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國路易十四王宮全景 《圖畫日報》 제2호 1면
《도화일보》 제2호에 실린 ‘세계의 경물’ 두 번째 화면은 ‘프랑스 루이14세의 왕궁 전경(全景)’입니다. 루이 14세(1638~1715)의 왕궁이라면 파리의 서남쪽으로 위치한 베르사이유의 궁전을 말합니다. ‘태양왕’으로 불린 그는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군주입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성년이 되어 정적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고 그 뒤로 오랜 기간 다스리며 나라를 부강으로 이끌었던 점, 강력한 군주권에 짝하는 크고 아름다운 궁전과 정원을 축조한 점 등 여러 면에서 청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1654~1722)와 비견되는 인물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양편에서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두 사람은 공히 72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재위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을 매개로 서로와 각자가 다스리는 나라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흥미롭습니다. 부군 루이 13세의 사냥 별장으로 사용되던 파리 교외의 별궁을 기초로 엄청난 규모의 본궁(本宮)과 부속 정원을 조성한 루이14세는 이곳에 주요 정부 부서까지 둠으로써 작은 농촌 마을이었던 베르사이유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는 왕권에 도전할 여지가 있는 유력한 귀족들을 지척에 두고 감시하기 위해 한 해에 일정 기간 동안 이 왕궁에서 지내도록 했다고 합니다. 2000개가 넘는 창문, 1250개의 굴뚝, 67개의 계단. 그리고 최대 2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는 700개의 크고 작은 방들. 대단한 규모의 왕궁입니다. 부속 정원은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왕의 물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운하와 곳곳에 배치된 아름다운 분수, 정교하게 설계된 미로 등으로도 유명하지요. 프랑스 혁명으로 베르사이유 시대에 정점에 이른 프랑스 절대왕정은 붕괴했습니다. 그리고 이 왕궁과 정원은 세계 각지로부터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베이징 고궁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도화일보》에 실린 위 그림은 정원을 전경으로 두고 뒤로 베르사이유궁의 후면을 보여주는데,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아래 그림엽서의 조감도를 그대로 모사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시 그림엽서에 실린 것으로, 같은 시선으로 그려졌으나 세부 묘사에 차이가 있는 도상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도상이 20세기 초 막 세계에 대해 눈을 떠가던 중국의 독자들을 위해 제공되었다는 점은 세계가 다른 여러 가지 것들과 함께 시각적 경험도 공유하는 도정에 올랐음을 보여줍니다.
민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