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공부하는 친지의 새로운 성과를 살펴보는 건 뿌듯한 일이다. 그 내용이 뛰어날 때 그 외로운 작업의 순간순간에 그가 느꼈을 희열에 감정이 이입되기도 한다. 프랑스 고고학자 장 길렌과 장 자미트의 ❬전쟁 고고학: 선사시대 폭력의 민낯❭(사회평론아카데미, 2020)이 그런 책이다. 옮긴이 박성진 선생은 내가 단국대학에서 가끔 만나 진지한 학문적 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거의 유일한 동반자다.
어떤 면에서 인류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다. 그럼에도 선사시대의 폭력과 전쟁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의 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았다니 놀랍다. 2001년에 출간된 이 책이 그 본격적인 효시라고 한다. 아마 자료상의 문제가 컸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출간 이듬해 스페인어로, 2005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유럽의 선사시대 위주로 근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주요 자료까지 두루 활용하며 통찰력을 발휘한, 고고학이나 고대사에 관심 가지는 독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책이다.
중국 고대사를 강의하면서 보통 신석기시대, 그것도 후기인 용산문화 시대(기원전 3000년~2000년)에 들어서야 성벽이나 도시의 출현과 함께 족속들 사이의 갈등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것으로 가르쳐왔다. 이 책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20만년 동안 인간, 즉 호모사피엔스는 새로운 기술 축적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이나 지적으로 동등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평화스러웠던 구석기시대와 호전적이었던 신석기시대를 대비하려는 이론은 문화적 요인에 근거한 주장”일 뿐이라고 본다(67쪽). “선사시대에도 폭력이 인간 조건 중의 하나였으며…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 불화, 착취, 잔인함이 늘 있었으니…먼 옛날 사람들이 평화롭고 순진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377쪽)
저자들은 “지중해 연안과 유럽에서 일어난 최초의 폭력 및 무력충돌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와 “주어진 (관련)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9쪽)라는 물음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제1장에 해당하는 “사냥-채집 사회에서의 폭력”에서 우선 1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식인에서 비롯된 선사시대의 식인 풍습과 구석기 후기인 1만5천 년 전의 동굴벽화에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 논한다. 나아가 구석기시대가 마감하던 시점에 발명된 활과 동 시기의 대량학살 유적, 중석기시대의 무력 충돌 흔적 등을 통해 초기 정착 시대에 잠재력이 풍부한 땅에 대한 경쟁이 집단폭력을 유발했을 것으로 본다.
“농경사회는 평화로웠나, 요란스러웠나”라는 제목의 이어지는 장은 자연에 대한 자신감을 지닌 동쪽으로부터 온 농경인과 기존 사냥인의 만남에서 “환대, 의심, 대립” 등의 유형이 공존했을 것으로 본다. 특정 집단을 상대로 발생했을 수 있는 학살 유적을 통해 인구압 등 긴장관계가 폭력을 유발했을 가능성과 함께, 다양한 식인의 동기, 바위그림 등 예술에 나타난 폭력, 공동체 사이의 전투, 사냥과 전쟁의 상관관계, 여성이나 아이 같은 약자의 희생에 대해 다룬다.
“표적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발굴된 기원전 8000년~4000년 경 부상 흔적이 있는 무덤들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개인의 특징이 제거된 집단 무덤의 특성과 함께, 인골들의 부상 부위를 토대로 화살 궤도를 추정하여 희생자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살펴본다. 주로 남성인 희생자들은 마을 간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유골들에 나타나는 신석기시대의 원형 절제 수술 수준이 높았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고대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는 마지막 두 장인 “전사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영웅의 출현”이 가장 흥미로웠다. 전자는 주로 위신재인 부장품, 즉 활과 화살, 단검, 도끼를 통해 전쟁과 관련된 공동체 이데올로기의 단서를 추적한다. 특히 이러한 도구들이 금속화되면서 우월한 남성 이념이 탄생했고, 무기가 표현된 사람 모양 선돌에서 집단 간 전쟁이나 무기의 역할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전사가 중시되는 조건이 ‘전사 이데올로기’를 낳아 카리스마를 지닌 군장과 ‘원시 귀족 정치’가 출현한다. 거주 공간의 재화를 지키기 위한 요새화가 동반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전사 중의 최고 전사는 결국 영웅 신화로 재탄생하여 용기, 명예, 충성심 같은 덕목이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지중해와 유럽에서 기원전 두 번째 천년기부터 시작된 청동기시대에 전사의 상징으로 단검이 유행했고, 철기시대에는 대형 장검으로 발전한다. 성곽과 요새가 확대되고 전차와 기병대로 이어지는 기술의 발전으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강력한 통치자를 위한 초대형 무덤에 많은 집단 희생이 동반했고, 종교적 의례에서 희생된 미라의 흔적을 통해 정의, 사회적 징벌, 형법 같은 개념의 맹아를 읽어낼 수 있다.
결국 타자와 대립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이 선사시대 이래로 폭력을 상존케 했지만, 협업이나 협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 역시 그것만큼이나 강렬했다. 따라서 두 가지 모두 인간의 본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마지막 주장이다(376-377쪽).
그러나 폭력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본성적으로 폭력성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필시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 동물의 무리 짓기, 즉 사회화의 본능일 것이다.
너무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라 요약 자체만도 상당히 힘들었다. 그만큼 많은 새로운 생각을 유발하는 책이다. 조숙한 문명을 발전시킨 근동의 외연에 위치한 유럽 선사시대의 폭력과 전쟁 양상을 살펴보면서 문명 발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상기한다. 고대 문명 비교 연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박성진 선생답게 눈에 띄는 오류를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다. 수개월 동안 공을 들였다는 역자 주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높이 평가할 이 책의 백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역자 서문을 다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전쟁’이란 원정, 기습, 살인, 약탈처럼 모든 집단과 집단 간 무력충돌을 포괄하는 가장 느슨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유의해달라고 한다(372쪽). 이에 대해 “모든 폭력이 전쟁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역자의 반론(18-23쪽)이 충분히 일리 있으면서도, 이 번역서의 제목에 굳이 “전쟁”을 집어넣은 것과는 모순되어 보인다. “전쟁 고고학”이라는 제목은 물론 탁월한 선택이다.
실력만큼 합당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해 항상 안타까움을 자아내도록 하는 역자에게 이 좋 은 책의 출간이 연구자로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