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예술 전통을 스크린에 투사하다
2015년 8월,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바캉스 프로그램 중 하나로 <협녀>를 틀었다. 호금전(胡錦銓) 감독이 1971년 만든 영화가 4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다시 우리에게 왔다. 물론 1970년대 당시에도 상영은 됐었다. 지난 세기에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영화가 세기를 넘어 다시 도착하자 한국 마니아들은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8월 16일 두 번째 상영을 보러간 나는 200자리 객석을 거의 메운 열정에 적잖이 놀랐다. 낙원동 살림을 정리하고 새로 옮긴 서울아트시네마의 터전이 제법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안도감때문이었을까. 영화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과 함께 했던 그날 ‘시네 토크’를 여기에 옮겨 적는다.
‘토크’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하나는 혹시나 이 영화를 최근 개봉한 <협녀: 칼의 기억>과 착각한 관객은 없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조금 과분하다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시네 토크’ 시간에 혹시 이병헌이나 전도연을 만날 기대를 하고 온 관객이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이긴 했지만, 사실 두 영화는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영화를 잘 보고 읽는다면 우리 영화 <협녀: 칼의 기억>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 같은 제목을 쓰고 있는데다, 그것은 ‘협’이라는 어떤 태도나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걱정은 러닝타임이 다소 길다는 것이다. 공식 상영 시간은 180분, 세 시간이다. 요즘처럼 장편영화가 90분에서 120분 정도로 맞춰져 있는 관습에 비춰 보면 꽤 긴 편이다. 원래는 더 길었다고 한다. 감독판 영화는 네 시간이 넘었지만 상영업자의 요구로 편집 과정에서 지금처럼 세 시간으로 줄었다. 그나마 1975년 제28회 칸 영화제에 출품한 버전은 2시간 남짓이었다. 오늘 상영된 영화는 감독의 편집본인 세 시간짜리를 디지털로 다시 만든 것이다. 대만 국가영화센터(國家電影中心; Taiwan Film Institute)와 칸 영화제가 협력했고, 그 결과를 올해 칸 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다. 영화가 칸에 출품된 지 4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었다.
국내에서도 <협녀>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홍콩영화회고전을 통해 <협녀>를 다시 데려왔다. 200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준비한 ‘호금전 회고전’에서는 <협녀>를 비롯한 감독의 여러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서울아트시네마와 함께 하게 된 오늘의 <협녀>.
1975년 칸 영화제에 간 <협녀>는 최고기술상을 받았다. 중화권 영화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물론 국제영화제 수상 자체가 처음은 아니다. <어광곡>이 193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처음으로 명예상을 받은 전력이 있다.) 홍콩과 대만 영화계는 당연히 흥분했다. 호금전도 새로운 힘을 얻게 됐다. 호금전은 홍콩 쇼브러더스에서 입봉하여 데뷔작 <옥당춘>을 비롯해 <대지아녀>, <대취협>(한국 제목은 ‘방랑의 결투’) 등을 찍었다. 하지만 빠른 리듬의 영화를 원했던 쇼브러더스와 한 장면이라도 정성들여 자세히 찍고 싶었던 호금전은 작업 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결국 네 번째 작품 <협녀>는 대만으로 건너가서 국제영화사(International Film Company)와 작업했다. 이 때문에 대만 자본과 홍콩의 제작방식이 결합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협녀>는 한 마디로 “중국의 예술 전통을 스크린에서 이어받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협녀>에 관한 국내 평론가들의 의견들은 주로 경극의 리듬을 살렸고, 산수화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불교 철학을 승화시켰다는데 모아진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부 세부적인 내용들은 보충되거나 수정될 필요가 있다.
나는 <협녀>가 중국의 연극 전통, 미술 전통, 문학 전통, 사상 전통을 스크린에 투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중국 전통을 현대 영화 속에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한 영화다. 어쩌면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건너 온 영화라는 그릇에 동양의 이치를 담고자 했던 노력이 빛나는 영화다. 영화를 두고 일종의 중국의 ‘자기화’ 과정을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협녀>는 중국의 ‘평극’(評劇) 전통을 이어받았다. ‘평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경극보다는 더 소박하고 서민적인 연극으로 허베이(河北)과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경극’의 한 분파라고 말한다 해도 큰 잘못은 아니겠지만, 엄격히 말하면 ‘평극’이 옳다. 여성 역할은 여성이 직접 출연하고 또 음악도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무술 대결 신들이 보여주는 리듬감은 평극의 그것을 꼭 빼닮았다. 호금전은 배우들의 무술 동작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연출했다. 마치 배우가 무대에서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절제되고 리듬감에 맞춘 동작들이 화면을 장식했다. 전통 연극의 분위기를 화면 위에 그대로 자아낸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영화를 연극의 한 종류 내지는 연극의 확장이라고 보았다. 영화가 들어온 뒤 그 이름을 ‘서양 그림자극’(西洋影戱)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서사 전통은 기본적으로 신화-전설-역사-소설-연극-영화 등으로 이어져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예컨대 ‘삼국지’ 이야기는 이런 중국적 스토리텔링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1900년대 초기부터 1980년대까지 많은 연극영화가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전체 제작 편수의 약 30-40%를 차지할 정도다. 연극영화도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대략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연극 무대를 직접 촬영하는 영화다. 또 하나는 연극배우들에게 야외 세트장 등에서 연기를 하도록 하고 이를 촬영하는 영화다.
이런 식의 영화는 초기 중국영화에서 중요한 한 장르를 형성하고 있었고, 홍콩에서도 이미 다수의 연극영화가 제작되고 있었다. 예컨대 1960년대 평극영화 <화위매>(花爲媒)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호금전은 이러한 배경과 맥락 위에서 <협녀>를 제작했고, <협녀>는 많은 부분 ‘연극영화’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저자거리 세트장이나 주인공 고성제(석준 분)의 집을 중심으로 한 세트장들이 그렇다.
물론 호금전의 <협녀>가 연극영화 자체를 표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홍콩 영화의 주요한 장르 중 하나였던 연극영화의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또 연극영화가 홍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함께 해 온 전통이었다. 예컨대 최초의 중국영화라 일컬어지는 <정군산>(定軍山)은 경극 배우를 불러다 그 연기를 그대로 촬영한 것이었다. 그런 전통이 홍콩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협녀>는 당대 홍콩 영화가 가지고 있던 특징인 연극영화의 수준에서 더 나아간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by 임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