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차호는 자갈색 니료를 사용하였다. 길쭉하게 둥글고 굽은 돌기 형태의 몸통으로 여섯 조각으로 갈라진 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손잡이 위에는 날개처럼 치켜 올라간 부분이 있고 아래 부분은 꺾이며 마무리 된다. 둥근 물대는 약간 굽어있고 바닥에는 둥글고 납작한 월병 형태의 발이 있다. 한 발은 물대 밑에 있고 두 발은 손잡이 양쪽에 있다. 뚜껑은 윗부분이 평평하고, 호의 표면은 매끄럽고 부드럽다. 호 내부는 다소 거칠다. 호의 입과 호의 뚜껑은 긴밀하게 맞물리고 만듦새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제작 수준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호 바닥에는 ‘명원鳴遠’이라고 행서로 새겨져 있고, 양각의 ‘진명원陳鳴遠’이라는 정방형의 도장이 찍혀있다.
진명원의 자는 명원鳴遠, 호는 학봉鶴峰이다. 석하산인石霞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청대 형계荊溪 지금의 장쑤江蘇 이싱宜興 사람이다. 대대로 자사를 다루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진자휴陳子畦의 아들이기도 하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강희 연간의 자사호 명인이다.
쉬시우탕徐秀棠은 《중국자사中國紫砂》에서 진명원이 대략 강희 19년 (1680년)과 강희 25년 (1686년)에 생존해있었다고 고증하였다.
서개봉徐喈鳳이 편찬한 《의흥현지宜興縣志》에는 진명원에 대해 ‘그 나이가 아직 많은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로 늙어 보였다其年雖未老,而特爲表之’고 하였다.
청대 초기 시인 김장金張이 지은 《개로편년시초介老編年詩抄》 13권에는 가장 이른 시기인 강희 24년 (1686년) 진명원에게 써준 <증진명원贈陳鳴遠>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로써 계산하면 진명원은 순치順治(1638~1661) 연간 태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욕후비자호浴后妃子壺’의 바닥에는 ‘정미년 음력 2월丁未杏月’의 글자까 쓰여있어 이것이 강희 6년 (1667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진명원의 출생년대는 숭정제崇禎帝(1611~1644) 말년까지 앞당겨질 수 있다.
이 차호는 현재 상하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