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 서당歲暮書堂/ [宋] 왕혁汪革
서리 겹겹이 계단에
흰 비단 펼치고
바람 사나워 피부에
소름 돋네
마음도 씩씩하고
눈귀 맑으니
생각도 속됨을
따르지 않네
霜重階鋪紈, 風凜肌生粟. 心莊耳目淸, 思慮無由俗.
한시를 읽어보면 대체로 봄 상심(春恨), 여름 우울(夏悶), 가을 시름(秋愁), 겨울 곤궁(冬窮)을 묘사한 작품이 많다. 하나 같이 슬픈 감정이고, 쉽게 말하면 사시사철 앓는 소리다. 중국 현대문학 개창자 후스(胡適)가 이런 경향을 일컬어 ‘병도 없으면서 신음한다(無病呻吟)’고 갈파한 것도 근거 없는 비난이 아니다.
중당 시대 한유는 자신의 불우한 친구 맹교를 위로하며 “무릇 만물이 그 평정 상태를 잃으면 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라고 했다. 이는 사마천의 “울분을 펼쳐 글을 쓴다(發憤著書)”는 입장을 계승한 창작론으로 비애와 분노가 문학의 한 근원임을 인정한 이론이다. 하지만 관건은 문학 작품에 작가의 진솔한 삶과 진지한 감정이 담겨 있느냐다. 군자연(君子然), 은자연(隱者然), 환자연(患者然), 피해자연 하는 코스프레를 남발하면 곧 바로 독자들은 그 진부한 감상을 알아챈다. 그런 구태의연한 상투성이야 말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이 시는 흔히 접하는 겨울 곤궁이라는 포즈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겨울이라고 모든 사람이 방구석에 칩거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건 아니다. 이 시는 중국 송나라 때 작품이므로 제목의 세모는 당연히 음력 섣달이다. 겨울바람을 맞아 피부에 오송송 소름이 돋는 것처럼 서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흰 비단 같은 서리가 덮였다. 찬바람을 쐬면 느슨한 정신이 팽팽해진다. 신을 모시는 제관들이 왜 찬물로 목욕하겠는가? 서당의 공부도 마찬가지다. 찬바람에 눈과 귀와 마음이 모두 맑아진다. 겨울이 아니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온갖 속됨을 찬양하는 세상에서 겨울은 우리에게 삶의 경건함을 알려준다.(사진출처: 國家地理中文網)
한시, 계절의 노래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