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여행하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들렀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그저 그러려니 하는 담담한 마음으로 갔는데, 막상 폭포를 마주하고 느낀 것은 예상을 뛰어넘어, 말 그대로 “상상을 절(絶)하는” 대책 없는 막막함과 경이로움에서 비롯된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는 그 어떤 막막함에 대해 칸트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균열과 불일치를 맛보는 것이라 했으며, 이때 숭고한 감정이 일어난다고 했다. 사람은 종교적 체험이나 웅장한 자연을 마주할 때 등줄기에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숭고미인 것이다.
예전에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현위의 인생』과 왕쟈웨이(王家衛) 감독의 『동사서독(東邪西毒)』을 보다가 배경으로 나오는 웅장한 황허(黃河)의 모습에 압도되어 저곳이 어딘가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곳이 후커우폭포(壺口瀑布)임을 알게 된 뒤부터 언젠가 한번 가보리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후커우폭포는 대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외진 시골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2004년에 산시(山西) 일대를 여행할 때도 일정상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그저 침만 삼키고 돌아서야 했는데, 오히려 산시(陝西)를 여행하는 와중에 마침내 기회를 잡게 되었다.
후커우폭포는 황허의 중류에 해당하는 곳, 산시성 린펀시(山西省 臨汾市)에서 서쪽으로 165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진섬협곡(晋陝峽谷)의 황허 하상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 서쪽은 산시성(陝西省) 이촨현(宜川縣) 후커우향(壺口鄕), 동쪽은 산시성(山西省) 지현(吉縣)과 인접해 있으며, 지현으로부터는 서쪽으로 4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중국에서는 구이저우성(貴州省) 황궈수폭포(黃果樹瀑布) 다음으로 치는 제2대 폭포이다.
폭은 50여 미터이고 높이, 곧 낙차는 30여 미터이며, 조용히 흐르던 황하가 폭포를 이루며 장관을 이루어내는 모습이 마치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르는 듯하다 하여, 후커우폭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를테면, 『상서(尙書)』<우공(禹貢)> 편에서는 “대개 하수가 소용돌이치며 떨어지는 것이 주전자와 같다(蓋河旋渦, 如一壺然)” 하였고, 당대(唐代)의 시인 리보(李白)는 “황하의 물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거세게 흘러내려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라고 노래했다.
아침 7시 40분에 옌안(延安)을 출발해 황토 고원 위로 난 좁은 시골길을 따라 몇 시간을 달린 뒤 10시 50분이 되어서야 우리는 후커우폭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어 마주한 후커우 폭포의 모습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질없는 말을 아끼고 오감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타이완의 한 스턴트맨이 이 후커우폭포를 자동차로 날아 넘은 일이 있어 한때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대만 스턴트맨 커서우량, 홍콩반환 축하 대모험―1.58초만에 폭 55m 후커우폭포 건너
홍콩 반환을 한달 앞둔 5월30일 중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자동차를 타고 황하를 날아 넘어가는 대 모험이 펼쳐져 대륙이 떠들썩했다. 「비월황하」(飛越黃河)로 명명된 모험의 주인공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 커서우량(柯受良․44)씨. 황하를 넘어간 지점은 산시성(山西省) 지현(吉縣)과 산시성(陝西省) 이촨현(宜川縣) 사이의 호구폭포(壺口瀑布)다.
커서우량은 이날 오후 1시19분 산시성(山西省) 쪽에서 시속 145km의 속도로 차를 몰아 폭 55m의 폭포 위를 1.58초만에 통과, 산시성(陝西省) 쪽 착륙지점에 설치된 특수 종이상자 속으로 안착함으로써 5만여 관중을 열광시켰다.
중국 전역과 홍콩에 텔레비전으로 위성중계된 이날의 「황허 날아넘기」는 세계 최초로 시도된 묘기로 자칫 실패할 경우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서 성공하는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후커우폭포는 400여m의 폭으로 흐르던 황허가 55m로 좁아지면서 30여m 벼랑 아래로 물이 떨어지는 곳, 물보라가 수십m 높이까지 튀어 올라와 그 모양이 마치 거대한 주전자속 물이 끓는 듯하다고 소문난 세계 최대의 황수(黃水) 폭포다.
만약 「날아넘기」를 시도하는 차량이 이 곳을 건너지 못한 채 도중에서 떨어질 경우, 주변에 구조대를 배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운전자가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황허를 건너는데 이용된 차량은 미쓰비시사에서 특별 제작한 것으로, 무게 1491kg에 수동식 기어로 조작하게끔 고안됐다. 차안에는 30분간 사용할 수 있는 산소병이 준비됐고 화재 발생 시 3초 내에 진화되도록 개발됐다.
55m의 폭포 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일정구간 내에 최대한 고속으로 질주할 필요가 있으나 현장의 지형조건상 불과 265m 길이의 가속구간밖에 확보하지 못해 이날 모험의 성공여부가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폭포를 날아 넘은 뒤의 착륙 지점에도 겨우 50m의 쿠션도로밖에 확보되지 않았다.
커서우량은 이번 황허 날아넘기를 위해 무려 2년에 걸친 준비작업을 해왔으며 이 기간 중 둥완(東莞) 시안(西安) 등지에서 세 차례에 걸쳐 실제와 똑같은 날아넘기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9일의 첫 연습에서는 130km의 속도로 달려오다가 38m를 날았으나 차 앞부분이 먼저 땅에 닿는 바람에 3000만 원짜리 차가 파손되기도 했다. 이어 4월8일에는 42.4m를, 5월22일에는 43m를 각각 날았다.
중국인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커서우량은 중국 저쟝성(浙江省) 닝보(寧波)에서 출생해 세 살 때 타이완으로 갔다. 스턴트맨으로 활약했는가 하면, 한 때는 영화감독까지 한 이색경력의 소유자다. 지난 82년에는 「최가박당」이라는 영화촬영 중 빌딩3층에서 창문을 뚫고 땅에 뛰어내리는 장면을 성공해 유명해졌다.
1992년 만리장성을 유람하던 커서우량은 외국의 스턴트맨이 장성을 날아 넘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중국의 상징인 장성을 외국인이 먼저 날도록 할 수는 없다”며 그 해 11월 북경 교외 진산링(金山嶺) 만리장성의 봉화대를 자동차를 타고 날아 넘었다.
이번 「비월황허작전」을 위해 홍콩의 봉황위성중문 TV측에서 약 1억5000만원을 협찬했으며, 보험 회사에서는 61억원짜리 보험에 무료 가입시켜 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인들은 대모험에 성공한 커서우량을 「아시아 제일의 비인(飛人)」이라고 부르며 영웅대접을 하고 있다. 커서우량이 이처럼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것은 그가 대만에서 건너와 홍콩 반환을 경축하는 이벤트를 성공시켰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황의봉/ 동아일보 북경 특파원〉Copyright(c) 2005 All rights Reserved.
칭짱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한 황허는 닝샤(寧夏)와 내몽골의 경계를 따라가면서 오르도스 평원을 적시다가 진섬협곡(晋陝峽谷)에서 남하한다. 산시성(山西省)의 옛 이름이 진(晋)이었으니, 짐섬협곡은 산시성(山西省)과 산시성(陝西省)의 경계를 이루는 협곡을 흘러가는 셈이다. 진섬협곡을 도도히 흘러가던 황허는 유명한 등용문(登龍門)의 고사가 나온 룽먼(龍門)에서 또 한번의 용트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로는 위세가 한풀 꺾인 채 황허는 황해로 흘러드는데, 놀라운 것은 황허가 실어 나르는 황토의 양이다. 통상적으로는 하천 속에 흙모래가 5퍼센트만 섞여 있어도 대단히 많은 양으로 인정받는데, 황허의 토사는 보통 46퍼센트에 이르며, 어느 곳은 63퍼센트라는 믿기 어려운 수치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 한다. 이 때문에 황허는 강바닥에 퇴적물이 쌓여 자주 강물이 막히고 범람을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황허의 치수는 역대 왕조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국가 사업의 하나였다. 혹자는 이러한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필요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결국 황허와 그 주변의 황토 고원은 중국 문화의 발상지이자 중국 인민의 신산한 삶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