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행’을 준비하며
《서유기》와 《드래곤 볼》
모험과 환상을 다룬 동양의 이야기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히는 《서유기》는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런데 현대 중국에 들어서부터는 우선 교조적인 유물 사관을 강조하던 사회주의의 억압 때문에 한 동안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환상을 다룬 《서유기》의 가치가 소홀히 취급되었고, 그나마 전문 연구자들은 이 작품에 내재된 반봉건적 성향을 강조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또한 영화와 텔레비전의 보급과 더불어 크게 유행한 무협물의 영향 때문에, 그와 비슷하게 환상적 세계를 다룬 《서유기》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다만 1980년대부터 이른바 ‘개혁 개방’의 여파로 고전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서유기》 이야기도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비록 이 작품에 담긴 세계관에 대해서는 아직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긍정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만화 영화와 텔레비전 연속극—조잡한 무협물의 냄새를 많이 풍기긴 하지만—이 제작되어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손오공과 이랑신二朗神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만화 영화인 《보련등寶蓮燈》은 기술적 측면에서도 허리우드의 만화 영화를 능가하는 새로운 경지를 연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또한 홍콩에서는 원작의 줄거리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여 불교의 ‘인연因緣’ 관념을 정교하게 풀어내면서, 아울러 저우싱츠周星馳의 익살스러운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두 편의 극장 영화가 제작되어 지금까지도 홍콩과 중국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에서 《서유기》는 주로 어린이를 위한 만화나 영화의 형태로만 알려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주로 고전 작품의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학문 풍토에 따른 전문 연구자들의 외면 때문에 비롯된 현상이었다. 결국 중국의 다른 고전 명작들과 마찬가지로 《서유기》도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어와 한문 문헌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의 손에 의해, 일본어 번역을 토대로 한 불완전한 번역본들만이, 대개 난해하지만 중요한 시사詩詞들의 번역이 빠진 상태로, 그리고 중국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 부족으로 인한 각종 오역을 포함한 채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그나마 1980년대 이후로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그것들조차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완역본’을 표방하는 번역본이 나온 것도 최근의 일인데, 이 번역본(문학과지성사, 2003)의 번역자인 임홍빈도 엄밀히 따지자면 전문적인 중국 고전소설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번역은 이 소설의 문학성보다는 의미의 전달에만 치중한 듯한 경향이 있다.
그런 와중에서 1980년대에 현대화된 각색을 거친 허영만의 만화 《날아라, 슈퍼 보드》가 나온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손오공의 근두운觔斗雲을 하늘을 나는 보드로, 삼장법사의 말을 승용차로, 저팔계의 쇠스랑을 바주카포로, 사오정의 항요장을 뿅 망치로 변형한 그의 참신한 발상은 《서유기》 이야기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하던 어린 세대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날아라, 슈퍼 보드》는 원본 《서유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캐릭터들을 대단히 특징적으로 변환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뺀질뺀질한 저팔계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하셔!”라는 특유의 화법을 내세우고, 원본에서 활약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사오정의 캐릭터를 획기적으로 변환한 점은 그 만화의 성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귀가 조금 어두워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사오정 캐릭터의 창조는 당시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허영만의 작품이 만화 영화로 제작되어 텔레비전을 통해 인기를 드높이고 있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드래곤 볼》이 수입되어 역시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선풍적인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역시 일본 작가가 만든 만화 《최유기》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가운데 《날아라, 슈퍼 보드》는 기본적으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가는 《서유기》의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드래곤 볼》은 《서유기》의 줄거리 자체를 해체하여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했다(《최유기》는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거기에서는 초능력을 가진 원숭이 손오공의 존재만 남아 있을 뿐, 나머지 등장인물과 줄거리는 원본과 거의 무관할 정도로 변형되었다. 《드래곤 볼》에서는 《서유기》의 삼장법사 일행이 구하고자 하는 불경 대신 일곱 개의 드래곤 볼을 설정하고, 삼장법사와 관음보살의 일부 특징들을 합친 듯한 무천 도사라는 인물을 설정했으며, 사오정과 저팔계에 해당하는 주인공들도 생김새와 이름은 물론 역할까지 완전히 변화시켜버렸다. 또한 요괴들과 술법을 겨루던 《서유기》의 전투 방식도 《드래곤 볼》에서는 과장된 무예와 초능력을 겨루는 방법으로 변형되어, 중국 무협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처럼 하늘을 날며 장풍掌風을 내뿜는 식의 초능력들이 싸움의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제 여기서는 주인공 일행이 일정한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그 때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적수와 대결을 벌인다는 기본 설정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모든 요소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심지어 《드래곤 볼》은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그 ‘현대화’의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손오공이 결혼해서 낳은 아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두 만화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른바 전문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만화들은 《서유기》의 줄거리 가운데 단순히 신나는 모험 이야기라는 일차원적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그 작품에 담긴 풍자성과 철학적 내용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날아라, 슈퍼 보드》는 원본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으로 각색했기 때문에, 저팔계와 사오정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담긴 풍자성을 한층 더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만화의 줄거리는 요괴와 주인공 일행 사이의 흥미로운 대결과 주인공들의 승리만을 강조할 뿐, 그러한 대결을 통해 원래 《서유기》의 화자(작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세계관과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안에 얽힌 선악의 갈등 구조에 대한 반성이라는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한다. 심지어 《드래곤 볼》의 경우에는 줄거리의 변형이 더욱 극단적이다. 이 만화는 강력한 요괴를 물리치기 위한 손오공의 의지와 노력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전체적인 줄거리의 기조를 선악의 대결로 압축시켜버린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만화는 일견 생존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에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와 자존심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이분법적 대결 구도에서 부각되는 영웅적 주인공에 대한 일방적인 칭송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만화는 사실 원본 《서유기》의 화자(작자)가 심혈을 기울여 강조했던 조화로운 세계의 구조를 거꾸로 극단적인 갈등의 구조로 환원시켜버린 셈이다.
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서유기》의 화자(작자)는 단순한 선악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거부하고, 나아가 선과 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음으로써, 세계의 구조를 이분법적 대결의 마당이 아니라 삼차원적 영향 관계가 뒤얽힌 그물망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주관적인 이권에 의해 판단되는 선악이란 결국 허구적인 포장에 지나지 않으며, 불멸의 선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노력—‘정精’, ‘기氣’, ‘신神’의 수련을 통해 ‘도道’와 합치되고자 하는 수련—이 어울려 성과를 이룰 때 비로소 이상적인 세계가 도래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서유기》에 묘사된 주인공들과 요괴들의 대결은 어느 한 쪽의 궁극적인 소멸을 지향하는 극단적 적대 관계가 아니라, 원래 하늘나라에 있다가 타락하여 요괴가 된 상대를 다시 선한 길로 귀의하도록 권하는 불가피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대승불교에서 제도하고자 하는 ‘중생’의 범위 안에는 요괴들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싸움에서는 항상 결과보다 과정과 명분이 중요하다. 이에 따라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잡아가기 위해 술법을 부리며 계책을 세우고 있는 요괴를 발견하고도 몰래 그에게 기습 공격을 하여 때려잡는 일 따위는 하지 않고 정정당당한 대결을 위해 물러난다(제85회). 그리고 요괴의 소굴에서 어렵게 저팔계를 구해 도망칠 때에도 손오공은 창피하게 뒷문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당당하게 앞문으로 뚫고 나가는 길을 택한다(제76회). 또한 거의 모든 싸움들에서 주인공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직접 맞붙기 전에 항상 입씨름을 통해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려고 하고, 심지어 은각대왕銀角大王과 같은 요괴조차 손오공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대답을 하면 자금홍紫金紅 호로에 빨려 들어가게 될 줄을 알면서도 결국 대답하고야 마는 것(제34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힘의 우열 관계에 의한 폭력의 논리를 상업적으로 정당화하는 《드래곤 볼》에 내재된 논리는 ‘도널드 닥’의 음모와 유사하다. 단지 양자는 각기 ‘동심’과 ‘정의’를 내세워 경제적 이권을 옹호하고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점에서 표면적인 차이를 드러낼 뿐이다. 매 회마다 설정된 ‘악당’을 무찌르고 ‘정당한’ 대가로 돈을 챙기거나 명예를 얻는다는 식의 설정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가 증명하듯이,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이 교묘하게 위장된 ‘노동의 대가’로서 재화 획득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평화를 수호하고 인류 생존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폭력적 정치권력의 자기 합리화는 종종 친밀한 공생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저 단순한 만화에서 지난날 미국과 일본이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저질렀던 비열하고 잔혹한 식민 지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결코 나의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서유기》 자체에 ‘큰 나라’로서 중국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화 민족을 대표하는 고전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이 작품에는 그런 자부심과 세계관이 더욱 철저히 녹아들어 있다. 특히 서역의 작은 나라들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드러나는 어리석고 무능한 국왕과 ‘야만적’인 문화적 풍습은 사실 일방적인 중국인의 관점을 반영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쨌거나 《서유기》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정치 구조 역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진부하기 그지없는 봉건적 황제 지배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서유기》는 ‘현대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나 상식화된 이야기이지만, 사실 조선시대를 장식한 대표적인 걸작들 중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구운몽(九雲夢)》이나 허균(許筠: 1569~1618)의 《홍길동전(洪吉童傳)》, 남영로(南永魯: 1810~1858)의《옥루몽(玉樓夢)》, 그리고 작자 미상의 《전우치전(田禹治傳)》 등은 모두 《서유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이룩된 소설들이다. 그런데 굳이 꼼꼼히 따져보지 않더라도, 이 작품들이 《서유기》에 내재된 크고 작은 주제와 모티프들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재창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문학’으로 승화시켜놓았음은 분명하다. 이 문맥에서 내가 의미하는 ‘현대화’는 바로 이처럼 익숙한 고전 문학 작품의 주제와 모티프들을 새로운 시대와 문화적 조건에 맞게 변형modification함으로써 또 하나의 작품을 창작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모든 고전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서유기》의 현대화에서도 원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선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런 전제는 이른바 현대화를 표방하는 개작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려는 독자들에게도 현대의 각종 개작과 변형 작품에 내재된 상업적 음모를 명확히 간파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줄 것이고, 나아가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바람직한 자양분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유기》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세세한 학술적 토론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논의 자체가 《서유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적잖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런 논의들은 애초에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 가능성을 전제로 우리 앞에 놓인 ‘열린 텍스트’로서 《서유기》의 의미를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나는 이 작품에 관한 기존의 학술적 논의를 정리하여 독자들을 ‘교육’하기보다는 독자 개개인들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이 작품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사유의 실마리를 던져두는 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 확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기에는 나의 공부와 사유의 깊이가 아직 일천하기 그지없다. 다만 전통 시기 중국의 세계관과 문학 현상에 대해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이 글에서는 《서유기》에 내재된 다양한 문화적, 철학적 함의들—그것이 진지한 의미에서건 문학적 수사법(혹은 말장난)의 의미에서건—과 관련된 기본적 사실들과 그에 관한 내 생각을 제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