교 주변에도 구경꾼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곳을 구경하던 시인은 구룡진에서 불제하는 풍경은 어떨까 하고 또 그리고 가보려 한다.
지난 일요일 4월 7일은 삼짇날이었다. 본래는 3월 첫 사일(巳日)이 드는 날로 했으나 위진 시대 이후로는 3월 3일로 고정했고 우리나라도 이날은 명절로 인식하여 야외로 나가 화전을 해 먹고 사당에 천신하기도 했다. 우리 시골에서도 운치 있는 화전은 몰라도 쑥을 뜯어 떡을 해 먹은 기억은 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선비 사회에서는 특히 이날을 수계일(修禊日)이라 하여 반드시 주석을 열어 시를 짓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동진 시대 왕희지가 <난정기>라는 것을 썼기 때문이다. 이 <난정기>는 중국 서법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글도 명문이라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 소동파의 <적벽부>와 함께 만고에 빛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유숙(劉淑)의 <수계도>가 전해 온다. 1853년(철종4) 서울 장안의 행세하는 여항 문인 30명이 모조리 남산 묵계(墨溪)에 집결하여 성대한 수계 모임을 열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문을 모아 놓은 두루마리이다. 두루마리 곳곳에 글을 쓴 사람의 인장을 찍어 놓아 더욱 빛이 난다. 여기 적힌 글을 필자가 모두 번역하여 《미술자료》에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이 모두 수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조정의 내로라하는 대신들은 또 묵계산장(墨溪山莊)에 따로 모여 주연을 연 것이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요일 날 페북을 보면 고성 산불의 여파에도 많은 분들이 봄꽃의 향연을 즐기고 있음을 목도하게 되는데 삼짇날 풍습을 따라 특별한 음식을 먹거나 글을 쓴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우리나라의 삼짇날 풍속은 이제 역사 속으로 거의 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달리 생각해 보면 답청은 몰라도 목욕을 하기엔 아직 약간 이른 감이 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의 기온 차이에 연유하는 것 같다. 중국 사람이 3월 3일에 하던 목욕을 우리는 5월 5일 단오 때 하니 오히려 융통성이 있다 할 수 있다.
최호(崔顥, 704~754)는 개봉 사람으로 <황학루(黃鶴樓)>를 쓴 시인이다. 어릴 때는 여성들을 소재로 한 고운 시를 즐겨 썼는데 나중에 국경 지방을 가 보고는 시풍이 늠름하게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어정전당시록(御定全唐詩錄)》에 보니 최호에 대한 악평을 해 놓았다. 개원 11년(723)에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재주는 있었지만 행실이 엉망이었다. 노름과 술을 좋아해 장안에 와서 놀았는데 예쁜 여자를 아내로 선택한 다음에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내쫓았다. 이런 식으로 한 것이 4번이었다 한다. 국가 차원에서 편찬한 책에 작가 행적을 함부로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일화를 보니 최호라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논어》에는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봄에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한 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삼월 삼짇날 하는 목욕 풍습을 말한 것이다. 겨우내 찌든 때를 물가에서 씻어버리고 액운도 떨쳐 버리는 풍속이다. 이 풍속은 이미 주나라 때부터 있어 사람들이 물가에서 목욕하면 여자 무당이 액운을 떨치는 굿을 하곤 하였다. 이런 풍속이 당나라시기에 오면 일종의 국경일처럼 된다.
지금 이 시에서 황제도 불제(祓除), 즉 수계(修禊)를 몸소 하느라 행렬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실제 당시 써 놓은 문인들의 상사(上巳)관련 시를 보면 황명을 받아 쓴 시들이 많다. 즉 국가적인 행사인 것이다. 이날 황제가 불제 행사를 한 곳은 패상(灞上)이라고 하는 장안 동쪽 근교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시인이 <상사불제응제(已祓禊應制)>에서 언급해 놓았기 때문이다. 구룡진(九龍津)은 구룡지(九龍池)라는 곳으로 보이는데, 지금 화청지에 있는 구룡호(九龍湖)가 아닌지 의심 된다. 어쨌든 불제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서 하니 장안 동쪽 방향에 있는 물일 것이다. 신(晨)은 신(辰)으로 ‘날’이란 의미이다.
최호가 이 시를 쓸 때만 해도 지금에 와서 삼짇날을 아는 사람이 거의 사라질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고금의 풍속 변화가 이와 같다. 지금 우리의 풍속도 후대에 누가 알겠는가? 다만 문헌이 있으면 관심 있는 자는 알 것이다. 최호의 이 시는 중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데 어떻게 이런 궁벽한 시를 뽑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다만 3월 3일 시를 99회에 소개하니 특별하긴 하다. 나도 푸닥거리 좀 하고 정신 좀 차려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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